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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Sep 28. 2024

나쁜 사마리아인에게 주어진 기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안녕하세요. oo에서 나왔습니다."

국제구호단체 조끼를 입은 남자가 2층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로?"

화요일 오후는 일주일 중 제일 바쁜 시간이다.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을 때 나타난 손님이 반갑지 만은 않았다. 들어보니 후원 신청을 하라는 이야기라 '이미 하고 있어요.' 라며 대화를 빨리 마무리 하려 했다.

 "정기 후원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이야기만 좀 더 드려도 될까요?"

 "지금은 너무 바빠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끊었다. 불청객을 돌려보내고 일을 하러 돌아갔지만 몰인정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찜찜했다. 화요일 오후처럼 선행을 강요받는다고 느낄 때가 가끔 있다. 지하철에서 무턱대고 볼펜 등을 다리에 올려놓는 사람을 맞닥뜨렸을 때, 시장에서 외다리를 끌며 지나가는 장애인의 모금함을 지나쳐갈 때, 불우이웃돕기라며 복조리나 장갑 등을 사라고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만났을 때다. 그러나 그걸 강요한 이는 정말 그들이 맞을까?      


 펄롱은 다섯 딸과 아내가 있는 집의 가장이다. 미혼모가 된 엄마를 가족들이 외면할 때, 그녀를 해고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받아들여 준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자랐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원망하기보다 '거두어 주고 보살펴 준 사람이 있었기에 운이 좋아' 라고 생각하는 남자다. 자기 집 창문 수리도 급하지만 잔돈이 생기면 사정이 딱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성의에 대한 보답도 할 줄 안다. 가게 주인을 생각해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구입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왜 내가 받은 사탕을 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하는 사람. 펄롱은 그가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날에 받았던 화려하지 않지만 실용적이고 따뜻한, 보온 물주머니 같다.     


 성실하게 일해 자기 가게를 가지게 되었고 현실적이며 부지런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해서 살고 있지만 그들 부부에게도 안정이란 사전에만 있는 단어다. 주위를 둘러보면 갑작스런 불운으로 회복하기 힘든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이웃들이 많다. 늘 세상은 찬바람 부는 한겨울이다. 조용히 살며 아이들이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는 게 인생 목표인 펄롱. 그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는 어느 날 성당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학대받는 여자아이들을 보게 된다. 흉흉한 말들이 들리기도 했지만 '설마'하며 모른 채 지나쳤던 구더기 뚜껑을 펄롱이 열게 된 것이다. 때로 신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길에 우리를 우연히 데려다 놓는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아름다워 보였던 길, 혹은 아예 보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길이다. 그러나 문을 열어버린 후에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이기적인 한탄은 소용이 없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소녀를 도울 것인가, 모른 척 할 것인가, 선택 앞에 선 선한 소시민 펄롱의 팽팽한 심리적 줄다리기 그린 소설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이라고 묻는 펄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맞받아치는 아내 아이린의 말도 일리가 있다.“미시즈 윌슨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 안 들어? 그랬다면 우리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다시 펄롱 쪽으로 기운다.

“미시즈 윌슨이 우리처럼 생각하고 걱정할 게 많았겠어? 세상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 아니었냐고." 부부의 진지한 대화에 나의 마음이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한다. "알겠지만 그곳하고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 뿐이라고.” 그러다 이웃의 이런 충고가 마치 협박조의 결론으로 들리며 '그래 침묵하자' 쪽으로 공이 탁 튕겨 나간다. 그러나 이런 나의 선택은 독자로서도 개운하지 못하다.     


