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둘째의 사춘기 예약
곧 만 11살이 되는 둘째가 자주 짜증을 내고 감정이 널을 뛴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타고난 성격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다 말해서 알려주는 편. 얼마 전 아이는 울면서 몇 가지 고백을 했다.
여자에 대한 생각이 자꾸 생각나면서 그 생각에 더 빠져들고 싶은 욕구
하지만 그럴 때마다 드는 죄책감 (특히 엄마한테)
엄마도 여자인데 왜 여자에 대해 이런 기분이 느껴지는지 혼란
해야 할 노력을 안 하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
배워야 할 것들 배울 수 없는 환경에 처한 것은 아닌지 자신이 속한 환경의 제약에 답답함 (자신이 배우고 싶은 비행기 제트기 제작을 집안 식구들에게 배울 수 없다는 게 뭔가 억울하게 생각됨.)
아이는 엄마에게 먼저 말하고, 아빠에게도 말했는데,
엄마의 반응: 엄마에게 말해줘서 고맙다.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용기를 내 진심을 말해줘서 고맙다.
아빠의 반응: 원래 그 나이엔 다 그래. 정상적인 성장 과정이야.
아이는 아빠가 사용한 '정상(Normal)'이라는 단어에 큰 안정감을 얻는 듯했다. 아이는 요즘 아빠와 밤마다 많은 대화를 하고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
원래도 아빠를 좋아하고 따르는 아이긴 했지만, 스킨십을 좋아하는 아이는 스킨십을 아이만큼이나 좋아하는 엄마와 매일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손잡고 쓰담쓰담하는 '커들링(cuddling)'이 일상의 반이었다. 항상 엄마와 함께였다. 엄마에게 읽고 쓰기를 배웠고, 엄마와 함께 책을 읽고, 그림도 그리고, 공부도 하고,... 뭐든지 엄마와 함께 했다.
아이는 점점 나를 피하는 느낌이다.
아이가 아빠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엄마는 엄만데, 그래도 여자라서 가슴이 있다는 게 자꾸 신경 쓰여...
머릿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해주니, 때론 남편을 통해 다 전해 듣는 것이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같이 아는 게 좋다는 입장이지만, 겉으로 어른답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뿐, 내 마음은 조금씩 쏟아진 물에 종이가 젖어들어가는 느낌으로 서러워진다.
항상 내 주변만 도는 강아지처럼 다정하고 친근하던 존재가 키가 자라고 마음이 자라면서 한 발짝 두 발짝 떠나가는 느낌.
한 남자로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과정임을 첫째를 통해 이미 경험했다.
첫째는 둘째와는 좀 달랐다. 생각해 보면 작은 애가 태어나고 나서 첫애와의 사이는 내가 이미 많이 밀어냈던 것 같다. 아이가 나에게 매달리려고 할 때마다, 나는 아픈 무릎으로 작은 애를 들고 있기도 힘들어 아이를 밀어내곤 했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질투가 없고 동생을 많이 아껴주는 심성을 가진 첫째지만 많이 섭섭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둘째를 맡기고 첫째만 데리고 나들이 가는 노력도 하긴 했으나, 첫째가 첫째라서 적게 누린 것들에 대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은 항상 있다.
첫째는 감정이 격렬하게 널뛰는 시간을 막 지나왔다. 그 시간 동안 첫째는 둘째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말을 섞으면 싸움이 되니, 둘째 또한 겁을 먹고 형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최근, 둘째가 부쩍 생각이 많아지고 감정 표현이 달라지니, 첫째는 완전히 성숙한 성인처럼 굴고 있다. '엄마, 엄마는 빠지셔. 내가 얘 더 잘 이해하고, 잘 도와줄 수 있어' 이런 느낌. 둘째는 둘째대로 지금 막 혼란의 터널을 지나 온 형이야 말로 자기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사람이라고 생각드는지 부쩍 형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 한다. 원래 동생을 많이 아껴주는 첫째의 다정한 태도가 완전 복귀하였고, 형제 둘이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들들에게 점점 엄마가 필요치 않은 느낌.
아직은 뭔가 먹고 싶을 때 엄마를 필요로 하는 편이지만, 첫째는 이미 피자 정도는 혼자 구워 먹을 수 있고, 아이들은 점점 더 많은 일을 혼자서 알아서 결정하고 실행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손이 많이 가고 힘들었던 시절엔, 이런 날 - 아이들이 스스로 다 알아서 하는 날 - 이 오기를 무척 원하기도 했었지만 막상 그 날이 오니 마음이 시원하기보단 섭섭하다. 아들들의 마음만 생각하며 아들들이 점점 멀리하는 거리를 존중해 주려고, 내가 어른으로서 기꺼이 감당할 것들을 감당하고 받아들이려 하지만, 내 마음이 섭섭한 것은 섭섭한 것이다.
'내 아기'라는 존재가 완벽하게 사라지고 있는 느낌.
나는 '점점 성인이 되어 갈 아들'이라는 존재를 수용하고 그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좋은 관계를 이루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에 익숙해질 즈음에는 '결혼해서 가정이 있는 아들'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수용하고 더 멀어지는 거리를 감수하며 좋은 관계를 이루는 법을 새로이 익혀야 할 것이다.
때때로 감정이 완벽히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녁 먹고 선물도 받고 기분이 '업 모드'인 둘째가 와서 슬쩍 말을 붙인다.
엄마, 예전에 형아가 이랬을 때, 나는 사춘기 와도 절대 형아처럼 안그럴 거라고 엄마에게 약속했었는데, 막상 이런 감정이 나한테 오니까 내 맘 대로 안돼. 나는 절대 안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엄마 말 안듣고 싶고, 엄마하고 좀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 남자들끼리만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나도 생겼어. 엄마랑 더 이상 같이 시간 보내지 않는 것, 말 잘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이 많이 들었었는데, '자연적인, 정상적인 성장 과정'이라 내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더 이상 미안해 하지 않을 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되는 거 맞지?
'그럼 당연히 미안해 할 필요 없지'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