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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진 Jan 23. 2022

신형철“좋은이야기는 덜 폭력적인 사람으로 살게도와준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출간 기념 신형철 인터뷰

어떤 감정은 사후에 온다. 이제서야 지난 수년간 우리 몸과 마음을 스쳐간 무엇을 ‘슬픔’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됐다. 304명의 아이들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고, 독재의 검은 유령이 다시 우리 사회에 복귀하는 듯 했다. 거대한 비극, 타인의 슬픔 앞에 황망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내 태연히 일상에 복귀하는 자신의 모습에 이런 질문도 가져보곤 했다. 태초에 개인적인 감정인 슬픔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을까?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지난 9월에 출간한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한겨레출판/ 2018년)에서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이자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라고 썼다. 책을 읽으며 지난 시간을 천천히 깊게 복기할 수 있었다. 그가 지난 7, 8년간 각종 지면에 발표한 글을 모은 책에는 문학, 예술과 사회 풍경이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얽혀 있다. 이 책은 일종의 문학사용법을 제시한다. 문학을 통해, 문학과 함께 이 사회 속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고 살아가는 태도를 보여준다.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관’이라는 한 극장의 광고 문구를 빌어와 신형철 평론가를 ‘작품보다 아름다운 평론’을 쓰는 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2014년) 이후 4년 만에 새로운 산문집을 출간한 신 평론가를 만나러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를 찾았다. 익히 들은대로 그는 잘 웃지 않았다. 목소리 역시 줄곧 일정한 톤을 유지했다. 고저장단의 변화 없이 일정한 표정과 목소리였으나, 그로 인해 그가 하는 정련된 말과 생각은 더욱 돋보였다.

“타인 슬픔에 대한 무지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하는 게 공부...무한히 접근해 가는 과정은 숙명”

Q 2014년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돼 전라도 광주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많이 다르다. 일단 교통 체증이 없어서 좋다. 서울은 차 막히는 게 일상이잖나. 광주는 어디든  20~30분 안에 갈 수 있으니 삶의 질이 다르다. 집값도 싸고, 생활비도 덜 들고, 음식도 맛있다. 지방에 직장을 얻는 건 행운이다.

Q ‘민주와 인권의 도시’ 광주에 살고 있지만 태어난 고향은 보수적 성향의 도시인 대구다.

대구에서 태어나 20년 살았고, 대학 입학하고 서울에서 20년 살았다. 광주 시민으로 사는 건 5년째다. 아시다시피 광주는 대구와 여러모로 다르다. 학생들과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피하지 않는데, 소통이 잘 된다고 할까, 아주 편하다. 다른 지역에 직장을 얻었더라면 이런 대화를 이만큼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Q 1부에 실린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란 글을 읽으며 ‘실수도 폭력이 될 수 있다’라는 구절이 아프게 다가왔다.

악의를 갖고 한 일이 아님에도 그 일이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건 참 두려운 일이다.  그런 실수를 덜 저지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 ‘공부’인 거다. 매체를 통해 공개되는 일,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 나 자신의 시행착오 등등 모든 것이 공부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공부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옛날식으로 말하면 성인(聖人)이 되지 않는 한 계속해야 하는 게 공부일 테니까. 그 성과도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타인의 슬픔에 무지한 상태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공부를 하는데, 한다고 해서 또 완전히 알게 되느냐 하면 그게 아니다. ‘제논의 역설’처럼 무한히 접근해 가는 그 과정이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Q 불가능한 것을 향해서 계속 닿으려는 노력이 결국엔 ‘공부’라는 말로 표현이 됐다.

사람들에게 “노력하라”고 훈계하려고 쓴 책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이 공부한 기록을 조금 적어본 것이었다. 타인의 슬픔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100%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럴 때 냉철하고 솔직하답시고 “인간은 결국 자기밖에 몰라. 나는 널 이해할 수 없어. 미안해.”라고 말할 순 없으니까. “영원히 모를 수 있겠지. 그렇지만 알려고 노력할게.”라고 말하는 것,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하는 태도만으로도 상대방에게는 힘이 되지 않을까? 사회 속 타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해버리고 그 상태를 긍정하는 냉소적 태도보다는 불가능해도 노력해보겠다는 그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적어본 책이다.

Q 이야기를 듣다 보면 김연수 작가가 200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세계의 끝 여자 친구' 중 한 대목이 떠오른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김연수 작가의 애독자다. 십 수 년 동안 그의 소설을 따라 읽어왔고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쩌면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영향도 곳곳에 있을지 모른다. 인용하신 문장과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연수 작가가 저 문장을 쓴 책을 읽을 때는 그게 가슴 저리게 실감되지 않았었다. 그 이후 나에게 직간접 경험이 쌓이면서 이제야 저 논점이 내게서 살아 움직이게 된 것이다. 살아온 만큼 생각할 수 있고 또 쓸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누구도 시간보다 더 빨리 달려갈 수가 없다.

