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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진 Jun 06. 2021

출판인생 40년 김언호 "책도 스킨십이 중요하다"

<세계서점기행> 출간 김언호 인터뷰



경기도 파주시 한길사 김언호 대표 직무실은 영락없는 책 무더기 동굴이다. 벽에는 한길사 운영 초창기인 88년 낙동강 역사기행 중 찍은 고향집 사진과 그의 영원한 영웅 함석헌 선생의 사진이 붙어있다. "<나의 투쟁> 다음 권 원고 일부가 들어와 보고 있던 중이었어요. 방이 (책 때문에) 자꾸만 좁아져요. 이걸 들어내야 하는데 자꾸 좁아져서 큰일 났어.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데."라고 말 하며 웃음지어 보였다.

1968년부터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던 김언호는 1975년 ’자유언론 실천운동’으로 해직된 후 출판계에 입문한다. 그가 1976년 창립한 한길사는 굵직굵직한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을 발간하면서 대한민국 지성계의 흐름을 견인해왔다. ’한 권의 책이 한 인간과 한 사회를 변화 시킨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길사가 펴낸 <해방 전후사의 인식>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시리즈> <사상가 함석헌 저작집>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등의 책은 대한민국 인문학사의 주요 좌표를 형성했다.

어느덧 한길사도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다’는 불혹의 나이를 맞았다. 또 다른 10년을 맞아 ‘다시 독자와 함께’란 구호를 내걸고 전열을 다진다. 김 대표가 40주년을 맞아 야심차게 진행한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직접 1년간 유럽․중국․미국․일본․한국의 개성 있는 서점들을 탐방하며 기록한 책 <세계서점기행>이다. 단순히 겉에서만 훑지 않고, 직접 서점 구석구석 사진도 찍고 서점을 운영하는 대표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물었다. 책의 각장은 서점탐방기인 동시에 책의 미래에 대한 빽빽한 고민과 질문들로 채워져 있다.

북DB는 세계 책의 날에 가까워진 시점에서 3,000여권의 인문서적을 만들어 온 김언호 대표를 만나 세계 서점들에 대해, 또 책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서점은 한밤의 도시를 밝히는 별빛 같은 존재"



Q 이번에 나온 <세계서점기행>, 정말 방대한 분량인데요. 이 책을 기획한 계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한길사 40주년을 맞아 괜찮은 프로젝트를 하나 해보고 싶었어요. 40년 동안 책으로 먹고 살았으니까. 그래서 작년 한 해 동안 외국 서점을 탐방한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했는데 다행히 반응이 꽤 좋았어요. 나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고, 또 책을 읽는 사람이니까 외국에 가면 무조건 책방에 들어가거든요. 책방에 들어가서 책을 보고 만지고 내용을 검토하는 것 자체가 가장 즐거운 일이니까요.



Q 이제 대한민국에서 점점 동네서점이 사라지고 대형서점 위주의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는데요. 이런 시점에 특별히 서점에 주목한 이유가 있습니까?



서점은 한밤의 도시를 밝히는 별빛 같은 존재예요. 미술관, 박물관 서점이야말로 한 도시의 품격을 높이는 기초가 되지요. 서점에선 오늘 만들어지는 출판문화, 오늘 사유되는 생각들을 볼 수 있는 신간을 만날 수 있지요. 또 서점은 태생적으로 민주주의고, 시민사회거든요. 히틀러처럼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다 불 지르는 태도와는 달라요. 책방엔 온갖 책, 이런저런 생각이 다 있어요.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열린 세계관을 견지하며, 서로를 인정해주는 세계예요. "당신은 이런 책을 좋아하고 난 이런 책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책은 다르지만 우린 친구가 될 수 있다."라는 태도라고 할까요. 서점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 눈빛이 서로 통해요. 책방은 아름다운 정신의 고향과 같은 것이죠.



Q 이번 책에서 종이책에 대한 사랑을 유감없이 드러내셨습니다. 종이책과 전자책의 차이점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난 종이책을 슬로우푸드에, 전자책은 패스트푸드에 비유해요. 맥도날드 같은 걸 계속 먹으면 체질적으로 우리 몸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렇듯 스마트폰에서 나온 것에는 사유가 없어요. 반면에 종이책은 사유하게 하는 매체라고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사유하는 힘, 창조하는 정신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것은 종이책으로만 가능해요.



