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서울의 봄> 리뷰
(* 이 글은 몇 달 전에 쓴 글을 다듬어 완성한 것이다.)
12.12 사태에 대해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왔다. 한국 역사를 다룬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아파서 보기를 망설이곤 했지만, 그럼에도 극장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어떤 분노는 기억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재미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고, 연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2시간 반이나 되는 짧지 않은 러닝 타임 동안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면서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탁월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감상할 때면 언제나 '역사를 왜곡하거나 악인을 지나치게 미화하지는 않을까?'하는 우려를 하곤 하는데, 적어도 이 영화에 한해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불필요한 자극 없이 그 당시의 무력함과 분노를 충분히 끌어내는 힘도 있다. <서울의 봄>의 탁월한 점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 '전두환'(극 중 이름은 '전두광')이 묘사된 방식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전두환과 같은 독재자에 대해 다룰 때, 우리는 부패에 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부패란, '정치, 사상, 의식 따위가 타락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타락이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을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할까? 흔히 사람들은 타락이 아주 거창한 계기에 의한 것이라고 상상하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타락은 대개 아주 사소한 이기심에서 자란다. 내 것, 내 밥그릇, 내 사람을 챙기고자 남의 희생에 눈감는, 그런 종류의 욕심 말이다.
'전두광'과 '노태건', 그리고 그들이 세운 '하나회'도 다르지 않다. 거창한 명분이 있을 것만 같지만, 그들이 그토록 활개를 쳤던 이유는 손 쉽게 힘과 지위, 명예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소위 그 당시의 '엘리트'를 자처하면서, 비슷한 욕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손을 잡고 삼삼오오 모여다니면서. 질나쁜 깡패들이 그러했듯이. 그건 '정석적이고 도덕적인' 길보다 훨씬 쉽고 간편했을 것이고, 이것이 그들이 기꺼이 타락했던 이유이리라. 그들이라고 어디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몰랐으랴마는, 어쨌든 그들은 그 모든 불의에 눈을 감다 못해 그것을 직접 이끌어 나가길 택했다.
하나회라는 카르텔에 대한 충성심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 집단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떡고물'이 먹음직스러웠을테니까. 다가올 이익에 대한 어떤 기대 혹은 약속은 마치 마법처럼 소속된 사람을 홀리곤 한다. 나치당과 히틀러에 현혹된 옛 독일의 국민들처럼, '우리'를 챙기고 '남'을 배척하는 사이 사람은 도덕과 정의에 무감해지고, 잔혹해진다.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를 챙기는 그들의 지극히 이기적인 이타심 속에 부패의 씨앗이 자라난 것이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다는 말이 있듯, 부패의 씨앗은 쉬이 자란다. 부패는 그것에 눈감거나 당연시 여기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힘을 얻고, 빠르게 몸을 부풀린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다다라서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고 만다. 이 사소한 부패가 모이고 자란 결과가 바로 전두광과 하나회다.
부패와 불의에 대해 논한다면 정의에 대해서도 논해야 마땅할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를 말한다. 다시 말해, 정의는 개인 간의 관계와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른 길'을 말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이유들에 의해 사람들은 너무나 손쉽게 이 '바른 길'을 벗어나고 만다. 정의를 지키는 것이 어려운 건 이 때문이다.
극중 이태신은 이러한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을 지키고자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부패는 너무나 하찮은 이유에 기인하고, 그래서 쉽게 눈감게 되니까.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탁월한 점은 '부패'의 멋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는 많은 영화 속 '매력적인 악역'에 열광하곤 하지만, 실상 악당은 '멋있지 않다'. 그들은 치졸하고, 추악하고, 저열하다. 전두광은 그 모든 멋없음을 아주 탁월하게 표현한 캐릭터다.
극 중 전두광의 '쿠데타 계획'을 한번 살펴보자.
전두광은 자신의 부패에 가담하지 않은 육군참모총장을 제거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명분 없는 혁명은 결코 인정받을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를 모함하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살해 공모자로 만듦으로써. 그러나 참모 총장은 그보다 지위가 높았고, 그를 체포하려면 더한 공권력이 행사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의 승인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또 대통령의 승인을 받으려면 일정한 절차를 통해 올려야 하므로 참모 총장이 그 사실을 모를 수 없게 되고, 그가 이 모든 일에 대비하게 되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그래서 전두광이 선택한 것은, 그 모든 절차와 상식을 무시하고 참모 총장과 대통령 승인을 동시에 받는 것이었다. 자신과 하나회의 인맥과 군대를 활용해서!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우악스럽고, 폭력적인 발상이었다.
계획만으로도 기가 막히는데, 계획을 이행하는 과정도 엉망진창이다. 한밤중에 대통령을 세 번이나 찾아가 떼를 쓰지 않나, 강경하게 나오는 이태신의 작전에 일희일비하질 않나. 치밀하지 못하게 세워진 계획 위에 하나회는 우왕좌왕하고, 학연, 지연, 혈연 따위로 끌어모은 권력과 병력으로 뚫린 구멍을 땜질하기에 바쁘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게 '먹혔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망설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이 전두광의 길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그 부패와 악의를 묵인한 대가는 처참했지만, 그때 그들은 그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알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나. 또 한편으로는 전두광의 악의가 너무나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시민과 아군을 기꺼이 인질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상식적인 사람이 '사람'보다 '정의'를 우선시하지는 못하리란 것을 알았고,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모든 사건이 일단락되고,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 전두광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며 승리에 고취된다. 그것은 그가 벌인 그 모든 일이 그 개인의 '배설된 욕망'에 기인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추저분스러운 환희였다.
영화는 노골적인 폭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폭력의 위압과 위협을 보여준다. 우리는 인물의 대사와 상황, 미장센을 통해 '평화와 친선'을 가장한 씬들의 이면에 강압적이고 우악스러운 폭력이 자리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면서 그 폭력을 미화하지 않고, 하찮고 추악한 것임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심각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 곳곳에서 활약하는 재치있는 유머들도 눈에 띈다. 악당들의 하찮고 치졸한 면면들을 풍자하는 그 장면들은 단순히 웃기려고 넣은 것이 아니라, 상당히 고심해서 넣은 영화적 장치로 보인다.
몇몇 반복되는 대사들을 포착하는 것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재미있는 방법일 것이다. 가령 아래 두 대사는 전두광과 이태신, 둘 모두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대사는 같지만 그것이 내뱉어지는 상황과 경위, 인물들의 생각이 달라 극적인 대비를 준다.
'니편 내편이 어디있습니까. 대한민국 육군은 모두 한 편입니다'
'가려거든 여기서 나를 쏘고 가라' / '쏠 거면 쏴라. 갈 길이 바쁘다.'
위 대사는 전두광과 이태신 모두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다르다. 전두광이 말하는 '우리(육군 등)'는 언제나 '나(전두광)'을 향해 있지만, 이태신의 '우리'는 그가 소속된 집단, 나라를 지키고 시민들을 보호하는 군 전체를 향한다. 같은 말을 해도 전두광은 과장되고 꾸며낸 거짓을 말하지만 이태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이 두 인물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러 의미에서 아주 잘 만든 영화다. 여러 번 곱씹으며 생각하게 된다. 내가 속한 곳에는 어떤 불의와 부정이 있을까? 나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 혹시라도 내가 그것에 동조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같은 것들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둘러보고, 더 바른 길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