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피폐한 내면의 반란

[자아 양육서] 전문가 도움 없이 하는 자기 마음 치유법

by 하트온


- 삐삐삐삐....


알람소리를 들었지만 현주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지 못해 계속 누워 있었다. 밤에 잠들기가 힘든 만큼 아침에 일어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직장인들처럼 거뜬히 아침보다 앞서 일어나, 땀 흘리며 운동하고, 군살 없는 탄탄한 몸에 물을 뿌리며 시원하게 샤워한 후, 모든 영양분이 골고루 들어간 건강 주스를 우아하게 마시고, 매일 가방과 구두를 바꿔가며 정장 쫙 빼 입고 세계를 주도하는 포스를 풍기며 직장 다니는 생활을 얼마나 꿈꿨었는데!


현실은 머릿속 로망과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 커튼도 없는 유리창을 통해 자비 없는 아침 햇살이 진군하고 들어와 아무리 일어나라 재촉을 해도, 최대한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다, 최소한의 시간만 남기고 일어나, 머리만 겨우 감고 눈에 보이는 대로 옷을 주워 걸치고, 퉁퉁 부은 눈은 어쩌지도 못하고 후다닥 집을 나선다.


차에 올라타고도 차를 출발시키기까지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직장에 갈 마음이 도저히 내키지 않는 것이다. 눈물이 솟구쳤다. 눈이 더 부을 게 뻔한데도 어찌할 도리 없이 눈은 빨개지고 눈물이 줄줄 흐른다.


나는 왜 괴로운 걸까.


이제 다 가졌는데. 변두리 작은 오피스텔이지만 필요한 걸 다 갖춘 자신의 공간이 있고, 소형 중고차지만 차도 있고, 무엇보다 다달이 적지 않은 액수의 월급까지 통장에 꼬박꼬박 꽂아주는 직장이 생겼는데. 그동안 하고 싶은 거 다 못 본 척하고, 친구들과 놀고 싶은 거 다 참고 억눌러가며 달려온 힘든 여정이 다 끝나고 진짜 주인공의 시간이 펼쳐질 참인데. 제 명의 통장에 자기 재산이 차곡차곡 쌓이는 편안한 삶이 열릴 참인데.


현주는 최근 새로 들어온 남자 직원 A까지 상사의 학교 후배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감정이 폭발하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자기보다 몇 학 번 아래임에도, 자신과 같은 직급에, 연봉을 조금 더 높게 협상하고 들어왔다는 것을 A가 제 입으로 떠들어 알게 되었다.


회사 사장부터 이어지는 같은 대학 라인 남자들이 언젠가부터 눈에 띄었다. 사실 모를 수가 없다. 자기들끼리 티 나게 챙기고, 티 나게 친하게 지낸다. 지난 주말에도 사장 포함, 그 라인 인간들이 골프 여행도 함께 다녀왔다며 자랑을 했다. 그들이 친하게 지내든 말든 상관이 없었으면 좋으련만, 현주는 그 단단한 유대가 직장 인맥에서 자신을 소외시키며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는 걸 가슴뼈가 아프도록 느끼고 있었다.


이용당할 대로 당하고 언젠가 내쳐질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온다. 아니 이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나 공포만이 아니다. 매일 회사에서 상사가 대놓고 학벌 차별인지 성 차별인지 도무지 모호한 차별을 쏘아대는 걸 견디는 일이, 그 집단의 은근한 멸시를 받는 일이, 그 불쾌감이 견디기가 힘들다. 하지만 현주는 자신이 느끼는 이 모든 감정이 어디서 오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자꾸 화가 난다고 느낄 뿐이다. 꾹꾹 눌러온 감정이 쌓이고 쌓인데 화가 불붙어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가슴을 지져대며 날뛰고 있다.


네가 효도할 차례다. 이제부턴 너에게 좀 기대고 살자.


