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가까이,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멈췄다 가는 산책처럼, 사랑은 때로는 마음의 휴식처에서 시작되고, 다시 움직이기 위한 발걸음이 된다. 혹은 분을 이기지 못할 때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하는 산책처럼, 남은 마음을 털어내지 못해 반복하는 과정이 된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순간에 가졌던 산책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달콤하게 속삭이는 공간이 되지만, 사랑이 멈춘 이후에 가지는 산책은 남은 분과 울화를 토해내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서 사랑은 산책처럼 길을 거닐며 방황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수필과 같은 단편적인 이야기들 위에 기타 선율이 얹어지고, 다시 폴라로이드 감성의 화면이 얹어진다. 그리고 그 속 인물들은 추억과 현실을 오가며 애매한 자신의 마음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조금만 더 가까이>(2010),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6) 세 편의 영화는 특히 더 많은 인물과 관계가 등장하고, 한 템포 늦게 말하는 인물들 사이에 그 관계가 조금씩 풀려나가게 된다. 공간에 멈춰 있을 때나 공간을 떠날 때 인물들의 대화를 보며 그들이 가진 마음에 공감하며 빠져들 수 있었다.
인물들의 모습을 그리는 감독의 마음은 <최악의 하루> 속 소설가 료헤이의 입을 빌려 나타난다. 영화 속 소설가에게 기자는 왜 인물들을 위기에 넣어놓고 꺼내주지 않냐고 묻는다. 하지만 료헤이는 늘 그런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각자가 가진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고 이야기한다. 기자의 질문처럼, 다들 사랑의 위기 속에 빠져들지만 이를 온전히 풀어내는 순간은 한참 뒤에야 찾아온다. 그렇기에 아예 미숙하거나 아예 복잡해서 발생하는 위기들에서 오히려 다양한 사랑에 대한 위로를 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는 다섯 커플의 사랑을 소품처럼 모아둔 이야기이다. 사랑을 정말 끝맺는 과정에서의 한풀이를 머나먼 타국의 사람에게 잘 통하지 않는 언어로 털어놓는 폴란드 사람도 등장하고, 애매한 관계에서 길을 거닐다가 그 마음을 간접적으로 노래로 풀어내는 인디밴드 커플도 등장하다. 하지만 주제가 사랑인만큼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그 관계가 가장 깊거나 가장 얕을 때에 나타났다.
세연은 영수에게 방금 사랑에 빠진 상태이다. 그런 마음에서 바라본 순간은 평범한 술자리조차 얼굴이 붉어지도록 질주하는 모습이 아닌 소소한 담소와 눈빛 교환으로 구성된 꿈 같은 모습이 된다. 그에게 가진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영수의 작업실에 찾아온 세연은 소문처럼 그가 정말 남자를 좋아하는지 묻는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확히 돌아오지 않지만, 순수함과 열정이 섞인 그녀의 마음 표현은 빠르게 사랑의 순간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다른 영화 속 격정적이거나 능숙한 모습과 달리, 두 사람의 사랑은 서투름 그 자체이다. 컵이 깨지기도 하고, 엎지른 커피에 영수의 작업물이 물들어 버리기도 한다. 바라던 사람이 자신을 좋아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진 것처럼, 세연이 아마도 바랬을 사랑의 결말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과정이 진행된다. 그럼에도 그녀가 가진 마음은 그런 순간조차 마치 아름다운 추억인 것처럼 묘사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추억이 끝났을 때 남는 것은 오기와 분노가 섞인 시간이다. 오랜 사랑으로 그 끝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영화 속 다른 커플인 은희와 현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오는 이미 은희와의 마음 정리를 끝내고 다음 연인과 만나고 있지만, 은희는 다음 연인과 만나고 있음에도 현오에 대한 마음을 매조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현오에 차에 들어선 이후, 그녀는 음식점과 길거리에 현오를 끌고 다니며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공격한다. 처절하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그녀와 비참하리만큼 냉담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현오의 대화는 제대로 끝맺지 못한 마음의 질척임을 보여준다. 그러다 두 사람의 마음이 가진 경계를 풀어놓은 것은 산책의 시간이었다. 늘 독기에 찬 눈으로 현오를 바라보던 그녀도 잠시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터지던 마음을 추스른다. 이는 사랑의 결말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잠시라도 둘의 마음을 풀어지게 한다.
