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만 나면 딴 생각> 저자 정철 인터뷰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는 인형술사 크레이그가 우연히 배우 존 말코비치의 뇌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렇듯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쯤은 단 몇 개의 단어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카피라이터의 머릿속에 들어가보고 싶다. 이런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 등장했다. 바로 카피라이터 정철이 쓴 <틈만 나면 딴 생각>(인플루엔셜/ 2018년)이다.
정철은 각종 유명 브랜드와 영화를 위한 수천 개의 카피를 써왔고 ‘사람이 먼저다’ ‘나라를 나라답게’ 같은 선거 카피로 마침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까지 성공한 카피라이터다. 이번 책에서 그는 ‘좋은 생각’,‘ 맞는 생각’만 하라는 사회를 향해 ‘딴 생각’ 속에 답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는 이야기는 ‘낙엽의 추락’에서 시작해 ‘담벼락 낙서’에서 끝이 난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독자들은 카피라이터 정철의 특별한 사고법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된다.
서울 수서동에 자리잡은 카피라이터 정철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마주 보고 앉은 테이블 위엔 여지없이 그의 단짝인 연필과 종이가 함께 했고, 대화 중 종종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기도 했다.
“생각은 ‘그냥’ 떠오르는 게 아닌, 찾는 것입니다”
Q 책 형식이 독특합니다. 이어달리기를 하듯 앞내용과 뒷내용이 연결돼요. 시선이 옮겨가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가 느려지기도 하고, 아주 높은 곳에 갔다가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처음엔 ‘연쇄 잡념’이란 걸 떠올렸어요. 낙엽, 노을, 바람, 비, 구름이 연결되는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연결되는 책을 써보려고 했죠. 출판사 쪽에서는 이런 형식으로만 가면 지루할 것 같다고 여러 개의 챕터에 담아 보여주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것들을 12개의 장 안에 담고 적당한 제목을 달았죠. 자기계발서는 아니지만 그런 느낌도 주고 싶어서 ‘브레인 스토밍 에세이’라는 이름도 붙여보았고요. 처음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탄생했는데 이게 더 덜 지루하고 좋은 것 같아요.
Q 광고 카피 작업이나 책을 쓰실 때 생각이 빠르게 떠오르는 편인가요?
얼마 전까지 나를 다른 사람보다 재밌거나 색다른 생각이 많이 떠오르고, 그걸 빨리 글로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생각은 떠오르는 게 아니라 찾는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이 그냥 떠오르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워요. 저뿐만 아니라 누구든 생각이 팍팍 떠오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뭔가 하나를 잡으면 그걸 계속 파는 거예요. 끌로도 파고, 삽 들고도 파죠. 파다 보면 어쩌다 하나를 건지게 돼요. 돋보기 들고 손전등 들고 돌아다니다가 어쩌다 하나씩 건지는 거죠. 이 책은 “내가 찾은 생각들을 이렇게 찾았습니다”라고 하는 보고와도 같아요. 독자들도 따라해보고 각자 방식을 발견해 보길 권하는 거죠.
Q 지난 30년 간 광고업에 몸담아 오셨습니다. 광고는 집중적으로 창의력을 요하는 분야 중 하나인데요. 그간의 경험에 비춰볼 때 창의력은 타고나는 것이라 보나요? 아니면 노력에 의해 길러질 수 있는 걸까요?
대부분은 노력과 훈련, 경험에 의해 어느 수준까지는 올라간다고 생각해요. 그것만으로도 프로로 일하는데 부족함이 없어요. 그런데 100명 중 한두 명 정도는 정말 타고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Q 이 책의 키워드가 ‘딴’인데요. 아무래도 요새는 ‘딴’짓, ‘딴’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바쁘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먹고 살기 바쁘고, 시간 없다는 게 딴 생각을 못하는 하나의 큰 이유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새로운 경험이 없어서 딴 생각을 못하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교육과정에서 바른 생각, 옮은 생각, 정답으로만 서열이 매겨지고 그걸 잘 하는 사람이 서울대학교 가는 구조니까요. 그러니 딴 생각을 해 본 적도, 할 수도 없었던 거죠. 대단한 창의성이 아닐지라도 하루에 질문 하나 다르게 하고, 대답 하나만 다르게 해도 인생이 조금 덜 지루해지고, 한 번 더 웃게 돼요. 그것만으로 충분한 보상이 된다고 생각해요.
