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풀렸(다고 생각했)고, 사회적 거리두기 등급도 낮아져서 아주 오랜만에 외출을 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평소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집-병원-업무 이유로 외출' 외엔 그닥 밖에 나가지 않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가끔 영화도 보고, 공연도 보고, 산책도 다니고, 친구들과 외식도 하던 번외 패턴이 아예 사라져 버리니 조금 답답하긴 하더군요.
그래서 어딜 가볼까? 고민을 하다가 박물관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연이나 영화관 같은 경우엔 아직도 조금 부담스러운 느낌이 없잖아 있고, 외식도 비슷한 이유로 자제하는 게 좋을 거 같았거든요. 그래도 박물관은 다른 장소에 비하면 언제든 한적한 편이고(특히 평일, 단체 관람객이 없을 경우엔 더더욱) 다소 붐빈다고 하더라도 내 스스로 관람 시간을 조절하여 한적한 상태에서 관람하는 것도 가능하며, 정 안되면 박물관 주변(일정 이상 규모가 있는 박물관 한정이긴 하지만)을 산책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처음엔 가장 자주 다녔고 익숙하고 편한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제 계획을 들은 편집자 리하가 서울 역사 박물관에 가보고 싶다며, 역 제안을 하는 바람에 익숙한 '국립 중앙 박물관'이 아닌, 처음 가봐서 모든 게 새롭고(그렇기에 다소 불안하기도 한) '서울 역사 박물관'으로 목적지를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인지라 사전예약을 (리하가) 하는 등의 절차가 필요하긴 했지만 큰 문제 없이 약속을 잡고 리하와 박물관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약속 당일, RPG게임의 능력치로 코하라는 인간의 능력치를 표기해 본다면 LUK(럭: 운) 수치가 바닥에 가까울 인간인지라 전날까지도 영상의 따뜻한 봄날같은 날씨가 갑자기 한파주의보를 동반한 겨울날씨가 되고 뜬금없는 눈까지 꽤 많이 내리긴 했지만.. 어쨌든 약속은 변함없이 유지되었기에 기대반 걱정반인 초행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가는 길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만, 5호선 서대문역사의 휠체어 리프트는 이해할 수 없더군요. 승강장에서 대합실까지의 엘리베이터와 대합실에서 역사 밖으로 이어진 엘리베이터 사이에 10개 분량의 계단이 딱 하나 존재하는데.. 경사로가 없어 고작 계단 10개를 오르기 위해 리프트를 반드시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휠체어가 지나다니기 위해 리프트를 가동하려면 매번 지하철 역사에서 근무하는 공익요원이든 지하철공사 직원이든 사람을 불러야 해서 매번 번거로울 게 뻔했고, 유모차를 끄는 부모 입장에서도 뜬금없는 10개의 계단을 만나면 당황스러울 거 같았습니다.
계단이 있는 곳에 충분한 여유공간이 없다면 경사로를 놓기 현실적으로어렵기에 어쩔 수 없었겠구나 하겠지만 그런 공간도 아니었습니다. 계단의 상하단 모두 꽤나 길게 길이 이어져있고 공간도 충분할텐데, 그렇게 리프트를 운용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더군요. 모르긴 몰라도 지나다니는 휠체어 이용자들이 꽤나 많은 민원을 넣었을 거 같은데.. 바뀌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구요.
어쨌든 ‘과거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가 휠체어 리프트가 떨어져 큰 사고가 날 뻔 했기에 휠체어 리프트에 트라우마가 있는 코하’는 의문만이 가득한 휠체어 리프트 구간을 무사히 지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역사 밖으로 나온 뒤, 이후 서울 역사 박물관까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갈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엔 모든 게 좋았습니다. 비록 갑자기 내린 폭설에 좀 고생하긴 했고, 그 폭설 때문에 리하가 지각을 했던 터라 꽤 오래 대기를 타야 했지만 '서울 역사 박물관' 자체는 편의시설도 잘 되어있고 해서 관람하는데 문제가 없었고, 그날 봤던 두 개의 전시회인 조선시대 한양의 삼군영에서 대대로 일했던 한 일가의 기준으로 그 시대의 군인들의 생활상을 풀어냈던 ‘한양을 지켜라’ 전시회나 1880~1980까지의 학교의 모습을 재현한 ‘서울학교 100년’ 전시회는 꽤 소소한 재미들이 있어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휠체어를 타게 된 이후, 그리고 혼자 다니게 된 이후로는 박물관이라는 장소를 자주 찾는 거 같습니다.
물론 어느정도 이상 규모의 박물관이라는 전제는 붙습니다. 개인이나 작은 단체가 운영하는 소규모 박물관의 경우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거나 관람하기에 좋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요.하지만 국립 혹은 시립 박물관 같이 어느정도 규모가 되는 박물관들은 꽤나 편의시설이 잘 되어있어 오가기 편하고 내부에서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덧붙여 국립중앙박물관처럼 주변 정리까지 잘 되어있으면 산책코스로도 이용하기 좋다는 추가적인 장점도 존재합니다.
제가 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휠체어를 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자주 박물관을 다녔을까? 생각해보면 인생은 참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바퀴가 있는 삶을 살기에 휠체어를 타고 이용하기 좋다는 이유로 인해 원래는 전혀 그런 쪽에 관심 없었을 인간이 나름 고상한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시 날씨도 추워지고 해서지금 당장은 추천하고 싶진 않지만, 코로나로 인해 계속되는 방콕생활에 지쳐있다면.. 조금 날씨가 더 풀리는 봄날에 가까운 박물관으로 산책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바퀴가 있는 삶이거나 혹은 바퀴가 없는 삶이라도 좋은 사람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일상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우린 비록 아직 코로나의 시간에 살고 있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