반대로 <더 테이블>에서는 대부분의 장면이 한 카페의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한정되어 그려진다. 자리에 도달하는 인물들도 결국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지금의 마음이 아닌 그간 가졌던 사랑의 기억에 대한 회포를 푸는 순간이 된다. 그리고 그때의 산책은 장면에서 벗어나 시작하는 인물들의 본격적인 마음이 오히려 드러나는 순간으로 표현된다. 총 네 쌍의 대화가 등장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남자 민호와 그를 기다렸던 여자 경진의 대화였다. 행복했던 하룻밤 이후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은, 이윽고 멀리 여행을 떠나가서 소식이 없던 남자에 대한 원망의 눈빛으로 이어진다. 대화가 멈추던 순간도 잠시, 남자는 몸이 멀어졌던 순간에 마음으로 그녀를 떠올리며 샀던 물건들을 하나둘씩 풀어놓는다. 매번 태엽을 감아줘야 돌아갈 수 있는 시계는, 떨어져 있음에도 기억의 태엽을 감으며 서로를 생각했던 순간이 다시 그들을 이어주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처음으로 여자의 얼굴에 핀 웃음꽃에 이어, 이전의 빨랐던 진도처럼 재회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결말인 남자의 집으로 향하는 산책을 시작한다.
<최악의 하루> 속 무명배우 은희는 하루의 산책에서 그 사랑의 질척임과 낯선 순간의 설렘을 모두 겪는다. 우선 그녀가 현재 좋아하던 인물과 과거에 좋아했던 인물 모두를 남산 산책로에서 만나며 사랑으로부터 멀어진다. 자신을 좋아한다고는 말하지만, 다른 사람을 동시에 찾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산책 속 연애와 그녀 때문에 너무나도 마음이 힘들어 찾아왔지만, 자신의 가정으로 곧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산책 속 연애가 겹치며 최악의 하루를 보내게 된다. 매 순간 거짓말을 통해 대화를 이어가던 은희는 그와 마찬가지인 사람을 찾게 되어, 신인 배우 현오는 스스로가 인기가 많다는 거짓말에 빠지고, 유부남 운철은 자신이 뒤늦게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거짓말에 빠진다. 그리고 그 모든 진짜같던 거짓말들은 엇갈리던 세 인물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며 해소된다. 현오와 운철이 은희를 두고 산에서 내려가자 그녀는 절망하지만, 오히려 현실의 거짓말이 깨지자 가상에서의 거짓말, 즉 그녀의 연기가 온전히 풀리게 된다. 처음으로 완성하는 독백에서, 그녀가 만들었던 거짓말의 세계에서 해방된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후련해 보인다.
그리고 감독은 은희에게 주는 결말을 중심으로, 세 영화 모두에 나타나는 사랑들에 대해 해피엔딩을 빌어준다. 마지막 한탄을 위해 남산에 올라온 은희는 두 끔찍한 남자들을 만나기 이전에 우연히 만나 길을 알려줬던 료헤이와 재회한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상대인, 서로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료헤이를 만난 은희처럼, 혹은 서로 알 수 없는 사랑 사이에서 줄타기하다 함께 듀엣곡을 부르는 <조금만 더 가까이>의 인디밴드 커플처럼, 그리고 처음으로 거짓말을 멈추고 진짜 사랑을 시작해보려는 <더 테이블>의 가짜 모녀처럼 인물들의 방황은 결국 해피엔딩의 순간으로 맺어진다. 물론 그 순간 또한 다음 방황으로 이어지는 산책일 수 있지만, 우선은 밝게 빛나는 달빛 아래에서의 아름다운 춤이자 근사한 선율이 깔리는 추억으로 그려진다. 세 영화를 통해 그렇게, 산책과 같은 다음 사랑의 순간을 걷고 싶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