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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ug 16. 2019

나에게도 너그러운 '기버'로 산다.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성공 법칙 

각오를 다져야 한다. 남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야 한다. 

세상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다고 말한다. 결정은 내가 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성공 법칙 - 




무엇이 '성공'을 가져다주는가를 가만 생각해 보자면. 

사실 '답' 이 없지만 그 답을 찾아가는 '시간'을 '나'의 세계 안에서 쌓아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성공 법칙'이라는 한 권의 책을 눈에 반짝하고 집어넣으며 어느새 손은 한 장 두 장 넘겨 가는 이런 시간들... 그리고 다 읽었을 때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의 기록들과, 적잖은 개인 경험을 섞어가며 자유롭게(?) 쓰는 이런 서평을 남겨 보는 이 순간들 마저도. 



이 모든 과정들이 결국에 '나'에게 '성공적인 충족감'을 남겨 준다면 

결국 성공적인 시간 아닐까? 예컨대 '오늘 좀 잘 지냈네!' 싶은 뭐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깨방정 가벼움과 동시에 어떤 '보람찬' 기분마저 든다면 일단 반은 성공... 더군다나 이 '글' 이 또한 그 언젠가의 조회 수 핵폭풍을 끌어당겨와 준다면 ( 맙소사. 아뿔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알라신이시여, 감사합니다....... )



결국 나는 글쟁이로'도'  살아 보며  동시에 무한 경쟁시대 자본주의를 사는 속물이기도 하다는 걸 

스스로 아주 잘 알고 있기에, 글에 대한 어떤  '조회 수'와 '어그로'와 '관종'을 무기 삼아 계속 더 좋은 글 - 이왕이면 '돈' 도 되는 - 을 쓸 힘을 만들어 내고 싶다. 그게 오늘의 내 '목표' 이자 그로 인해 얻어지는 '성공'을 위한 모든 내면의 '차크라'를 젖 먹던 힘까지 있는 힘껏...............! (결국 문장을 이렇게 끝마치고 마니, 아아 필력은 여전히 부족하여라)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성공법칙, 에릭 바커, 갤리온, 2018.06.04. p. 380


이왕 쓰는 사람의 삶을 살아 보겠다면... 무라도 잘라서 그 자른 무로 고등어 무조림을 맛있게 만들어 볼 마음..으로!



그럼에도 조금은 각 잡고 오른 검지를 턱 밑에 받치고 잠시 생각해 본다. 

'성공'을 만드는 비결에 대해서. 도대체 그 '성공'이라는 것. 반 고흐가 생에 '성공' 했다고 볼 수 있던가? 냉정히 따지고 보자면 그의 동생 '테오'가 있지 않았다면 그는 결국 후세에 '성공'의 반열에 들 수 있었을까? 하물며.. 그의 초기 작품들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금도 남을 만한 그런 예술 걸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가 그림에 소위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다면 우린 성공하려면 결국 '미쳐야' 하는가?  뭐.. 이런 질문들만 잔뜩.... 마음에 남겨보다가도 어떤 실마리가 보이긴 하다. 그 '성공'을 끌어당기는 '마법' 같은 삶의 '본질' 들을. 




성공을 만드는 비결은 순수하게 타고난 재능일 수도 있고 착하게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옛말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하는가?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하는가? 착한 사람은 꼴찌로 살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착하게 살아야 1등도 할 수 있는가? 


TV에서 보여주는 사례들이 성공의 전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공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가장 잘하는지 아는 것이며 주위 상황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진짜 미치광이가 될 필요는 없지만 미운 오리 새끼도 백조들과 노니는 호수에 갔더니 백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누가 아나. 내가 백조보다 더 예쁜 오리일지도! 우아한 꽥꽥....!




나만의 별난 짓을 여전히 사랑한다. 

