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표
삶에 있어서 평가받는 삶에 익숙했다.
해야 할 무언가가 주어지고 그것을 제대로 해내서 칭찬을 받는데 익숙했다.
어릴 때는 특히 그 라인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고 성적을 받고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고 또 성적을 받고 아마 그 이후에도 그렇게 ‘해낼 수 있는 일’이 펼쳐졌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학 이후부터는 이미 주변이 점점 달라진다 다양해진다. 그때부터 아마 조금씩 어긋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가 똑같은 할 일이 주어져서 그것을 해내어 가면서 삶을 산다고 착각했었는데 사실은 삶에 있어서 꼭 해야만 할 일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어릴 때부터 해내 가며 칭찬받아온 것들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 그렇게 시스템으로 짜여서 정해진 일들이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삶의 방식도 길도 너무나 다양하며 한 가지 방식 하나의 어떤 삶을 이루어내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할 수 없고 각자가 각자의 삶과 인생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 그 속에서 정말 크게 길을 잃었던 것 같다.
‘해야만 할 것’을 이루려고 노력해 보아도 그 자체가 마음이 설레지도 뛰지도 않았고 삶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내 마음이 설레는 가슴이 뛰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하면 더 이상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세상은 그렇게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원래 세상이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나에게 '이런 것을 해내라고' 시킨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결과에 대해 기대하거나 칭찬해 주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뭐라고 할까 자신이 세운 목표와 그것을 달성한 뿌듯함 정도인데, 삶은 어느 순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니 결국 어떤 목표를 달성해도 그걸로 끝나지 않고 결국 계속 다음 단계로 넘어갈 뿐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입시는 너무나 쉬운 무엇일 수도 있다.
정확한 교과서가 있고, 시험 범위가 있고 그 안에서 공부를 하고 확실한 점수가 나온다. 끝도 있고 달성도 있다. 그러나 입시나 중고등학교의 공부의 형태는 삶의 형태와는 많이 다르다.
진짜 학문과 공부에는 끝이나 달성의 종착점이 없다. 어떤 분야, 어떤 학문도 그렇다. 실기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끝 지점, 도달점, 마스터를 하는 종착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요리이든 무엇이든 마찬가지이다. 어느 정도 레벨, 삶에 있어서 자신이 활용하고 살 정도의 레벨, 타인에게 서비스로 제공할 수 있는 프로로서의 레벨은 존재할 수 있어도 그 역시 제각각이고 어떤 뚜렷한 끝 지점이 없다. 모든 창작과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잘' 하고 '못한' 다고 했을 때, '잘' 하는 정도의 윗 끝지점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분야의 모든 지식을 모두 다 습득하고 모든 실기 분야를 완성하고 죽는 것도 아마도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조차도 거의 없을 것 같다. 그 불가능성 역시 명백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를 평생 판다고 해도 도달할 수 있는 깊이도 사람마다 다르고 경험도 다르다. 사실은 삶에도 지식에도 정답이란 없으며 더 깊은 탐구와 지식의 축적은 있을 수 있어도 결국 어떤 지식도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그 방향성과 틀 속에서 쌓아 올려진 어떤 렌즈일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고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돈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필요와 편의에 의해 만든 개념의 산물이고 이 돈은 저 밖에 있는 식물이나 동물이나 구름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다. 사실은 실제로 의미로서 처음부터 세상에 원래 존재했던 무엇은 아니기 때문이다. 태양빛이나 흙이나 물 등과는 다르다.
그리고 ‘해야만 할 것’이라고 느껴온 것들도 그 돈과 비슷한 개념이 아니었을까 한다.
삶에는 사실은 이미 주어진 목표도, 이루어내야만 하는 것도, 해야만 하는 것도 이미 주어져있지 않다. 자살이 존재하듯 생존마저도 선택의 영역에 들어간다면 생존조차도 해야만 하는 영역이 아니라 선택의 영역이 된다.
그러면 이 삶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것들을 하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은가? 삶이란 그래서 무엇이고, 이 삶을 어떻게 구성해가고 싶은가?
‘해야 할 것’이 사라진다면 그 자체는 커다란 물음이 된다.
그리고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가든 칭찬해 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애초에 이렇게 살라고 하는 이야기 자체는 어떤 사회적인 요구이지 근원적인 생명으로서 가진 요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슴 뛰는 일, 설레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영혼이 가지고 태어난 사명을 미미한 신호로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나누며,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