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발자국> 출간 정재승 교수 인터뷰
정재승 교수 “퇴임 후 ‘인간 정재승’이란 직업으로 살아보고 싶다”
초록색 칠판, 분필 가루 흩날리며 분주하게 판서 중인 선생님의 손, 그리고 스르르 감겨오는 눈꺼풀. 이것이 12년의 의무교육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과학 교과목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흐릿한 기억 속에는 교과서에 실린 지구와 달, 식물의 세포 작용,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자동차와 소금물의 농도 같은 것들이 있다.
그랬던 나에게 ‘인간의 뇌는 어떻게 선택을 하는가’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정재승 KAIST 교수의 신간 <열두 발자국>(어크로스/ 2018년)은 오랜 세월 감겼던 눈을 번쩍 뜨이게 해준 책이었다. 결정장애를 앓는 사람들을 위한 해결책으로 ‘결핍’이라는 처방전을 제시하는가 하면, 이름을 적으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설정의 ‘데스노트’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아직도 우리 곁에 존재하는 전근대적인 미신의 흔적을 탐색한다. 과학이라는 운동장 안에서 독자들은 재미있게 놀기만 하면 된다.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이후 17년 만. 그동안 여러 공저를 냈지만 단독 저서는 참 오랜만이다. 그동안 정재승 교수는 소설가 김탁환과 함께 소설 <눈먼 시계공>을 집필하기도 했으며 미학자 진중권과 <크로스>라는 책을 쓰면서 성공적 콜라보의 진수를 보여줬다. 또한 야구 덕후로서의 면모를 십분 발휘 야구팬 57인과 함께 MBC 청룡의 4번 타자 백인천 이후로 사라진 4할 타자의 미스터리에 대해 연구했다.
‘크리에이티비티’는 정재승에게 관념어가 아닌 삶의 형식이다. 전형을 파괴하고 자신만의 길을 발명하고 있다. 7월 10일 서울 압구정동에서 정재승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가 출연한 ‘알쓸신잡’의 영향일까? 인터뷰 사진 촬영 동안 그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는 외국 팬도 있었다. 정말 이대로 ‘과학 한류’가 와버릴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날이었다.
“왁자지껄 벌이는 ‘과학수다’ 꿈꿔...과학이 일상의 교양으로 받아들여졌으면”
Q 지난 3월 한 극장에서 연극 공연을 기다리던 당신을 봤다. 연극을 자주 보는 편인가?
지난 4년 간 완전히 연극에 빠져서 지냈다. 매년 평균 100편씩 봤다.
Q 공연을 많이 보다보니 국립극단 사외이사직도 맡았다고?
국립극단 이사 중에 비연극인 사외이사가 한 명 포함돼야 한다더라. 비연극인 중에 연극을 많이 보는 사람을 찾다가 내게 연락이 왔다. 처음엔 안 하겠다고 했는데 배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겠다고 했다. 이젠 공연 끝나고 무대 뒤에서 인사드리고 사진 찍는 게 익숙해졌다.
Q 아까 사진 촬영 때 알아보는 외국 팬도 있었다.
‘알쓸신잡’이 중국서 방송되면서 중국 분들이 선물을 보내오기도 한다. 내용상 별로 즐겼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도 신기하고 놀랍고 민망하고 그랬다.(웃음)
Q 이대로 과학한류가 올 수도 있겠다 싶다.(웃음)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Q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이후 정말 오랜만의 책이다. 17년만에 책을 출간한 소감은 남다를 것 같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쓴 이후로 그 다음 책은 역작을 써보자 했다. 그러다보니 선뜻 시도가 잘 안 되더라. 책을 쓰며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과 콜라보를 하며 공부를 했다. 이제는 내 목소리로 책을 내도 되겠다 싶어서 책을 내게 됐다.
Q 지난 10년간 진행한 강연 중 가장 흥미진진한 것 열두 편을 골라 책으로 엮었다. 원래 책을 낼 의도가 있었나?
