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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진 Jun 06. 2021

시국변호사 한승헌 "한국현대사에 프로그레시브는 없었다"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 출간 한승헌 인터뷰



한승헌 변호사는 권력자들의 그림자가 세상을 드리우던 해방 이후 격동의 시기 양심수와 시국사범의 변호를 담당하며 민중의 편에 선 인물이다. 그런 그가 굵직굵직한 정치재판의 기록을 한데 모아 풀어내니 흐름이 있는 현대사 이야기가 되었다. 그 결과물이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란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한 변호사는 지난 3월 22일 서울 광화문 한 식당에서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특유의 소회를 밝히며 자리를 열었다.

"41년 전 3월 21일은 제가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날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책이 어제 3월 21일 나왔어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이 날짜에 제 이름을 한 번 더 올리게 되었네요."

그는 역사의 3인칭 목격자, 기록자이기 이전에 격동의 현대사, 법과 정치가 첨예하게 만나는 한복판에 선 역사의 2인칭 내지 1인칭 인물이었다. 변호인으로, 때론 피고인으로, 때론 법원 방청인의 자리에 그가 있었다. ’어떤 조사’ 필화 사건(1975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1980년)으로 무고하게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며 고생한 경험이 오히려 사물과 시대를 보는 남다른 강점이 되어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운형 암살, 동백림 사건, 대통령긴급조치 1호‧4호 사건, 인혁당 사건, 전두환‧노태우 내란 사건 등…. 이번 책에 언급된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재판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독자들은 법이 늘 정의의 손만을 들어준 것만은 아님을 알아차리게 된다. 오히려 법은 권력자들에게 용이한 도구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법조인이자 지식인이 쓴 한국 현대사와 법의 과오를 기록한 뼈아픈 책이라 할 수 있다.

"양심수 사건, 시국 사건을 변호하며 느낀 건 법정 안에서 변호인의 활동으로 내 소임을 다할 수 없다는 자책이었습니다. 재판이 법정이 정의를 외면하는 세상에서는 변호인의 쓸모가 과연 무엇인가 생각을 하고, 이렇게 잘못된 재판을 법정 밖으로 끌어내어 많은 후대인에게 널리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면 법정 안에서의 변론 말고 법정 밖에서 기록자로서의 책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출간 기념회가 끝난 후 한승헌 변호사와 북DB는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시국변호사 한승헌, ’변론’이 끝난 자리에 ’기록’을 남기다



Q 앞서 기자간담회에서 ’기록자의 책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독자들에게 선생님의 기록이 어떤 의미로 다가갔으면 하십니까?



’분단 상황’이라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여건 때문에 지금까지 쓰여진 역사나 판결이 정의와 진실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올바른 안목으로 통찰하고 판단해야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제나 미래의 운명을 제대로 개척할 수 있겠죠. 독자들이 이런 기록을 통해 재판이나 역사를 보는 바른 안목을 기를 수 있으면 합니다.



Q 선생님이 보시는 법의 올바른 쓸모는 무엇입니까?



위정자가 국민에게 준법을 요구하고 훈시하는 건 근대적인 의미의 법치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위정자(집권자)가 준법을 하는 것이 올바른 법치주의의 본질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관(官)에서 민(民)을 향해서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걸 법치주의라고 하는데 이것은 역사의 왕조국가나 독재국가에서나 있는 일이며, 무릇 민주국가에서 법치주의라는 것은 국민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법을 위정자가 잘 지키는 것을 올바른 법치주의라고 합니다. 하향적인 지배수단으로서의 법이 아니라, 상향적인 견제수단으로서의 법을 실현하는 것이 법치주의다. 그러한 상향적인 기능을 국민이 제대로 인식해줬으면 좋겠다는 희망이에요.



Q 1965년 이후부터 변호사로서 수많은 재판을 목격하고 이번 책에 기록하셨지요.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재판을 하나만 꼽아주시겠습니까?



이 책에 수록된 열일곱 건의 사건 중에서 내가 변호를 담당한 사건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건이 있는데 제가 변호인으로 참여한 사건 중에선 ’다리’지 필화 사건이 기억에 남습니다. 김대중 씨 홍보 역할을 맡은 사람을 반공법으로 잡아간 일이었죠. 이 사건에 대해 1심 판사가 용감하게 무죄판결을 하고 옷을 벗었어요. 1심 판결이 무죄가 되니까 항소심도 무죄, 대법원도 무죄가 되어 1970년대 초반 군사 정권하에서는 이례적으로 1, 2, 3심을 무죄로 3연승을 한 유일한 케이스예요. 그리고 1심 판사는 그로 인해 많은 수난을 겪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어요.



내가 변호 안 한 사건으로 꼽자면 조봉암 씨 진보당 사건이지요. 이 사건의 1심 판결에서 조봉암 씨에게 간첩 혐의의 무죄판결을 한 유병진 부장판사를 잊을 수가 없지요. 유감스럽게도 그 사건은 항소심에서 뒤집혀서 2심 3심에는 사형 선고를 받아 결국 형 집행을 당했습니다.



