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하 Mar 12. 2021

기억하는.. 망각하는..

바퀴가 있는 삶 ep.14 (by 코리하 라이브)

열 네 번째 이야기: 기억하는.. 망각하는..

글: 코하

오랜만에 따뜻한 커피, 정성스레 내린 향이 풍부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 그라인더를 꺼내고 여과지를 찾고 한참을 씨름하다가 드립 커피를 내렸습니다.


사방에 퍼지는 향긋한 커피 향기에 기분이 좋아졌고, 커피 한 잔에 따라올 휴식을 그리며 잠시 행복했습니다. 막 커피를 컵에 따르려던 찰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고 그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을 팔다보니 커피를 내렸다는 사실조차 망각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발견한 것은 다시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었을 때였습니다.

어쨌든 커피를 마시고 싶어 주방에 가봤더니 커피가 한 잔 놓여있더라. 식긴 했지만 개꿀!.. 이었으면 좋았겠습니다만 사실 조금 슬퍼졌습니다. 물론 커피는 아주 잘 마셨어요. 비록 커피는 차갑게 식었고, 커피향도 모두 날아간 후였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변한 그 커피도 나름의 의미는 있었으니까요.

슬퍼졌던 이유를 내 마음이 내 것 같지 않기에 잘은 모르지만 그 커피를 잠시 잊은 시간만큼, 그 커피를 내리고 마시기를 앞두며 기대한 내 휴식과 행복이 날아간 커피의 향만큼 사라져버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커피를 내려 마시더라도 그 당시의 휴식과 행복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죠.

그리고 그때문인지 잠시의 건망증을 시작으로 기억과 망각에 대해 생각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살면서 잊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막상 그런 기억은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불킥을 부르는 개인의 흑역사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길 바라는 트라우마나 엄청나게 실패했던 기억이라던가..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기억들은 오히려 또렷하게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죠.

오히려 지워져버린 기억은 꽤나 행복했던 누군가와의 추억같은 것들이에요. 어렸을 적 처음 설렘을 가졌던 누군가의 얼굴이라던가, 사랑했던 순간에 잊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와의 한장면이라던가, 이별했던 순간의 싸늘해 피해버리고 싶었지만 사실은 영원히 담아두고 싶었던 누군가의 표정이라던가 말이죠.

인생은 왜 이리도 불합리 한 건지! 기억하나 마음대로 못하는 초라한 인간이라서 슬퍼졌던 걸까요?
하지만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기도 한 걸요. 다만 기억도 망각도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잠시 토라진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내 머릿속 지우개는 내 말을 듣지 않기에 영화의 비극만큼 거창한 비극은 아닐지 몰라도 수시로 날 찾아 소소한 행복을 방해하거나 중요한 기억 중의 한 장면을 가져가버리곤 합니다. 그것이 소소한 나의 비극이기도 하고, 그것은 또 슬프게도 명백한 노화의 증거이기도 하죠.

나는 서서히 죽어가면서 내가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기억을 남기고 내가 간절히 원했던 기억을 지워가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대부분의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현자가 되기보단 괴팍한 늙은이로 살아가게 되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말이죠. 결국 인생이 그런 것이라도 바라고 싶습니다. 순간의 건망증으로 뭉텅뭉텅 잘려나간 기억들이 망각행 열차로 모조리 쓸려가버리고 난 후에도 내가 나로써 버틸 수 있는 그런 기억 하나 쯤, 내가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이 세상에서 꽤나 열심히 살아냈던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웃을 수 있었다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기억이 트라우마로 발버둥치는 그런 기억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요.




<사랑을 했다. 기억하고 있다. 그 힘으로 살아간다.
  넌 이미 나를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준비성이 철저한 1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