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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Nov 02. 2023

장률과 몽유병

경주,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후쿠오카

삶을 약간 멀리서 바라보면 큰 곡절이 없을지도 모른다. 작은 고통과 작은 행복이 합쳐져 전체적으로는 순탄한 이야기를 이룰 수 있다. 그렇게 살다보면, 사람이 떠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이 찾아오기도 하며,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게 되기도 한다.

장률 감독은 그런 삶의 과정에 시선을 담아 흥미롭게 전달하는 감독이다. <경주>(2013),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후쿠오카>(2020) 세 도시 속 이야기는 삶과 마찬가지로 큰 곡절을 겪지 않는다. 장소의 이동이라는 변수를 제외하고, 주인공은 자신에게 발생하는 사건들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자신이 그리워하는 것으로 인해 현실과 같은 꿈에 빠져들었다가, 그로부터 깨어날 때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공허하지만 따뜻한 시선을 담아 인물을 지켜보다 보면, 관객도 낯선 도시와 상황 자체에 함께 머무르게 된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군산> - 우리 여기, 며칠 있어볼까?

인물은 갑작스레 낯선 도시로 향한다. <경주>에서 최현은 친한 친구의 장례식 이후 그와 함께 있던 시간이 기억나 경주로 간다. 찾고 있던 그림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대신 찻집 주인 공윤희가 있다. 둘은 스쳐 가듯 서로와 함께 거닌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이하 <군산>)에서 윤영은 선배의 전 아내 송현과 함께 갑작스레 군산으로 향한다. 예정과 달리 송현은 민박집 사장과 윤영은 사장의 딸인 주은과 엮이게 된다. 예정보다 더 길게 머물던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는데, 그사이 변화들이 생긴다. <후쿠오카>에서 제문은 헌책방을 운영하던 중 단골손님 소담과 함께 후쿠오카로 향한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연극부 선배 해효로, 그곳에 살며 바를 운영하고 있다. 제문과 해효는 그들이 동시에 사랑했던 순이를 그리워하며, 소담까지 셋이서 거리를 걷는다.


낯선 도시에 향함으로써, 인물들은 경계 위 공간에 들어선다. 세 도시는 모두 복잡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경주의 유적과 고분은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공존하고, 군산의 적산가옥은 일제강점기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한국 속에 공존한다. 후쿠오카는 일본이지만 일본 같지 않은, 국적이 모호한 공간이다. 그 경계 위에서 인물들은 삶과 죽음을, 영화 속과 영화 밖을, 결과적으로 꿈과 현실이 섞인 채 보낸다. 그리고 관객은 그 혼란을 그들과 함께 겪는다.


<경주> - 죽음을 바라보는 해일

꿈에는 삶과 죽음이 섞여 있다. 삶은 언제든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영화와 꿈은 그 시점을 섞어 인물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후쿠오카>에서 세 인물은 함께 낡은 서점으로 향한다. 해효는 얼마 전까지 주인이 아는 노인이었다고 했지만, 서점의 주인인 그의 손녀가 할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경주>에서 최현과 최현을 사랑했던 여정은 길을 가다가 자신들을 부르는 점집의 할아버지를 만난다. 다음 날 최현 홀로 향했을 때 그곳에는 역시 그 손녀만 남아서 할아버지의 죽음을 전한다. 


보통의 꿈은 자신의 죽음으로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영화라는 꿈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무리되지 않으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 이어질 수 있다. <경주>의 여정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죽음과 맞닿아있다. 친구의 죽음으로 어떤 옛 기억에 대한 그리움이 생긴 최현은 도착한 찻집에서 친구 아내의 모습을 본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죽음은 스스로 결정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후 영화에는 자살한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가는 길에 만난 어린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도, 경주에서 가까워진 공윤희의 남편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술을 마신 뒤 윤희와 올라간 곳도 경주의 무덤이다. 마침내 세 명의 폭주족이 그의 옆을 지나가다 사고로 죽어버렸을 때, 최현은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이내 죽음과 낡은 기억에서 깨어나 자신이 찾던 꿈이 마무리되었음을 인식하며, 다시 삶의 공간인 서울로 향하는 것이다. 꿈은 그가 수용하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지점들을 되새긴 후 깨어날 수 있게 만든다. 


