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밭 소작농에게 '크리에이터' 배지

브런치 스토리 정책 변화를 소화하는 중입니다

by 하트온

얼마 전부터 하트온 제 이름 아래 저 배지가 붙어 있더군요. 저는 "인문 교양 크리에이터"라고 심사 결과 분류가 된 모양이에요. 소설 에세이 칼럼 번역글 영어학습글 교육글 시까지 복잡 다양한 글을 산더미처럼 끄적거려 쌓아 놓은 입장이라 저는 사실 뭐라고 분류되어도 할 말이 없는 입장입니다. 또한 이 '크리에이터'를 주제로 글을 쓸 자격이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브런치 세계에서 인기 관심 대열에서 많이 벗어난, 더 이상 메인 페이지에 소개될 가치를 잃은 구석 뒷방 작가라는 느낌을 내내 받아 왔거든요.


2020년 9월에 브런치 작가 심사를 통과하고 글을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783편의 글을 발행해 온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저는 브런치라는 농장에 겨우 방 하나 얻어 내게 할당된 작은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외로운 외국인 소작농 느낌으로 글을 써왔습니다. 요즘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트렌디한 주제나 소재가 뭔지 감도 없고, 느낌도 오지 않는 그런 고립된 환경 속에서, 내가 가진 씨앗만 종류별로 성실히 뿌리며 작물을 키워온 느낌이랄까요. 키워 놓아도, 원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브런치 농장 주인은 나를 잊어버린 지 오래인 것 같고, 다만 나 스스로 이 일을 하고 있는 의미와 존재 가치를 거듭 상기시키며, 나 자신과 필요한 주변 사람들 먹이며, 매일 글농사를 짓는 루틴을 이어왔을 뿐이지요. 때때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며 갈피를 잃어도, 매일 농사일이 기다리는 바쁜 하루가 내 농사에만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물론 브런치 농장에 부는 변화의 바람을 저도 느끼곤 있습니다. 브런치브런치 스토리로 이름도 바꾸고, 뭔가 대대적인 정리 이미지 쇄신 작업을 하고 있나 보다 하는 느낌은 듭니다. 브런치 스토리 작가에 더해, 그 복잡 방대하고 어려웠을 심사 작업을 거쳐 일부 작가들에게 크리에이터 배지를 달아주는 이유는 분명 있을 테고, 기업 차원에서 목표하는 바도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내 이름 아래 달린 배지를 보며, 농장주가 나를 완전히 잊진 않은 게야, 미생의 장그래가 "우리 애라고 했다" 라며 울먹이던 그런 뜨거운 마음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크리에이터 배지'에 관한 여러 작가님들의 글을 읽어 보면서, 제 마음은 차츰 식어 가더군요. 이 새로운 등급 매기기, 응원하기 정책이 의도하는 큰 그림을 통찰하는 작가님들의 우려를 저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내가 '우리 애'가 되었다고 잠시 들떴던 따뜻한 공기가 풍선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제 마음은 더없이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받은 이 '크리에이터' 인증 마크가 정말 의미가 있을까, 잘 판단한 거 맞을까 바람이 새어나간 자리에 의구심이 자리 잡았습니다. 저런 글 쓰고도 인문 교양 크리에이터라고 할 수 있나, 브런치가 크리에이터를 잘못 선정한 예로 분류되어 금세 배지를 뺏겨버리지 않을까 조바심도 일었습니다. 내가 정말 '인문 교양 크리에이터'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내가 짓는 글 농사가 인증 마크 받을 제품이 맞는지, 스스로 인정하는 자신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자신이 믿지 못하는 배지는 아무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브런치 농장주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브런치 운영 기관의 목표와 나아가는 방향은 아직 선명히 가늠하긴 힘듭니다만, 그래도 모종의 결심과 결단은 꽤 강하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이 크리에이터 배지는 맥락이 있고 일관성이 있는 양질의 글을 정기적으로 꾸준히 올리라는 브런치 밭을 일구고 살아가는 소작농 작가들을 향한 지주 백작의 당근과 채찍이 아닐까에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이 생각에 이르자, 좀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왕 당근도 주려고 마음먹었으면, 좀 먹을 수 있는 당근을 주시지 싶었어요. '브런치 작가'라는 이름은 참 자랑스럽게 여기저기에서 소개 이름으로 사용할 정도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 크리에이터 배지는 완전한 내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에 도무지 입에 넣을 수도 없고, 삼켜도 소화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배지를 다는 것이 작가에 대한 신뢰도나 인지도를 상승시키는데 공모전이나 출판 프로젝트에서 입상하는 만큼의 효력이 없을 것 같다는 의구심도 한몫을 합니다. 소수에게 몰아주려는 방식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저 또한 여러 글 중에 하나, 여러 작가 중에 한 명을 고를 수밖에 없는 글 뽑기 책 뽑기 브런치 농장 생태계에서는 뭘 해도 소수에게 몰아주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소수를 가려내는 기준으로 이 크리에이터 제도가 효과적인 가는 아직 납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 소수 알곡 가리기 체질에서 항상 미끄러져 떨어지고 마는 입장에서는, 소수를 자꾸 가려내려는 농장주의 의지가 마음을 더욱 움츠려 들게 하고 뒷방 가라지로 만들어 고립시킨다는 두려움마저 마음 한편에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앞으로 어떻게 하면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는지, 크리에이터 선정을 얼마나 자주 할 건지 그 기준도 아직은 모호해 보입니다. 받은 입장도 혼란스러운데, 열심히 글쓰기에 매진하고도 받지 못한 입장은 또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고 불쾌할지 가늠도 되지 않습니다. 겨우 턱걸이로 받아 놓고, 감사한 줄 모르고 이런 글이나 쓴다고 운영진이 한심해하지는 않을까 소심한 마음도 동시에 들지만, 제 안의 불안과 우려를 글로 발산하는 행위를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실제로 작가에게 후원금을 보내 응원하기가 눈에 보이는 돈 액수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 액수가 결정하는 서열 구도가 만들어지면 브런치 분위기는 어떻게 될까,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그 위화감은 어떤 정도일까 상상도 못 하겠습니다. 결국 다른 플랫폼들처럼, 수익을 얼마나 올릴 수 있는가에 따라 분류하는 거대한 자본 서열 체계가 되고 마는 걸까, 아름다운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 푹 자고 일어나 즐기는 그 여유로운 브런치 시간은 사라지는 걸까 불안감이 자꾸 밀려옵니다.


