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가치, 신념, 또는 개인적인 이유로 무언가를 결코 하지 않는 원칙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만들어진 원칙은 대체로 "절대 하지 않는다"는 강경한 형태를 띤다. 특히 그 원칙이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인 이유를 근거로 만들어졌을 때, 이는 더욱 견고해진다. 하지만 생각보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이를 어기는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는 원칙 자체의 한계일 수도, 원칙을 설정한 사람의 인간적인 한계가 원인일 수도 있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인간과 인간이 사는 삶 자체를 꽤 비꼬아서 보는 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원칙을 설정하고 이를 어김으로써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특히 감독의 타겟이 된다. 잘 짜인 각본 아래에서, 인물들은 스스로가 세웠던 원칙에 의해 무너져 간다. <킬러들의 도시>(2008), <쓰리 빌보드>(2017), <이니셰린의 밴시>(2022) 세 편의 영화에서는 그런 자기모순과 아이러니에 빠져 고민하는 과정을 코미디로 보여준다. 분명 괴팍하고 과격한 사건들이 발생하지만, 보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이니셰린의 밴시> - 그냥 자네가 싫어졌어 세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각자의 원칙이 존재한다. 이는 기이한 구석도 있지만, 원칙이 나온 과정 자체는 자연스럽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콜름은 매우 가깝게 지내던 파우릭에게 어느 날 아침 절교를 선고한다. 파우릭이 제공하는 말은 잡설에 불과하고, 그와 보내는 시간은 유의미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파우릭이 쓸모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에 있어서, 콜름은 파우릭을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에 더욱더 효율적인, 앞으로 한마디도 건네지 말라고 선언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여기서 콜름의 원칙은 파우릭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다. 유익한 사람들만 만나려는 콜름의 선택도, 침묵을 지시하는 방법이 파우릭에게 가장 덜 상처를 주는 방식이라는 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킬러들의 도시> - 가라데를 할 수 있으면 어떡해요?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는 딸의 강간치사가 발생한 뒤,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가진 상황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딸의 범죄 피해와 경찰의 지지부진한 수사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세 개의 광고판을 게시한다. 하지만 수사를 촉구하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입히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광고 문구에서도 경찰청장을 직접 공격하는 말을 담았지만,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 또한 간직하고 있다.
<킬러들의 도시>에 있는 킬러들에게는 업무 과정에 대한 원칙이 존재한다. 타겟이 아닌 다른 사람도 같이 죽이는 일이 발생하지만, 이는 그 사람이 킬러를 공격했을 때 자기방어로써만 허용된다. 두 주인공 레이와 켄은 영화 초반 술병을 들고 있었던 사람을 죽였다고 이야기하며, 그렇다면 무기를 들고 있지 않지만 가라데를 잘하는 사람은 죽여야 하냐는 논쟁을 나눈다. 이는 순진하게 생긴 사람은 가라데를 못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익살스럽게 마무리되지만, 기본적으로 타겟 외의 사람은 방어로써만 죽인다는 원칙을 보여준다. 레이가 킬러 보스에 의해 켄의 다음 타겟으로 지정된 것도, 이전 업무에서 레이가 어린아이를 실수로 죽이며 원칙을 완벽하게 어겼기 때문이다.
<쓰리 빌보드> - 경찰서에 하필 있던 딕슨 하지만 당연하게도,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하필, 우연히 등의 수식어가 어울리는 상황 속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원칙을 강경하게 내세우는 과정에서 발생하였기에 우연이 아니기도 하다. <킬러들이 도시>의 레이는 신부를 죽이는 업무를 수행하다가 고해성사하러 온 어린아이를 죽인다.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는 자신의 광고판을 누군가가 불태우자 이를 경찰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경찰서에 불을 지른다.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원칙대로, 경찰서에 미리 전화해서 한 명도 그 자리에 없도록 한다. 하지만 하필 경찰관 딕슨은 노래를 들으며 사건에 대한 글을 읽고 있었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큰 화상을 입게 된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콜름은 자신의 강경한 의지를 손가락을 스스로 자르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파우릭이 꾸준히 말을 걸려고 시도할 때마다, 자기 손가락을 잘라 파우릭 집의 문에 내던진다. 하지만 하필 자른 손가락을 파우릭이 가장 아끼던 당나귀가 먹고 죽어, 파우릭의 마음에 해결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만다. 굳건했던 원칙만큼, 원칙이 부서진 상황 또한 극단적인 결과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극단적인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원칙을 넘어서야 한다.
<이니셰린의 밴시> - 같은 곳을 바라보는 콜름과 파우릭 <쓰리 빌보드>와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원칙이 만들어내는 갈등은 인물 간의 소통과 이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소된다. 이전에 끊임없이 대립하던 딕슨 경위와 밀드레드는, 오히려 화재 이후로 딕슨은 밀드레드가 가진 아픔을 이해하고, 밀드레드는 딕슨이 새롭게 가진 의지를 이해하게 된다. 마침내 함께 다른 범죄자를 쫓기 시작하며, 영화 내내 풀리지 않던 문제의 해결을 시작한다. 콜름은 당나귀를 죽인 것에 대한 복수로 파우릭이 자기 집에 불을 지를 것을 허용한다. 상대에게 감정을 해소할 기회를 준 뒤, 자신의 원칙을 해제하고 평범한 대화를 다시 시작한다. 함께 전쟁이 벌어지는 본토를 바라보며, 두 오랜 친구의 다툼은 멈춘다.
<킬러들의 도시> - 스스로 불러온 결과를 목격한 해리 반면 <킬러들의 도시>에서는 원칙에 끝까지 얽매인 인물이 파국에 이른다. 켄과 레이의 보스 해리는, 어린아이를 죽인 레이는 죽어 마땅하다며 자신이 실수로 어린아이를 죽인다면 즉시 입에 총구를 넣고 쏠 것이라고 말한다. 등장인물 간 총격전이 일어난 끝에 해리는 자신이 죽이려던 레이 외에 다른 사람을 실수로 죽이고, 그 시체를 어린아이의 것으로 오해한다. 이내 원칙은 원칙이라며 중얼거리다가 주저 없이 자기 머리를 쏜다. 쓸데없는 원칙에 얽매였을 때의 결과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표출된 순간이다.
세 영화는 결국 원칙이 무너지고 이를 극복하는 순간을 통해 그 덧없음과 인간의 모순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이를 끝내 벗어나지 못한 <킬러들의 도시>의 해리에게는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결과를, 이를 극복한 다른 인물들에게는 앞으로 나아가는 결과를 준다. 이는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너진 옛 원칙을 넘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복잡성과 모순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신명 나게 비꼬면서도, 그 틈에 희망도 조금 전하는 블랙코미디다운 방식으로 그렇게 즐거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