Q 앞서 거론하신 경우들을 비롯해 책에서 현대사의 중요 재판기록들을 접하며 법이 권력자들의 입김에 쉽게 좌우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법이 무소불위의 무엇이 아닌 무척 연약한 실체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한 나라의 올바른 법치, 올바른 사법의 척도는 절도사건, 사기사건이 아니라, 극소수의 사건이라 하더라도 정치적인 사건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 재판에서 어떤 결론이 나는지에 달려있어요. 이번 책에 담은 사건들은 일부러 그런 것들만 고른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역사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거나 빛을 비추게 한 사건들인데 전부 정치적인 사건이란 말이에요. 결국, 정치적 사건의 재판을 올바르게 하는지 여부에 따라 우리나라 사법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겠죠.





"정치 욕할 때 하더라도 고민은 같이 나눠야"



Q 시대적으로 여운형 암살사건, 반민특위 사건부터 서술되어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우리 현대사 전반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역사가 진행되어서 변화가 일어날 때는 그에 따른 단락이 분명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점이 없어요. 가령 해방 후에 친일파 숙청이 하나의 역사적 과제였고, 그래서 어렵게 법을 만들어서 반민자 재판을 하는데 친일파들이 이미 경찰이나 정부 요직을 장악해서 법집행을 방해했어요. 또, 일제 시대 고위직들이 반민특위에 잡혀가니까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해서 무장해제를 시키는 바람에 올바른 반민자 재판이 이루어지지 못했죠. 역사의 단락에 합당한 숙청이 없었던 거예요.



그냥 진행이 아니라 진전 내지는 발전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용어로 말하면 프로세스는 있는데 프로그레시브는 없다고 할까. 4.19 후에도 결국 그 이전의 독재 세력이 완전히 차단된 것이 아니잖아요. 5.16도 마찬가지예요. 반민주, 반민족적인 행위자에 대한 응분의 책임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우리 역사의 큰 흠이거든요.



Q 최근 ’테러방지법’ 등의 이슈로 인해 개인정보 침해 및 표현의 자유 위축이란 우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국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민주국가에서 모든 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하고,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보장하는 쪽으로 입법되어야 해요. 그런데 그동안 우리나라는 남북분단의 특수성을 빙자해서 되도록 국민을 억압하는 통치자 편의위주의 법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도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 때엔 많이 호전됐는데 이명박 정부 이후 다시 옛날로 회귀하는 현상들이 드러나고 있고, 특히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입법이 통치자 중심의 과거 유신을 떠올리게 하는 또는 유신의 복사판 같은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법조인 아니라 일반 국민도 많이 걱정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청년 일자리 문제, 대북 문제, 이런 것을 전부 법의 탓으로 돌리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죠. 과거의 잘못된 통치방식이나 잘못된 입법을 다시 재현시키려고 하는 것은 역사의 전진이 아니라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는 것이죠. 작년이 ’광복 70주년’이었는데 누군가가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는가 하면 또 돌아간다고 해서 ’광복 70년’이 아니라 ’왕복 70년’이라고 한 표현을 들었어요. 저도 그 얘길 듣고 참 실감이 나더라고요. 우리가 왕복해서는 안 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반국가 사범이나, 정부 비판 세력에 대해 용공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게 근자에도 있었거든요. 또 그런 통치방식에 헌재나 우리 대법원이 어느 정도 말을 맞춘 듯한 그런 인상도 있었어요. 이런 것을 막기 위해 일차적으론 법과 재판의 최전방에 있는 법조인들이 막아야죠. 그와 아울러 좀 더 재야성을 살려서 올바른 법치주의 올바른 민주사회를 구현해 줄 재야법조인들이 자기 역할을 잘하는 게 중요해요.



Q 2015년 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가 내민 공동선대위원장 카드에 선생님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했는데요. 물론 현실화되지는 않았습니다만, 후일 정계에서 뜻을 펼칠 용의도 있으십니까?



그런 제안을 받긴 했지만 그 이후에 교섭은 없었어요. 내가 정치를 잘할 자신이 있으면 좀 힘들더라도 할 것 같아요. 국가 민족까지는 따지지 않더라도 지식인으로서 소명감이 있잖아요. 그런데 난 정치를 잘 못할 것 같아요. 정치 쪽에 가면 한 달을 서바이벌을 못 할 것 같아요.



그 대신 우리가 정치 냉소주의에 빠지는 것은 자학이에요. 결국, 정치가 잘못된 상태를 냉소만 하고 있으면 그 피해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니까 냉소하고 욕할 때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을 같이 나눠야 하지요. 그런 점에서는 모든 주권자가 정치인이 되어야 해요. 정치인만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주권자가 정치에 대한 관심, 그리고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한 주권자의 책무를 느껴야 해요. 주권자라고 하는 것은 투표하는 순간만 주권자가 아니고, 투표한 후에도 일 년 내내 주권자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순수한 성스러운 걸로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거예요.



Q 끝으로 앞으로 거취 변화나 향후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내 사적인 주변을 정돈 하기 위해 내 책, 자료 그 밖에 살림, 가재도구를 구조조정을 해서 없애려고 해요. 기본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만 남기고는 정리하려고 해요. 단순하게, 담백하게 살고 싶어요. 지금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많이 널려 있었고, 얽혀 있었어요. 조금 서글프게 말한다면 갈 준비를 해야지요.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 2M)


 북DB 2016.3.24 게재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No=65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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