강연을 준비하면서도 책을 염두에 뒀다. 이제는 사람들이 과학을 구술 문화의 한 형태로 논할 때도 됐다고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모여 술집에서 왁자지껄 벌이는 농담 같은 ‘과학수다’ 류의 책을 내고 싶었다. 앞으로는 과학이 사람들에게 일상의 교양으로 받아들여져야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Q 과학을 잘 모르는데도 너무나 즐겁게 읽었다. 책을 재밌게 쓰는 비결은?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쓴다는 건 지식이 머릿 속에 잘 정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말과 글의 기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지식도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지식과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 사람들이 진짜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개별화된 정보, 팩트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맥락에 놓여져있는지,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다. 과학자에게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도 통찰이다. 과학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인간 문명과 미래에 대해서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한다.
Q 당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 있나?
나만의 과정같은 건 없다. 다만 이번 책은 강연이 바탕이 됐는데, 강연은 내가 남들보다 훨씬 많이 알아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수업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궁금해 하는 질문을 스스로 문제제기 하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공부했던 과정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과정이 강연이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시간인 강연이야말로 내 생각을 잘 정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열두 발자국>도 그 결과물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기승전결이 있는 완결된 이야기 구조 안에서 이야기를 해본 경험이 많아지는 게 도움이 됐다. 그래서 가급적 했던 강연을 또 하기보다는 매번 다른 주제로 준비하려고 한다. 지금 준비된 강연 자료가 200개 가까이 있다.
Q 컴퓨터를 켜면 다양한 주제의 강연 자료가 저장돼 있겠다.
물론이다. 과학의 주크박스다.(웃음)
Q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에서 책 제목이 나왔다.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 당신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나?
대학원 때 처음 접했으니 읽은 지 20년이 넘은 책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자신이 태어난 날의 밤 하늘을 구현한 걸 보며 감격한 천체 투영관은 너무나 낭만적인 허구의 세계가 아닌가?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계가 한 사람의 이야기와 맞닿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보편적인 과학이 한 사람의 내밀한 삶과도 이어지는 순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이야기가 좋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내 이야기도 어떤 사람에겐 정교하게 계산된 천체 투영기의 밤하늘 같은 역할을 하길 바랐다.
Q 과학과 낭만은 어떻게 연결되나?
사람들은 과학이 삭막하다고 얘기하지만 나는 과학이 무척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 광활하게 펼쳐진 밤하늘에 쏟아지는 은하수, 그것보다 더 낭만적이 순간이 어딨겠나? 숲에서 물이 흐르고 거기서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만큼 낭만적인 순간이 있을까? 과학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었을 때의 경이로움은 거대한 낭만과도 만나 있다.
Q 터키 소도시에서 학회가 열리는 장소를 찾지 못해 온 도시를 헤매던 끝에 그 도시의 지리를 완벽하게 파악했다는 대목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그전까진 일 년에 학회를 열 군데 이상 가도 정작 그 도시는 모르는 경험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길을 잃고 헤매고 방황을 하고서야 비로소 그 도시의 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니. 그동안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열심히 지도 읽는 법을 배우고 지도 기호 외우며 살아왔는데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도를 그리는 일이고 그것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걸 나이가 들어서 깨달은 것이다. 나는 마흔이 다 되어서 깨달았지만 젊은이들은 진작부터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볼 기회를 어른들이 제공해줬으면 좋겠단 마음으로 그 부끄러운 에피소드를 공개했다.(웃음)
“새로운 이야기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세대 교체되면서 새로운 생각 믿는 사람 늘어나는 것일뿐”
Q 지난 1월 JTBC ‘가상화폐 신세계인가, 신기루인가’ 토론회에서 유시민 작가와 함께 출연해 많이 회자됐다. 토론회가 끝난 후 1200건 이상의 강연 신청이 밀려왔다고?
요즘도 강연 신청은 매달 1000건 이상 온다. ‘알쓸신잡’ 나가기 전에는 월 평균 300건이었는데 방송에 나간 뒤로 월 1000건이 됐다. 그런데 그땐 2주만에 1200건이 몰려온 것이다.
Q 토론회에서 유시민 작가는 인문학자고 정재승 교수는 과학자라는 차이가 확연이 드러났다. 하나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입장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블록체인이나 암호화폐가 갖고 있는 투기 광풍이나 기술적인 한계 같은 문제점은 뚜렷하니 그걸 지적하는 건 명확한 반면, 신기술이 지닌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는 건 모호하고 이상주의적으로 비칠 수 있다. 아직 오지 않았기에 본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토론을 하면서 했다.(웃음) 과학자가 그냥 보여줘야지 말로 하는 논쟁에서 이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갖고 있는 문제가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거라 믿는 사람에게 무슨 얘길 해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토론은 잘 안 된다. 토론이 끝나고 나서야 ‘혁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라는 화두를 얻게 됐다.