아마 다 계획이 있으신 분들이 하시는 일이겠지만, 브런치 스토리가 오래 그 가치를 인정받는 작가 입문장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실력 있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충분한 기회와 너른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전체적인 체계를 잘 잡아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글 쓰는 이들을 위한 예쁜 브런치 플레이팅 초심으로 시작하여, 이렇게 작가들이 쓰기 편한 아름다운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 북 시스템을 만들어낸 브런치 운영진이, 브런치 농장 전체를 위한, 이 농장에 합류한 모든 소작농이 행복하게 글농사를 이어갈 수 있는 풍요롭고 효율적인 시스템도 구축해 갈 거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마음으로 믿어 보고 싶습니다.


특별히 대단한 의견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을 끄적여 지면을 낭비해 보았습니다. 크리에이터 배지를 받고 뭉쳐 밀려드는 감정과 생각들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카카오 회사 방침이라던가 사업화 방향 기업 철학 같은 것에 일말의 관심조차 가진 적이 없고, 크리에이터 배지가 무엇을 하기 위함인지 꼼꼼하게 읽고 야무지게 파악한 입장도 아니라, 갖가지 브런치 정책 변화를 장님 코끼리 만지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저처럼 잘 모르고 이해가 더딘 사람들도 선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리가 믿고, 일단은 기다려 보겠습니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RyanMcGu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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