지난 추석에 집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매달 생활비를 보내줬으면 한다고 명령하듯 말했다. 아버지의 이 말을 듣고 현주는 자신이 이 고통스러운 생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완전 봉쇄당한 느낌, 제 힘으론 꿈쩍도 안 하는 거대한 바윗덩이 하나가 자신을 가로막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자라면서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 두었던, 어린 시절 힘들고 서럽고 억울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 '학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술 먹고 난동을 부리던 기억. 함부로 자신과 엄마까지 손찌검하던 기억. 외가에 피난을 가면, 저런 아버지 피를 물려받은 저쪽 닮은 자식이라고 외가 식구들에게 얼굴 생김새 때문에 차별받던 기억. 살아남기 위해 잠시 '망각' 가동해 두었던 기억들이 살아나 위태로운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해 준 것 하나 없으면서, 나를 학대했으면서, 어쩌면 저리 뻔뻔할 수 있을까.'


나를 제대로 기르지 못한 부모. 내 마음을 한 번도 돌아봐 주고 알아봐 준 적 없던 부모. 내 마음에 큰 결핍의 구멍을 안고 살아가게 만든 부모. 그래도 내가 책임지고 경제적 책임을 져 줘야 한다고 당당히 요구하는 부모.


하지만, 현주의 내면은 이런 속생각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원망을 품자마자 '나를 낳아 먹여 길러준 부모'라는 사실이 주관하는 거대한 죄책감의 해일이 밀려와 가슴을 아프게 후려치듯 덮쳤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줘야 잠잠해질 해일이었다.


앞으로 부모에게 생활비를 보내줘야 하는 상황이라고, 그동안 입 다물고 있었던 부모 이야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터뜨리자마자,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 친구 민석이도 이때가 기회인 것처럼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던 제 가족 사연을 드러냈다. 막노동하는 아버지의 심한 술주정과 폭력, 늘 아버지 피해 도망 다녔던 삶 이야기가 시리즈로 쭉 이어졌다. 늘 학교에 도망가서 공부를 했다는 민석이는, 책상도 없는 단칸방에서 시작해 자신의 삶을 열심히 개척해 온 대단한 청년이었다. 현주는 제 남자 친구가 힘든 환경을 얼마나 멋지게 이겨낸 성실하고 바른 청년인지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현주는 민석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에 대한 마음이 급속도로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그의 이야기들이 자신의 아픈 상처를 극도로 자극했기 때문이었고, 그와 결혼하면 감당하기 힘든 부담스러운 부모가 네 사람으로 늘어나는 셈이 된다는 게 바로 계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 상황, 자신들의 진짜 배경을 지난 5년간 서로에게 입 꾹 다물고 말하지 않다가 지금에서야 급한 숙제 하듯 쏟아놓는 자체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와장창 박살내고 있다는 걸 현주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양쪽 다 등에 짐을 한가득 싣고 만나면, 서로 의지가 되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짐을 두 배로 얹어주는 결과가 될 거란 게 뻔했다. 그런 서로를 매일 보면서 숨 막혀 죽을 일상이, 어젯밤에 시청한 부부 문제 리얼 다큐 프로처럼 훤히 그려졌다. 이렇게 서로에게 짐을 더 얹어 주는 결혼은 하지 말자며, 적어도 등에 이런 부모 짐이 없는 사람 만나서 결혼하자고, 현주와 민석은 서럽게 울면서 헤어졌다.


부모에 대한 감정을 좀 속시원히 풀어 보고 싶어도, 죄책감 해일이 더 심하게 밀려올까 무서워 현주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몰라 그랬다는 불쌍한 부모. 이제 믿고 의지할 데가 자식 밖에 없다는 부모. 그래서 자식 미래를 좀 부수더라고 자기 앞가림부터 챙기고 봐야겠는 부모. 내가 더 불쌍한 건지 내 부모가 더 불쌍한 건지 판단이 안 되는 이 지랄 맞은 대혼란 인생이 앞으로 행복해질 일은 없겠다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민석이와 헤어진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지 싶었다.


직장 상사 동료에 대한 미움 분노와 부모에 대한 원망 죄책감이 함께 결탁하여 인생에 엉망진창 진흙탕 뻘밭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딜 가도 발이 푹푹 빠져드는 안전지대 없는 삶. 아무래도 처음부터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삶. 현주는 엉망진창 수렁 속으로 속절없이 점점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수시로 분노가 치솟는 걸 느끼면서 현주는 스스로가 아무래도 미쳐가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괴로운 감정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sas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