 '펄롱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지만 말고 너는 어떻게 할 건지 대답해봐.' 나의 선택을 재촉하는 내면의 소리가 들렸다. 비슷한 이야기들을 제법 읽어오지 않았던가. 책에서 만난 두 남자가 떠올랐다. 한 명은 잘 나가는 변호사로 스스로를 공명정대하고 이타적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남자다. 어느 밤 센 강변을 지나다 강물에 몸을 던지려던 여자를 보게 된다. 외면할까 말까. 잠깐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린다. 남자는 그 일 이후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도 믿을 수 없어진다. 또 다른 이는 믿었던 숙부로부터 재산을 뺏기는 배신을 당한 후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 선생. 자신은 절대 그런 비겁한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를 친구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열등감과 질투심에 충동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친구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다. 그 후 친구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한다. 유서에는 선생에 대한 원한도 그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누구도 그 자살에 선생이 관여되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예정대로 친구가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을 하지만 선생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었다.  

   

 한 명은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털어놓으며 스스로를 속일 수밖에 없는 삶을, 다른 한 명은 스스로를 속일 수 없어 자신을 죽이고 마는 삶을 선택을 하게 된다. 고민할 시간도 없었던, 센 강의 남자나 선생보다 펄롱이 나은 상황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미리 그 상황에 놓여있는 상상을 해 볼 수 있는 나는 구원의 기회를 얻은 것인가. 그러나 다시 마주한 선택 앞에선 왜 매번 처음처럼 우두망찰할 수밖에 없는가.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도 펄롱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알 수가 없어 조마조마했다.


“이 길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숲에서 길을 잃은 펄롱에게 노인이 건넨 말을 떠올렸을까. 펄롱은 아내의 에나멜 구두를 찾은 후 집이 아닌 소녀에게로 향한다. 마지막까지도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안고서. 그러나 석탄광 문을 열었을 때 그가 바라던 반전은 없었다. 그는 맨발의 세라를 데리고 큰길로 걸어 나온 후 자신의 외투를 벗어준다. 나는 ‘기억에 오래 남는 소설의 결말은 해피엔딩을 지양한다.’ 는 나름의 공식이 가지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 공식에는 조금 비켜선 결말이었다. 그러면서 문득 깨달았다. '아, 나는 이 결말을 해피핸딩이라 여기고 있구나'.    

 

 선택한 길은 선택하지 않은 길보다 더 험할까? 가보지 않은 길의 풍경은 100% 알 수 없다. 그러나 펄롱이 선택한 길은 그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을 위선자로 여기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아무리 바빠도 멈추어 서서 회상에 젖게 되는 때가 있다. 성공한 삶은 돈을 많이 벌어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다. 회한 없는 삶을 선택한 자에게서는 빛이 난다. 그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만큼 큰 은총은 없으리라. 그 빛은 두려움을 누르고 펄롱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문장을 빌리자면 '감히 기대해도 될까 싶은 일이 실현되는' 순간은 독자에게도 은총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 외로워지는 사람이 있다.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지켜내는 건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걸 펄롱을 통해 배운다. 소녀를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었고 나는 이것을 해피엔딩이라 믿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남을 도울 줄 아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바람, 푼돈에 몰인정한 사람이 되기 싫다는 자존심. 그에 맞서 돈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남는 이득. 그 둘 사이를 빠른 시간 안에 저울질 하느라 선행을 강요받고 있다고 느낀 건 아니었을까. 회한의 두려움을 아는 마음의 소리가 바른 판단을 하라고 나를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맨발인 세라에게 아내의 구두까지는 내어주지 않은 펄롱. 작가는 모든 걸 건 거대한 선의가 아니라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보통 사람의 '사소한 선의'를 보여주고자 했을까. 나는 이상하게도 이 부분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나를 위한 선행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이렇게 생각하면 큰 부담도, 죄책감도 줄 것 같았다. 화요일 오후의 찜찜함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는 동안 '커피 두 잔 값 정도로 아이들이 한 달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데 동참할 걸 그랬다. 다음엔 망설이지 말아야지.'란 다짐으로 바뀌었다. 펄롱은 갑작스레 나를 시험하는 신이 들이닥치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던져진 모범답안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이 정도의 회한은 예방주사 같은 것이라 생각하자. 선행이 강요된 순간은 신의 장난이 아니라 나쁜 사마리아인이 회한을 떨치고 새로운 사람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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