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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Jan 07. 2021

눈 오는 날엔 설피를 만들어 보세요

손수 설피 만드는 여자, 그게 나야!

2021.01.07.


지난 밤에는 폭설이 내렸다.

발이 푹푹 패일 정도로 많은 눈이 반갑기도 했지만, 온 도시에 내려앉은 설경은 마냥 즐거워만 하기에는 또 너무 많은 눈이었다. 


올해로 서울살이 5년차, 나는 이제 가뭄에 콩나듯 눈을 보던 고향에서와는 달리 이 예쁜 눈이 우리 삶을 얼마나 난감하게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내가 사는 곳은 가파른 언덕배기였다. 그 말은, 눈이 오지 않을 때도 가뜩이나 미끄럽고 넘어지기 쉬운 지형이라는 소리다. 


다시 말해, 눈이 오는 날에는 최선을 다해 집에 처박혀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세상 일이란 게 어디 사람 마음 먹은 대로 되던가?


식재료와 생필품이 다 떨어졌고, 병원에도 들러야했다. 솔직히 말해 당장 쓸 휴지 한 장이 있었다면 나도 많은 현명한 이들처럼 '방콕'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결국 불가피한 외출을 감행해야만 했다. 


자, 그렇다면 안전한 외출을 위해 무엇을 마련해야할까?

최저 온도 영하 16도, 최고 온도 영하 12도의 혹한의 날씨와 눈으로 뒤덮인 도시를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그 해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첫째. 따뜻한 방한 용품들

내복을 위아래로 껴입고, 두꺼운 스웨터와 모직 바지, 그리고 가진 것 중에 가장 두꺼운 패딩점퍼를 입었다. 모자를 썼고, 장갑을 꼈다. 흠, 좋아.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다.


둘째. 빙판길에 대비한 미끄럽지 않은 신발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등산화를 신어보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내겐 등산화가 없었다. 그나마 덜 미끄러운 신발로는 통기성이 좋은 여름용 운동화 한 켤레 뿐이었는데, 수 차례의 테스트 결과 이 신발은 쉽게 젖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신발을 젖지 않고, 덜 미끄럽게 만들 수 있을까?



내가 떠올린 것은 바로 설피(雪皮)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설피'는 눈이 많은 고장의 주민들이 겨울철에 신바닥에 덧대어 신는 물건을 말한다. 지표면에 닿는 면적을 넓게 해서 압력을 분산시키는 원리로 발이 눈에 빠지지 않게 하는 유용한 물건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산간지방의 사람들이 많이 착용했다고 한다. 그렇다! 산간 지방!

언덕배기에 사는 내게 너무나 필요한 물건인 것이다!!


설피는 영어로는 snowshoes라고 불린다. 보통은 테니스 라켓 같이 생겼는데, 위의 그림처럼 생긴 것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그렇게 정교한 물건이 아니다. 어차피 정말로 작동할지 어떨지 확신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단순한 디자인의 설피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재료는 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1시간 정도의 외출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는 튼튼해야한다.


내가 떠올린 가안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1) 계란판 설피

계란판의 울퉁불퉁한 면을 스파이크 삼아 아이젠+설피 효과를 누려보자는 발상이다. 계란판에 구멍을 뚫어 끈을 달고, 신발을 그에 연결하면 끝!

실제로 나는 이를 위해 30구짜리 달걀판을 주워왔지만, 이 안은 폐기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계란판이 스파이크 역할을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아이젠처럼 콱 박혀서 고정되는 것이 아니니까), 둘째, 계란판이 종이로 되어 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흐믈흐믈해져서 금세 망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2) 옷걸이 설피

그 다음에 떠올린 것은 옷걸이를 테두리 삼아 설피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옷걸이 역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고, 그래서 이상적인 설피 모양을 만들기에 적절해보였다. 사실, 옷걸이 말고는 테두리 삼을 만한 물건이 없기도했다. 베드민턴 라켓이 있었다면 그것을 활용했겠지만 작은 원룸의 1인 가장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내게 다른 안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고 나는 빨리 외출하고 싶었기 때문에 (병원 점심 시간 전에 가고 싶었다.) 곧바로 이 안을 채택했다.