<후쿠오카> - <군산>의 소담이 놓은 인형을 바라보는 후쿠오카의 소담

꿈에는 또한 영화 밖의 요소들이 섞여 있다. <경주>와 <군산>에서는 영화 속 인물이 최현과 윤영 역의 박해일에게 잘생겼다고 확고하게 표현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경주>에서는 일본인 관광객이 그에게 한국의 배우 아니냐며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까지 한다. 두 영화에서 박해일은 물론 잘생겼지만, 갈아입지 않은 후줄근한 옷과 면도 안 한 얼굴로 거닌다. 그럼에도 배우 박해일의 특성이 개입되어 인물을 잘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후쿠오카>에서는 아예 배역의 이름이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따른다.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 종종 사용하는 방식으로, 인물에게 다가가기 쉽게 만들면서도 영화 속 상황을 어디까지나 영화로 받아들이게 그 몰입을 제한한다. <군산>에서는 주은 역을 맡았던 소담은 <후쿠오카>에서 다시 나타나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같은 노래를 부른다. 이야기의 흐름을 고려했을 때, <군산>의 이야기를 마치고 죽은 주은이 고향 후쿠오카에 나타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넘어선 같은 배우의 사용으로 혼란을 유발한다.


그래서 배우들은 그 안에서 직접 연극을 연기한다. 해효와 제문은 대학 시절 순이라는 후배를 놓고 함께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기에 학교와 그들을 떠나고, 해효와 제문은 각자의 방식으로 바와 책방에 남아 그녀를 그린다. 소담은 그들을 위해 순이 역을 맡아, 셋이 함께 사랑하면 안 되냐고 이야기한다. 다른 두 배우도 자연스레 이야기에 몰입하며, 순이가 떠나기 전 셋이 대화했다면 할 수 있었던 말들을 뒤늦게 내놓는다. 화면 밖 관객이 영화를 통해 현실에서 잠시 이탈하듯, 그들 또한 연극 내로 들어가며 현실에서 잠시 벗어난 것이다. 극중극은 오래 지나지 않아 막을 내리지만, 막힌 마음에 소통이 되지 않던 해효와 제문은 이후 짐을 내려놓고 서로에게 다시 가까워질 수 있었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 낙빈왕의 咏鵞(영아, 거위를 노래하다)

그리고 꿈에는 국적이 없다. 조선족 출신인 감독은 이전의 다큐멘터리에서부터 국적이 뚜렷하지 않은 인물들을 그려온 바 있는데, 세 영화에서도 국적의 혼란을 겪는 인물과 원래 국적이 뚜렷했지만 해당 공간에서 흐트러지는 인물 모두 등장한다. <후쿠오카>에서 소담은 중국인 관광객과도, 일본인 책방 주인과도 원활하게 대화를 나눈다. 옆에 있던 해효와 제문도 그들의 대화를 이해한다. <경주>에서 최현은 베이징에서 교수를 하며 중국인 아내와 결혼했다가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인물이다. 경주에 도착한 그는 잠시 고민하다 중국어로 된 안내지를 고르고, 상황에 맞게 자신의 중국어 사용 여부를 결정한다. <군산>에서는 재일교포와 조선족이 모두 존재하지만, 조선족이 아닌 사람을 조선족으로 오해하거나 재일교포가 일본인을 상대로는 한국어로 말하며 재일교포인 것을 숨기는 등 그 경계가 흐트러진다.


<군산>의 윤영은 그 경계 위에 있는 인물이다. 남자로도 보이고 여자로도 보이는 애매한 이름처럼, 토종 한국인이지만 화교 학교를 나왔으며, 재일교포인 주은과 온전한 교감을 이룬다. 이는 그가 중식당에서 술을 마신 이후 거위를 노래할 때 가장 두드러진다. 서울 한 가운데에서 그가 부르는 노래는 중국어를 배울 때 처음으로 배우는 노래 중 하나인 영아이다. 자신의 이름이 되기도 하는 노래를 부르며, 경계의 혼란 위에서 춤을 춘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 군산에 다시, 혹은 처음으로 도착하는 두 사람

꿈에서 인물들은 결국 깨어난다. 경계의 혼란을 겪은 인물은 자신이 원래 있던 공간으로 향한다. 최현은 경주를 떠나고, 윤영은 서울로 돌아가며, 후쿠오카의 인물들은 한국에 남은 제문의 가게에 전화를 건다. 하지만 죽음과 삶의 공존, 영화와 영화 밖 현실의 공존, 동북아 3국과 그 이민자들의 공존은 현실에서도 계속되는 일이기에, 그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윤영의 이야기는 서울로 순환되어 다시 군산으로의 여정을 시작하고, 후쿠오카에서 건 전화는 한국에 있을 수 없는 해효가 받는다. 꿈을 떠난 인물은 경주의 최현뿐인데, 이는 그가 꿈을 꾸게 된 이유인 죽음과 공존하는 삶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꿈을 넘어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꿈을 꾸게 할 정도로 그리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던 이전 기억에 대한 수용이 필요하다. 세 영화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제강점기 문제도 그렇고, 개개인에게 발생하는 공허함과 상처에서도 그렇다. 마침내 기억을 받아들였을 때, 혼란스럽거나 경계가 뚜렷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직시하게 된다. 이는 꿈과 같은 시간을 영화와 함께 보낸 관객에게 감독이 주는 위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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