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하여> 출간 강남순 신학자 인터뷰
‘크림빵 뺑소니 사건’을 기억하는지?
2015년 1월 10일 새벽 임신한 아내에게 줄 크림빵을 사 들고 집에 돌아가던 예비 아빠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가해자는 19일 만에 경찰에 자수했고 피해자의 아버지는 “잡히지 않고 자수를 해서 엄청나게 고맙다”라고 말하며 선뜻 용서의 손길을 내민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해자는 본의로 자수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건 진술에도 진정성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피해자의 아버지는 다시 분노하게 된다.
‘용서’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용서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이다. 상대가 잘못을 뉘우치는 지의 여부가 용서의 절대적 기준인 걸까? 만약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를 영원히 용서할 수 없는 걸까? <용서에 대하여>(동녘/2017년)는 위에서 언급한 ‘크림빵 뺑소니 사건’이 발단이 되어 나온 책이다.
이 책을 쓴 강남순은 미국 텍사스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다. 성 소수자 혐오에 반대하는 진보적 신학자로도 유명하다. 강 교수는 인문학적 성찰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본 칼럼을 묶은 <정의를 위하여>를 통해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번엔 <용서에 대하여>란 책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철학적, 신학적 틀 안에서 ’용서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1월 10일 서울 한남동 북파크에서 강남순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예수와 데리다는 다른 용어를 썼지만 유사한 전개하고 있었다”
Q <정의를 위하여>에 이어 <용서에 대하여>까지 지난 해 말에서 올해 초까지 연달아 책을 출간하셨지요. 이번 책은 어떻게 쓰게 되신 건가요?
‘크림빵 뺑소니 사건’이 터졌을 때 거기에 관련된 칼럼을 썼어요. 그때 출판사 주간님이 그 글을 읽고 ‘용서’라는 주제로 책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왔어요. 평소 자크 데리다에 대해 강의할 때도 ‘용서’에 관한 내용은 꼭 한 장으로 넣곤 했어요. 이번 기회에 ‘용서’에 대해 더 집중해서 연구해서 책을 쓰게 되었지요.
Q 지금까지 ‘용서’를 매우 개인적인 행위라고만 생각해왔거든요. 책을 읽으면서 철학자들이 ‘용서’라는 개념에 대해 이토록 깊게 탐구했다는 사실이 새로웠어요.
용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용서하는 거예요. 한나 아렌트는 용서가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봤어요. 용서하지 못할 때는 과거의 감옥 속에 갇혀서 삶을 살아가니까 미래를 경험한다고 해도 그것이 새로운 미래가 될 수 없죠. 그래서 한 개인에게도 용서는 참으로 중요한 거예요.
데리다는 특히 국제적 문제 속에서 용서가 어떻게 하나의 정치적 퍼포먼스로 작동하는지에 주목했어요. 남아공에서 진실화해위원회가 구성됐을 때 용서가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 같은 구조로 이용되는 것을 경고하고, 용서가 우리가 생각하듯 쉬운 게 아니란 분석을 했죠.
Q 책에서도 언급됐지만 우리 국민에게 ‘용서’라고 했을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같아요. 일본 정부는 작년 ’화해치유재단‘을 통해 110억 원을 출연하고 이걸로 끝이라고 못 박으려 합니다. 소녀상 설치 문제로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고요. 참 복잡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가해자들이 살아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구조를 만든 국가를 상대로 용서를 요구하는 상황이에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비롯한 다양한 집단이 개입되어 있고요. 그렇다면 이건 개인과 국가라고 하는 집단 간의 용서일까요? 아니면 개인과 가해자 간의 용서일까요?
아시아여성기금(1990년대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이슈가 됐을 때 일본 정부에서 각국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주도록 추진하기 위해 만든 기구. 1997년 1월 11일 일본 관계자들은 서울에서 피해자 5명에게 위로금 2백만엔과 수상의 편지를 전달했다-기자 주) 문제가 나왔을 때도 개별 피해자 중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요. 그때 기금을 받은 사람은 피해자의 위치에 적당하지 않은 것처럼 배제가 되고 말았어요.
또, 우리가 일본에게 철저한 잘못 시인을 요구하고, 그런 도덕적 정당성을 요구하려면 우리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도 일관된 기준으로 철저하게 검증해야 해요. 월남전 때 우리 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일, 양민 학살의 문제나, 광주 항쟁 등 우리 역사 속에서 있었던 문제에도 많은 피해자가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 다 침묵하다가 김학순 할머니 등장 이후 별안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새롭게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건 안 되죠. 역사 속에서 용서를 요구할 것과 용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관성 있는 자기 성찰이 필요해요.
Q 그렇다면 이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세요?