Q 가끔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대단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하시나요?
파도 파도 뭐가 안 나오는데 계속 붙잡고 있으면 힘만 드는 거니까요. 그럴 땐 삽 내려놓고 나가서 술을 마시죠. 그러고 나면 오히려 안 풀리던 일이 잘 풀리기도 해요. 단기든, 장기든 슬럼프가 오면 이걸 극복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 왔네? 당분간은 같이 놀자” 이렇게 생각해요. 그게 슬럼프에서 빨리 나오는 방법이에요.
“글은 사람에게 말을 거는 행위라는 걸 기억하세요”
Q 책을 보면 함부로 말 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메시지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요. 말과 글을 다루는 입장에서 말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더 엄격하고 민감한 것 같습니다.
말을 해서 득 될 건 하나도 없다고 자주 얘기하죠. 남을 설득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각종 논리를 동원해온다고 해서 상대는 마음을 돌리지 않아요. 오히려 그 사람 얘기를 가만히 들어줄 때 상대를 설득하기가 쉬운 것 같아요. 입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행동이나 노력은 굉장히 실패하기가 쉽죠. 차라리 말대신 눈으로, 아니면 귀로 설득하는 게 빠른 것 같아요.
Q 최근에는 강연도 많이 하시죠?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인 성격이라 말이 없는 편이에요. 5년 전까지만 해도 카메라 앞에서 말하거나 무대 위에서는 건 내 인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어쩌다 강연을 할 기회가 생겼는데 얼굴 빨개지고 목소리는 떨면서 가까스로 마쳤죠. 그런데 그 강연을 들은 한두 명이 그들 학교, 회사에서 초청을 해줘서 강연을 또 하게 됐어요. 강연은 말 잘 하는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또박또박 자기 진심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울림을 받는다는 걸 느꼈죠. 저는 한 시간 반 동안 제 얘기만 하거든요.
Q ‘연필 내려놓고 뚜벅뚜벅 거리로 나가면’이라는 제목이 붙은 11장을 읽다보면 거리의 풍경이 바로 눈앞에 그려지는데요. 실제로 산책을 즐기는 편인가요?
아뇨. 저는 거의 하루 종일 작업실에 딱 박혀 있다고 보면 돼요. 여기서 생각을 하고 관찰을 하는 게 대부분이고, 실제 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저같이 게으른 사람에겐 자주 있는 일이 아니죠. 작가들은 여행도 많이 하고, 산책도 많이 하고, 산에도 간다던데 저는 지정석에 앉아서 경험을 해요. 경험은 꼭 내가 몸을 움직여서 해야 하는 건 아니고 책을 통해서 경험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게 중요하지 직접 체험이 꼭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국엔 제가 게을러서 그래요.(웃음)
Q 12장에서는 국어사전의 마지막 단어로 ‘힝’을 언급하셨어요. ‘힝’이 국어사전 마지막 단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아마 많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제 책상에는 365일 국어사전이 놓여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펼치죠.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펴보고, 아는 단어라도 정확한 의미를 체크해볼 필요가 있을 때 펴봐요. ‘잡’이라는 글자를 활용해서 잡곡, 잡식 같은 단어를 쓸 때처럼 리듬을 맞추는 글, 즉 말장난이 필요할 때 펼쳐서 단어를 소환하죠.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국어사전뿐만 아니라 우리말 역순 사전이라는 게 있어요. 국어사전이 어떤 단어의 첫 글자를 살펴서 가나다순으로 배열한 사전이라고 한다면, 역순 사전은 어떤 단어의 마지막 글자를 살펴서 가나다순으로 배열한 거예요. 특정 음절로 끝나는 말들을 소환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돼요. 글 쓰다 리듬을 맞출 때, 말장난 할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어요. 글과 말을 가지고 놀겠다는 사람은 이 사전 두 개는 꼭 있어야 해요.