종이책은 밑줄 그어가면서 읽는 것이고, 저자가 사인도 할 수 있잖아요. 친구끼리도 서로 만나 악수하고, 숨소리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중요하듯이 책도 스킨십이 중요해요. 이런 점에서 점차 사람들이 종이책이 더 중요하단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휘발성 있는 전자책에서 한계를 느낀 탓이겠죠.





"명문 서점은 자기만의 세계가 있더라"



Q 세계 수많은 서점 중에 ’명문’ 서점을 고르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물론 여러 자료도 보고, 미디어들이 칭찬한 서점을 고려했어요. 하지만 나는 규모가 크다고 해서, 책을 많이 판다고 해서 선택하지 않았어요. 내가 생각한 명문 서점의 기준은 베스트셀러에 목매지 않고 자기 세계를 갖춘 곳이에요. 베스트셀러를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베스트셀러만이 책은 아니란 거지요. 내가 방문한 서점의 주인들은 베스트셀러를 믿지 않고 자기가 갖다 놓고 싶은 책만을 가져다 놓아요. 그걸 선책(選冊)이라고 해요. 책 고르기. 지상에서 나온 모든 책을 다 갖다 놓을 수 없잖아요. 자신만의 주체적 판단력으로, 책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골라내요. 저마다 개성이 있는 곳들이었죠.



Q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상에 깊이 남은 서점을 몇 군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미국에 있는 ’북밀’이라는 서점은 계곡에 있는 방앗간을 책방으로 만든 곳이에요. 그 일대 사람들이 산 속에 있는 서점에 모여서 시 낭독회도 하고 강좌도 들어요. 그리고 파리에 있는 ’셰익스피어앤드컴퍼니’에서는 축제를 열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 먹을 걸 가져와 십시일반 해서 잔치를 벌이기도 하고요. 지역에 책방 하나가 들어서면 그 일대가 변화한다고 하잖아요. 그게 책의 힘, 서점의 힘이에요. 우리나라도 서점이 많아지면 사회가 달라질 거예요.



한편, 영국 ’돈트’ 서점은 독자들이 와서 마음껏 책을 뒤져서 보게 만드는 환경을 강조해요. 그래서 음악도 틀지 않고 직원들도 오고 가지 못하게 해요.



도쿄에 있는 ’크레용하우스’ 같은 서점은 "전쟁을 중단하라(Stop the War)"라고 써 붙여 놨어요. 아이들에게 생명과 평화의 정신을 가르치는 곳이죠. 그 서점의 주인 분은 예전에도 여러 번 만나봤는데 평화운동도 벌이는 대단한 분이에요. 폭력에 반대하고 평화와 생명과 사랑을 옹호하는 서점의 모습이죠.



독자들이 이렇게 다양한 서점의 모습을 통해서 독자들이 책과 서점의 존재가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기를 바라요. 소개된 서점이 스물두 군데인데, 모든 서점이 다 각자의 전략이 있어요. 서점 운영의 교과서라고 할까요?



Q 단순히 책을 거래하는 상점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네요.



서점은 물건이 아닌 생각과 정신을 파는 곳이에요. 그렇게 하면 비즈니스도 되는 거고요.



Q 여러 서점의 사례에서 가장 부러운 점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독자와 시민들이 어려움에 처한 서점을 다시 밀어주고 살려내잖아요. 셰익스피어앤드컴퍼니 서점 대표가 "서점은 신성한 공공적 기구"라고 말한 것처럼 좋은 서점의 위기는 개별 서점의 어려움이 아니라 전체 어려움이라고 생각하는 상식이 형성되어 있어요. 이처럼 책과 서점의 가치에 대해 높은 수준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장 부러웠어요. 중국에서도 셴펑 서점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의 손길이 있었고, 오프라인 서점을 정부가 지원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그런 게 없어요.



Q 한편 종로 서적의 부활을 주장하기도 하셨습니다.



1907년에 문 연 종로서적이 2002년에 문을 닫았어요. 그러니까 95년 동안 있었던 거죠. 정말 너무 중요한 유산 아니에요? 문학인들이 잠깐 스쳐간 하숙집도 보존하려고 하고, 술 마신 주점도 보존하려고 하는데, 이 서점은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친 거예요? 종로 서적은 우리가 같이 캠페인을 해서 살려내야 해요. 사회적 기업 같은 새로운 개념의 서점 모델을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오프라인 서점들도 경쟁을 해서 더 잘될 겁니다.