Q 인간적으로도 김연수 작가와 친분이 있나?

자주 만나거나 연락하는 사이는 못 된다. 멀리서 언제나 응원하고 있고 그 역시 내 글을 읽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정도다. 평론가는 좋은 작가들이 제공하는 영감 속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고 그런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준비 중인 두 번째 평론집은 이승우, 김연수, 황정은, 권여선 등의 소설가와 허수경, 심보선, 진은영 등의 시인이 준 영감 속에서 쓰인 글을 중심으로 묶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

Q 전작에 이어 이번 책에서도 ‘정확함’이라는 가치를 강조했다. 평소 생활에서도 자신에 대해, 타인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나?

별로 그렇지 않다. 삶이 그렇지 않으니 글이라도 그렇게 쓰려고 노력하는 거다. ‘정확한’이라는 말은 어떤 문장이 어떤 생각을 딱 잡아채는 순간을 가리킨다. 내 글이 그런 의미에서 정확한 글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지난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표명한 소망이지만, 그런 문장을 쓰듯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나는 타인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내 위로는 불발되기 십상이며, 가족들에게도 충분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 

Q 2010년 이후 한국 사회가 새로운 계몽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진단하고, 미성숙한 인간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닌 ‘감수성’이라 지적했다. 이런 진단을 내린 배경을 말해준다면?

한국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발전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뒤처진 부분을 통계 등으로 확인해 보면 타인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지표들이 많다. 다른 분야의 발전과는 별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속도가 다르다. 고려대학교 보건대학원 김승섭 교수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2017년)에 그런 사례가 자주 나온다. 가령 에이즈 환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이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에이즈에 대한 무지와 타인의 슬픔에 대한 냉담함이 결합된 경우다. 성소수자의 자살률도 압도적으로 높다. 이런 맥락에서 지성과 감수성을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차이가 차별이 되는 상황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능력의 정도를 가리켜 감수성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Q 이 책에 실린 특정한 시기에 쓴 글들은 모두 ‘슬픔을 공감하는 감수성’이라는 화두를 호출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주제의 책이 나올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내 책이 마침 도착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요새 하고 있다. 앞으로도 슬픔에 대한 공부에 관해 더 많은, 더 훌륭한 책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Q 책에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라고 썼다.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좋은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처음부터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낄 수 있다면 공부가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고통의 ‘현장’에 가서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사는 분들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김승섭 선생이나 정혜신 선생 등이 그런 분들이다. 나는 겨우 책상머리에서 공부라도 해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분들에 비하면 이런 주제로 글을 쓸 자격이 내게 있나 싶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근래의 예를 들자면 한국사회의 남성은 우리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잘 모를 수 있다. 나도 그렇다. 경험하지 못한 슬픔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려우니까. 그런데 모르겠으면 그때 해야 할 일은 공부다. 그래야 여성들이 왜 저렇게 분노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가 될 텐데, 공부를 하지 않은 채로 그 분노의 표현 방식에 대해 비판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공부는 그야말로 최소한이다. 공부라도 하자는 말엔 자조의 뉘앙스가 있다.

Q 그런 맥락에서 3부 사회 편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글의 주제가 페미니즘이다. “2018년의 ‘남녀’는 ‘남북’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라고 썼다. 올해 진행한 한 인터뷰에서도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페미니즘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누가 부정할 수 있겠나. 가장 중요한 주제다. 근래 내 공부의 절반 이상은 이 주제에 할애돼 있다. 중립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긴장하지 않으면 남성적 당파성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한 것이고. 그러나 이 책에는 그 공부의 기록은 거의 담겨 있지 않다. 뭔가를 쓰기에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단 공부에 매진할 때다. 그러나 이번 책 제목에는 그 영향이 분명히 담겨 있다.

Q 페미니즘에 대해 본격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나?

20대 초중반에 페미니즘 공부를 했던 세대로서 그 주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글을 쓸 때도 그 방향성 속에서 써왔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그런 게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근래 느끼고 있다. 정말 중요한 건 실제 상처입고 고통 받는 여성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낄 수 있느냐다. 같은 여성 학자와 여성 평론가들이 자연스러운 공감을 성취하는 것을 보며 나의 ‘남성임’을 생각하게 됐다. 사실은 그 근원적 차이가 이론과 입장의 차이를 만드는 측면이 크다. 남성 평론가는 자신은 학문적으로 엄정하고 두루 사려 깊은 중립적 입장에서 발언하는데 여성 평론가는 여성적 편향 속에서 발언한다고 느끼기 쉽다.

그러나 남자가 자신이 ‘보편적’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바로 가장 ‘남성적’인 순간이다. 남성 평론가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은 적어도 자신이 ‘남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 주장의 진리값이 100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50으로 떨어져 내리는 무참함을 견뎌내야 한다고 말이다. 이론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의 층위에서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문단의 여성 평론가들이 쓴 글을 통해 배우고,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배운다.