Q 글쓰기는 거의 모든 직종에 다 필요한 능력인 것 같아요.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팁을 한 가지 주신다면요?
가장 중요한 건 글은 사람한테 말을 거는 행위라는 걸 기억해야 해요.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얘기, 힘 있고 울림이 있는 얘기는 늘 사람 얘깁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사람 얘기를 하라고 해요. 제품 얘기, 물건 얘기를 했을 때보다 사람 얘기했을 때 울림도 받고 재미도 더 커지죠. 뒷담화 할 때 맨날 사람 얘기하죠? 그게 왜 그럴까요? 그게 제일 재밌거든요.
“기댄다는 느낌으로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 선거 광고...나중엔 품격에 반했죠”
Q 소위 ‘주님’이라고 불리는 광고주를 만족시키는 상업 광고를 많이 해오셨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을 위한 정치 광고 작업도 했습니다. 상업 광고와 정치 광고 사이에 차이가 있나요?
작업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어요. 정치 광고도 어디까지나 유권자라는 소비자에게 후보자라는 상품을 파는 건 똑같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점을 찾자면 상업 광고는 매출 30% 상승이 목표인데 20%만 올랐다고 해도 그날로 광고가 실패했다고 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정치 광고는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이잖아요. 51:49가 100:0이 되는 거라서 지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니 부담이 더 크죠.
Q 원래 문재인 후보 지지자는 아니었는데요. 작가님의 문재인 캠프 광고 작업물을 살펴 보다 보니 문 대통령이 참 대단한 사람,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렇다면 제 광고가 성공한 거네요.(웃음) 문 대통령이 부산에 출마하며 처음 정치 시작할 때부터 카피라이터로 일했는데요. 그때만 해도 문재인이라는 사람에게 엄청난 매력을 느껴서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저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에, 문재인에게 기댄다는 느낌으로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옆에서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지켜보다 보니까 이 사람의 품격에 반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팬이 되면서 지난 몇 년간 함께 일을 한 것 같아요. 최소한 자기 욕심 때문에 일을 망가뜨릴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요새 보면 능력도 있는 것 같아요.(웃음) 너무 잘 하고 계세요.
Q 작가님께서 지지했고 함께 일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각각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요?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아이디어도 엄청나게 많고 순발력도 뛰어나요. 그걸 사람을 콕콕 찌르거나 울림을 주는 말로 잘 치환해내는 정말 카피라이터 같은 사람이죠. 문재인이라는 사람은 말과 생각 같은 것들을 이 속에 막 욱여넣는 것 같아요. 욱여넣고 묵히고 익혀서 쓱 꺼내는, 굉장히 정제되고 간결하고 빈틈없는 스타일이에요. 두 분의 결은 틀림없이 같은데 외부로 자기 생각을 내보내는 방법에서는 큰 차이가 나요.
Q ‘대통령의 카피라이터’라는 별명이 항상 작가님을 따라다니는데요. 이 별명이 부담스러울 땐 없나요?
부담스럽다기보다는 자랑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죠. 약간 대통령을 팔아먹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한데, 이 정도는 봐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웃음)
Q 이번 책의 또 다른 특징은 굉장히 따뜻하다는 점이에요. 여러 정보도 얻게 되지만 결국 책장을 덮고 나서는 따뜻한 위로가 마음에 남아요.
그건 저의 철칙이라고 할까요? 독자가 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그 사람의 가슴 한복판에 ‘사람’, 이 두 글자가 남았으면 좋겠어요. 사람이라는 단어 하나를 평생 붙잡고 갈 거예요. 이 책이 사람에 대한 책은 아닌데 결국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고, 덮었을 때 마음이 따뜻해졌다면 아마 사람이라는 글자가 남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사진 : 임준형(원파인데이스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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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DB 2018.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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