Q 주변 사람들에게 서점을 열라고 종종 권유하신다고요?



크게 하면 안 되고, 알려진 사람만 오게 작게 해도 돼요. 소설이면 소설만 갖다 놓는 식으로 개성 있게 가는 거예요. 알려진 사람만 오게. 임대․유지비가 너무 비싸니까 모든 걸 다 갖다 놓는 건 불가능해요.





"독자의 존재… 좋은 책 만드는 근원"



Q 지난 40년 간 책 만드는 일 외에도, 사람들의 삶과 책을 연결하는 다양한 활동을 해오셨는데요. 대표적으로 한국출판인회의 창설,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조직, 파주출판도시 건설, 예술인마을 헤이리 조성에 관여하셨고, 현재 파주북소리 조직위원장,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계시고요. 그동안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998년 IMF를 극복하기 위해 출판인들이 뭉쳤고 그것이 발전한 것이 한국출판인회의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파주출판도시를 출판인들이 손잡고 만들었고요. 시대 상황이 역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하게 하고 교훈을 준 것 같아요. 또 내가 늘 하는 주장이 혼자는 못한다는 거예요. 더불어 손잡고 가야 하지요. 파주출판도시는 작은 회사들이 손잡고 세계적인 걸 만들었잖아요. 헤이리 프로젝트도 문화예술인들 여럿이 손잡고 한 것이고요.



Q 어지럽던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한길사가 탄생해 40주년을 맞았는데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제 책 만든 지 40년째인데 한 3000 권 정도 만든 것 같아요. 이런저런 책을 만들면서 힘들 때도 있지만 오고 가다 독자들을 많이 만날 때면 기분이 좋아요. 그런 독자가 있다는 것이 너무 경이롭고 더 좋은 책을 만들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지요. 또 우리 사회 곳곳에 우리 책을 읽은 사람들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책 만드는 사람의 보람이라고 생각해요.



또 40년 동안 시대를 고민하는 지식인, 예술가, 학자를 저자로 모셨어요. 예를 들면 함석헌 선생님이시죠. 함 선생님은 거의 10년 정도 가까이 지냈어요. 전집 내는데 10년 가까이 걸렸으니까요. 어려서부터 나는 함석헌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는 선생님을 알았고,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을 열심히 읽었고 대학 와서는 선생님 말씀을 늘 들으러 다녔죠. 그런 한 시대의 정신의 사표(師表) 같은 분을 모실 수 있었던 건 내가 출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갈 수 없었던 길일 거예요.



Q 40주년을 기념해 ’다시 독자와 함께’란 구호를 내거셨지요. 이런 점에서 출판사 차원이나 출판계 차원에서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40년 동안 하면서 역시 여전히 독자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요. 음악 장르에서도 한 시대 음악을 일으켜 세운 것은 음악 팬들, 관객들이었잖아요.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독자의 책 읽는 행위가 책의 수준이나 좋은 책을 만들어 내는 근원이라고 생각해요. 독자가 없으면 안 돼요. 그 다음 중요한 것이 리뷰예요. 주요 매체에서도 책이 나왔단 소식만 있고 그 책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내용이 어떤 지에 대한 내용은 없어요. 전문 집단에서의 북 리뷰가 나와서 제대로 된 책 소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Q 대표님이 상상하는 책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형식은 달라지겠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봐요. 디지털을 활용한 모습일 수도 있고요. 디지털이 레퍼런스 정보 접근에는 유용하지요. 하지만 오히려 책의 창조적 기능이 강조되면서 가장 클래식하고 앞으로도 더 클래식할 종이책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봐요.

Q 마지막으로 출판에 관해 구상 중인 계획이 있다면 살짝 미리 엿들을 수 있을까요?


난 여행을 참 좋아하는데, 여행은 단순히 지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정신과 사상을 찾아가는 여정이거든요.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인문예술여행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공부하는 여행학교인거죠. 만약 그리스에 간다고 하면 그리스 희비극을 다 공부하고, 중국에 간다고 하면 그 언저리에 있는 주제를 가지고 강사를 초빙해서 몇 달 동안 같이 공부하는 거예요. 그런 후 그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만 데리고 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그렇게 여행을 하면 완전히 내 것이 되어버리는 거죠. 한길사가 하려는 게 새로운 채널을 통한 콘텐츠 제공자인데, 이런 프로그램 또한 한 권의 책이라고 생각해요.    





사진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북DB 2016.4.20 게재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No=66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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