이 문제에서 용서해도 된다, 안 된다는 단순한 답을 찾기보다는 용서가 어떻게 차용되고, 남용이 되는지를 먼저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선 용서한다고 할 때 누가 누굴 용서하는 것일까요? 누가 무엇을 용서하는 것인가요? 용서의 대상인 가해자는 누구이며, 소위 위안부 할머니라고 하는 분들, 그들만이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용서의 극장‘이란 표현을 썼어요. 정치적 공간에서 용서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전제하고 용서가 연기처럼 진행된다는 것이죠. 이것처럼 위안부 문제에서 ’용서‘가 마치 무대 위에 올라온 것처럼 연기되는 지점을 생각해야 해요.
데리다는 용서에 그 어떤 목적도 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요. 어떤 사회가 극도의 차별 구조 속에서 갈등과 어려움을 겪다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집단적 용서에서처럼 용서에 전제 조건과 목적이 설정될 때가 있어요. 데리다는 이런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해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급진적인 용서를 얘길 하고 있죠.
Q 말씀을 들어 보면 데리다의 논의와 종교가 무척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용서는 조건적 용서예요. 하지만 예수는 “용서를 몇 번 합니까?”라는 질문에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라”라고 답했어요. 한마디로 무한하게 하라는 말이에요. 사랑할 만한 것을 사랑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거든요. 데리다도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고 했고요. 나는 예수와 데리다가 서로 다른 용어를 쓰지만 굉장히 유사한 전개를 하고 있다고 봐요.
“누군가를 악마화 하는 순간 자신도 폭력 행사하는 것 돼 버려”
Q 최근에 남성 연예인이나 공인들이 여성 혐오적 발언이나 행동을 했을 때 네티즌들이 이를 문제화하기 위해 불매운동이나 하차운동도 벌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밥줄 끊기’는 심하다는 반박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책에서 분노를 본능적 분노, 성찰적 분노, 파괴적 분노 세 가지로 설명했어요. 어느 한 개인이 특정한 잘못을 했을 때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그것에 대해서만 분노하는 건 성찰적 분노예요. 이런 성찰적 분노는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파괴적 분노로 한 사람의 삶 자체를 무화시킬 권리까지는 없다고 봐요.
이번에 터진 문인들의 성폭력 스캔들에서도 문제를 지적하는 것까진 좋아요. 그런데 그 지적을 통해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피해자 여성을 위한다는 이름 아래 가해자에게 벌떼같이 몰려가 린치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할 때도 자기가 생각한 방식대로 잘못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요. 글 쓰는 사람에게 절필하라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누군가를 악마화 하는 그 순간, 자신도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아요. 이런 건 우리가 조심해야 해요.
Q <용서에 대하여>는 굉장히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용서’라는 주제에 철학적 관점을 적용해 다룬 책인데요. 독자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으면 하나요?
제가 독자들에게 이런 경우엔 용서를 하라, 하지 말라는 답을 줄 수는 없어요. 각자 구체적인 정황에서 용서에 대해 새롭게 질문하기를 연습하고, 질문을 찾아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어요. 사랑처럼 용서도 무수히 시름하고 고민하면서 진행되는 것이니까요. 나는 용서가 하나의 원처럼 확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한 인간이 별안간에 완벽한 이상적인 용서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인식하는 만큼 조금씩 용서를 확장해 나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Q 교수님은 성 소수자 인권에 많은 관심을 가진 신학자로 알려지셨죠. 보통 개신교 문화는 성 소수자 문제에 보수적인 편인데요. 페미니즘이나 성 소수자에 처음 관심을 가진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저도 처음에는 페미니즘이나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많았어요. 한국이나 독일에 있을 때 그런 문제는 아예 표면에 떠오르지도 않았고요.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같이 수업 듣는 사람 중에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밝힌 사람이 있었어요. 처음엔 그 사람 옆에도 앉지 않았어요. 그땐 책 읽은 것도 없고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거든요. 한 학기 내내 지나며 보니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란 걸 느꼈지요. 그러면서 관심을 갖게 됐고 관련된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공부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동성애 문제는 아직 표면에 떠오르지 않은 단계였고, 페미니즘이 중요한 이슈여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책 쓰고 강연을 했죠. 그리고 다시 미국에 갔을 때는 학생들, 동료 중에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같은 성 소수자가 많더라고요. 그들을 만나면서 성 소수자 이론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Q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한국은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고 하는 인식의 지평 발전이 건강하게 이루어진 사회는 아니에요. 세 시기가 동시다발적으로 공존하고 있지요. 그러다 보니 교육시스템이나 정치, 종교 등 모든 것들에 인간을 고귀하게 보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어요. 저의 책들 <정의를 위하여>, <용서에 대하여>를 관통하는 하나의 화두가 있다면 ‘어떻게 하면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예요. 그러기 위해선 비판적 성찰과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다양한 사유가 필요해요.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면서도 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가 가능하도록 해야하니까요. 이것을 위해 사람들이 기억하고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면 해요.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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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DB 2017.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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