Q 열 번째 발자국 ‘혁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는 토론회에서 미처 못 보여준 과학자로서의 신념을 보여주는 장이다.
새로운 이야기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세대가 교체 되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생각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뿐이지 그들(기성 세대)을 설득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현실이 올 거라고 믿고 그 아름다운 이상을 추구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나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바뀌는 것도 아니다. 기술의 미래는 쉽게 예측해서는 안 된다. 그런 얘길 하고 싶었다.
Q 블록체인 거래도 해봤나?
아직 안 해봤다. 그런데도 ‘코인충’이라고 욕먹고 있어서 억울하다.(웃음) 갖고나 있었으면 덜 억울했을 거다. 이제는 값이 많이 떨어져서 사볼까 싶기도 하다.
Q 스마트기기를 많이 쓰면 ‘디지털 치매’에 걸린다는 기사를 읽으며 불안에 떨었던 적이 많았다. 책에서 스마트기기 때문에 뇌를 적게 쓴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으며 단지 뇌를 쓰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라는 대목을 읽고 안심했다.
언제나 성과와 한계, 문제점과 새로운 기회는 공존한다. 무조건 싸잡아서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비관적인 부분은 분명히 하되 새롭게 열리는 기회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인간은 녹록치 않다. 어떤 것 때문에 디스토피아를 만든다거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 낙관적인 유토피아를 만들지도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싸우며 살아간다. 나는 무엇을 단정적으로 표현하고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고 확신에 차서 주장하는 것이 성미에 안 맞고 그런 것들을 경계하는 편이다.
“뇌과학이 알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실체...본질에 도달하려면 수만 발자국 필요”
Q 요새 뇌과학이 주목받고 있지만 보통 사람으로서는 어느 정도까지 발전해 있는지 체감하기가 어렵다.
일단 뇌과학자들이 본질적으로 알고자 하는 건 마음의 실체다. 많은 연구를 통해 몸이나 환경이나 사람이나 주변 요소의 영향도 받지만 결국 판단하고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체는 뇌라는 걸 밝혀냈다.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뇌 구조와 기능을 파악하고 뇌가 몸이나 환경, 타인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본질에 도달하려면 수만 발자국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겨우 열두 발자국을 뗀 것이다.
Q 10대보다 20대에, 20대보단 30대에 읽은 책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썼다. 당신의 독서 습관은 어떤가?
리더(reader, 읽는 사람)와 유저(user, 사용하는 사람)의 위치를 왔다갔다하는 것 같다. 리더로서 정독해서 읽는 책이 일주일에 두세 권 있고, 뒤적거리면서 무슨 얘길 하는지 살펴보는 책이 20~30권이다. 꽂아두었다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읽어본다.
Q 리더로서 읽는 책과 유저로서 읽는 책은 어떻게 구분되나?
책을 읽는다는 건 결론을 얻는 게 아니라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답은 뻔하다. 다만 답을 얻기까지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같이 공감하는 것이 책 읽기다. 이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저자의 책을 천천히 읽는다.
Q 다시 태어나면 스타트업을 하고 싶다고 썼다.
스타트업은 사회 전체에 기여를 해서 사람들이 기꺼이 거기에 돈을 지불할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대기업이라는 명성에 기대지 않고 조직이라는 우산 안에서 안전하게 존재하기 보다는 혼자 스스로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정신이 존경스럽다. 나도 언젠가 정년 퇴임을 하면 스타트업 정신으로 인간 정재승으로 살아보고 싶다.
Q ‘인간 정재승’은 어떤 일을 하는 존재인가?
그게 강연일수도 있고 책일 수도 있고, 내가 어떤 제품을 만들 수도 있고 컨설팅을 해주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형태는 자유롭고 다양할 것이다. 창의적인 콘텐트를 만들어 내고 그걸 혼자 갖고 있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기꺼이 거기에 자신의 돈을 지불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임준형(원파인데이스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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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DB 2018.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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