 "인간과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가장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은 문학작품"

Q 책에서 “나는 ‘소설적인 문장’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믿는 편이다.(…) 소설적인 문장은 ‘소설적인 문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고뇌한 흔적을 품고 있는 문장이다.”라고 썼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설적인 문장’을 가장 잘 구사하는 작가를 한 명 꼽아준다면?

특정한 작가 이름을 대면 ‘소설적인 문장’에 대한 내 정의에 위배된다. ‘언어 예술로서의 소설’이라는 생각에 시달리며 글을 쓸 때 소설적인 문장이 탄생하는 것이니까 개별 사례는 수없이 많을 수 있다. 이문구와 박상륭의 문장에 무슨 공통점이 있겠나. 이승우와 한강의 문장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소설적인 문장을 구사하려 노력하는 작가들이다.

Q 책 마지막에 다양한 주제의 책 추천 리스트가 실렸다. 앞에 등장한 글들과 다른 성격의 콘텐츠인데 자발적으로 구성한 건가?

당연히 그렇다. 원래 그런 리스트를 좋아한다. 평소에도 평론가의 리스트를 발견하면 재밌게 읽은 뒤 출력해서 보관도 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런 걸 해본 적이 별로 없더라. 산문집이니 그런 걸 부록처럼 실어도 재밌겠다 싶었다.

Q 길고 심각한 글만 선호할 거라 생각했는데 리스트를 좋아한다는 게 의외다.(웃음)

나는 언제나 그런 소개를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취향을 알 기회니까 당연히 리스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동진, 정성일, 김혜리, 허문영 같은 영화평론가들의 추천 영화 리스트는 모두 다 보관하고 있다. 그중에서 못 본 영화는 찾아서 보곤 한다.

Q 유튜브의 시대, 사람들이 가장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문학평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물론 지금은 400년 전에 돈키호테가 책을 읽듯이, 혹은 150년 전 엠마 보바리가 책을 읽듯이 책을 읽지는 않는다. 다른 것들이 많이 생겼으니까. 독서를 하는 인구는 앞으로도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읽는 사람들이 그걸 읽는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엔 인간과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가장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은 문학작품이니까. 영상과의 대화는 언어적 소통이 아니므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문학과는 다른 장점이 또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가면서 ‘왜 사는가?’를 고민하는 한, 또 타인과 부대끼며 살면서 ‘타인이란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한, 문학을 버리는 건 생존 차원에서도 어려울 것이라고 느낀다. 그렇게 믿고 있다.

Q 2015년 문학 권력 비판론이 제기되며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의 세대교체가 있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서 눈에 띄는 변화의 지점이 있었다면 말해 달라.

세대교체와 더불어 비평잡지로서의 위상을 더 강화하려는 시도도 했었다. 그 이후로 벌써 2~3년 시간이 흘렀는데, 그 시도가 성공했는지 돌아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내년 가을에 계간 <문학동네> 100호 발간을 앞두고 있는데, 내부에선 그 즈음에 또 한 번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다. <악스트>나 <릿터> 같은 잡지들의 약진도 주목하고 있다. <문학동네> 같은 두꺼운 계간지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지 내내 고민하는 중이다.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년) 출간 이후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느낌의 공동체>(문학동네/ 2011년), <정확한 사랑의 실험> 등 두 편의 산문집이 나왔지만, 여전히 신 평론가의 평론집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다.

원래 이 책보다 먼저 내거나 거의 같이 내는 게 목표였는데 실패했다. 10년 동안 쓴 글들을 정리하는 중인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내가 생각하는 책의 포맷이 있는데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다. 글을 좀 더 써야 하고, 글을 더 고쳐야 한다. 언제 나온다고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올해 안에 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첫 번째 비평집인 <몰락의 에티카>는 등단한 지 3년 반 만에 낸 신예의 책이라 다들 너그럽게 봐준 면이 있을 텐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로부터도 10년이 흘렀고 나도 40대가 되었으니 너그럽게 봐달라고 할 계제가 못 된다. 스스로도 가혹한 기준으로 원고를 검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더 지연되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Q 과거에 진행한 팟캐스트 ‘문학동네 채널1 : 문학이야기’에서 방송이 끝날 때마다 초대손님에게 던진 질문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다. 신형철 평론가가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란?

책 제목을 비틀어 말하자면, ‘슬픔을 공부하는 기쁨’을 주는 이야기. 내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어 타인의 슬픔에 대해 조금 더 알게 해주는, 그래서 덜 폭력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야기. 적어도 지금의 답은 그렇다. 그러나 몇 년 후면 또 달라질 것이다. 그때 다시 물어 달라.(웃음)


- 글 : 주혜진(북DB 기자)

- 사진 : 임준형(원파인데이스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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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DB 2018. 10. 26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No=8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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