만드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youtube에 how to make snowshoes를 검색하면 수천만개의 유용한 참고 영상들이 나오니 관심있는 분들은 꼭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나의 설피 제작기는 다음과 같다.


준비물: 옷걸이, 노끈, 노끈을 자를 가위


먼저, 옷장에서 쓰지 않는 옷걸이 둘을 꺼내어 구부렸다. 발의 모양에 맞게 길쭉한 마름모꼴로. 앞코는 눈을 헤칠 수 있어야 하므로 으레 다른 설피들이 그렇듯 위로 둥글게 구부려주었다.  스키나 눈썰매의 앞코를 떠올리면 좀 더 연상하기 쉬울 수도 있겠다.


다음으로, 노끈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 일정한 간격으로 매듭을 지어 테두리에 둘러준다. 마크라메라든가, 드림캐처를 떠올리면 쉽다.


그 다음은 바닥을 만들어줄 차례이다. 테니스나 배드민턴 라켓처럼 끈을 매듭과 매듭 사이의 구멍과 그 반대편 구멍과 이어지게끔 엮는 것이다. 애플파이의 파이 생지 장식처럼 와플모양이 되도록 엮는다.


마지막으로, 신발을 설피에 묶을 수 있도록 앞코와 뒤코에 각각 끈을 달아준다.


그러고 나면 완성!


완성된 임시 설피의 모습이다. 무척 조악해보이고, 왼쪽이 오른쪽보다 더 대충 만들었음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왼쪽을 오른쪽보다 나중에 만들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병원의 점심시간이 1시였으므로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다 만들어 놓고도 나는 좀 망설였다. 쓸만한 끈이 없어서 노끈으로 하긴 했는데, 이게 미끄럽지 않을 거란 보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 나는 과감하게 내 조악한 설피를 운동화에 묶었고 용감하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결과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노끈이 엉성하게 발목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매듭을 좀 더 조이는 등 수정 작업이 필요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 설피는 제법  쓸만했다.(놀랍게도!) 눈더미에 발이  푹푹 패이지 않았고, 그 덕분에 신발이 거의 젖지 않을 수 있었다. 


단점이 있다면 잘 구부러지는 옷걸이로 만든 탓에 잘못하면 모양이 쉽게 망가진다는 것. 이 설피의 수명은 한 시간이었다. 뭐, 한 시간이면 충분했지만! 혹시나 설피를 만들고자 한다면 좀 덜 구부러지는 소재로 테두리를 만들기를 바란다.

완전히 망가져버린 오른쪽. 위의 사진의 왼쪽, 즉 늦게 만들어서 대충 만든 설피의 최후는 이렇다.


또 다른 단점으로는 신발에 칭칭 감긴 희한한 빨간색 물건에 대한 시선집중을 꼽을 수 있겠다. 

당신이 그 시선을 즐긴다면 이는 단점이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질박한 창조품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꺼이 그 시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봐라, 세상 사람들아! 내가 바로 이 시대의 맥가이버다!



참고로 내가 설피를 만든 것에 대한 주변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 과거에서 온 사람 같다 

- 내 친구 신기하다 

- 야물딱지다 

- 완전 기발하다 

- 너는 언덕에 사니 도시형 아이젠 하나를 장만해도 좋겠다.


(맨 마지막 조언은 꽤나 그럴싸하다. 당신이 서울 한복판에서 아이젠을 차고 다니는 여자를 발견한다면 어쩌면 필자일지도 모른다.)






때론 예기치 못한 사건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발상을 떠올리게 하고, 그 발상은 당신의 삶을 편리하게 하거나 즐겁게 할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만든 설피가 내 하루를 빛나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평소에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며 지나쳤던 생각의 단편이 있다면, 그것을 꺼내어 우리 삶의 한켠을 장식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분명 당신의 일상적인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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