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삶의 마지막 몇개월간
정말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사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 술병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니 사실 나는 아빠도 제대로 못 쳐다봤다.
소주, 막걸리, 위스키.. 등등 그 종류도 정말 다양했는데
아빠 사후에 부모님 집에 가보니
발렌타인 12년산 위스키 박스가 그대로 있었다.
그 중에 한 병을 집으로 가져왔다.
사실 위스키란 술은 내게 익숙하지 않다.
너무 쓰고, 너무 독하고,
성분 모를 칵테일에 가끔씩 들어 있었기에
기분으로 마시는 정도였다.
지난 토요일 밤엔 위스키로 하이볼을 만들었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우울해지기 시작했고,
술로라도 이런 마음을 가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편의점에서 사온 깔라만시 토닉워터를
위스키와 얼음에 부어 한 잔.
토닉워터를 부으니 술 같지도 않았고,
나는 평소 급하게 마시는 버릇을 살려
급하게 두 잔을 마셔버렸다.
긴장이 풀리고,
적당히 기분이 좋아졌다.
성인이 되고 나니 긴장감을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곤란한 숙제가 되고 말았다.
그럴 때 치트키가 술이다.
치트키의 힘을 남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세상에 이런 것쯤은 있다는 걸 알아두고 싶다.
발렌타인 12년산 병,
그건 아빠가 나에게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그밖에 너무나 많은 잡다한 걸 남겼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이었다.
술을 마시며
죽음의 문 앞에서 제정신이기 힘들었을
술밖엔 위로할 수 없었던
아빠의 마지막 시간을 돌이켜보았다.
술로써밖엔 위로받을 수 없는 시간이
살다보면 자주 찾아오나 보다.
이 치트키를 자주 사용하진 않을 예정이다.
그건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만 사용해야 하며,
자주 사용하면 반칙이고,
반칙은 반드시 댓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옷장에 감춰둔
발렌타인 12년산 한 병을 다 비우기 전까진
아빠 생각이 많이 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