키보드 위에 손을 얹기 전 꼼지락꼼지락 내 열 손가락을 쓰다듬는 다소 '변태'적인 스스로를 향한 사랑(?)스런 시간들,  그 흑한 눈으로 잠시 거울을 쳐다보며 씩 한번 웃어주며 (약간 소름) 혼자 중얼거리며 오늘의 '확언' 들을 일삼는 새벽의 시간, 오밤중에 혼자 읽고 쓰다 어느새 몽쉘통통을 까먹으면서도 동시에 새우깡에 손을 뻗어 그 단짠의 묘미를 느끼며 완성하는 원고들... (아 눈물) 드라마를 보다 어떤 대사 하나에 꽂혀 그대로 줄기차게 한 단락을 '휘리릭' 적어 내리곤 괜한 희열을 느껴서 히죽 거리는 새벽 세시의 키친 라이터 엄마... 설거지하다가 글감이 팍 하고 떠올라서 계속 기억하고 있다가 핸드폰 메모장으로 바로 손을 옮기는 날렵함, 회사 업무를 보다가 '메일' 하나를 쓰면서도 '작가' 빙의되어 문장 하나 사이다각으로 날려 주고 전체 회신 뿌리며 일터의 '작가'를 해 보기도 하는 (그러나 후엔 이불킥) 시간들, 따지고 보면 별로 '별난' 것 같지도 않을지 모르다만.... 나는 여전히 남들이 보기에 '어딘지 좀 이상한' 이런 나의 행동들을 아직, 사랑한다...



결국 사랑하니까.. 지킬 수도 있는 거다. 

그렇기에 사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조금은 이런 '별난 짓, 별난 생각'이 '성공'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저자의 '동의'와 어떤 '지지'를 받은 것만 같기에. 



내가 애써 없애려 하는 습관, 학교에서 놀림당했던 행동, 어쩌면 이런 것들이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나만의 장점일 수 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학교 교육제도는 한 분야에 열정이 뚜렷하고 그 분야에서 높은 지식과 능력을 갖추기를 원하는 학생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수석 졸업생들은 지극히 실용 주의자들이다. 그들은 군말 없이 규칙을 따르며, 깊은 이해보다는 성적표의 A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 학교에서는 규칙이 분명하다. 그러나 삶은 아니다. 따라야 할 노선이 불투명해지는 순간 우등생들은 고장이 난다. 



잎사귀도 여러 색깔일 수 있다는 것. 그렇다고 잎사귀가 아닌 게 아니며, 더 예쁠 수도 있다. 믿자.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안다. 냉정한 현실을. 피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에서도 부드러움을 장착해야만 '생존' 이 가능하고 나아가 '성공'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따라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고 다수와 개인이 추구하는 '괴리', 그 구멍을 메꾸려는 일련의 노력을 일삼는 실리적 행동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글 쓰고 책 읽고 이런 삶이 좋다고 하여 월급이든 양육이든 다 포기하고 절에 들어가서 글만 쓰며 사는 삶?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 오히려 '단절' 된 삶에서 어떤 결핍이 새롭게 생기며 그건 나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기에...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 다. 정말 '성공'을 원한다면. 

그래서 당장 먹고사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생존' 은 살아가는 데 필수이고 또 꽤나 중요한 '본업' 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거기에 더하여 스스로 걷고자 하는 길이 선명하고 꽤나 절실하다면. 방법은 단순하다. 그 길을 만들고 또 걸어감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내는 것.. 



자신의 시간에 공들여 스스로 만족할 만한 최선의 노력을 행하는 사람들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들에겐 결국 헌신이나 열정 같은 단어들이 자동적으로 붙는다.  하나 여기에서 '더 큰 성공'을 하려면 어떤 '미친 독기, 혹은 미치광이를 연상시키는 아웃라이어 기질' 도 배어 있다면..... 그야말로 모험생이자 모범생일 줄 아는 사람. 어쩌면 그 양면을 모두 고루 갖춘 이들이 성공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규칙을 잘 지키는 데 능숙한 수석 졸업생 류의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을 몇 배로 기울이면 된다. 그리고 이 길이 자신한테 맞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실함이 최고의 장점인 사람은 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다. 그리고 세상이 이미 정해놓은 분야에서 쉬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답이 정해지지 않은 세상으로 간 순간 그들의 삶은 아주 고단해진다. 실직을 하게 되면 성실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행복감이 120% 나 더 많이 떨어진다. 




반 고흐처럼. 그가 비록 알아주지 못하는 가난하고 실패한 화가로 '보였을'지언정. 

결국 그의 그림을 향한 성실한 모범생의 기질과 더불어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의 작품을 대하는 혁신적인 미친놈 근성, 그 양면에 '테오'와 같은 '지지자' 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공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누가 뭐래도 그림을 사랑했고 그림에 몰두하는 자신을 사랑했고 믿었다. 고흐는 고흐 자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생에서 유일무이한 가치였다는 것 또한... 그래서 그가 더 대단하고 존경받아 마땅한 건 다름 아닌 그의 '선택'에 따른 '책임'과 그 무게를 짊어지려 했던 용기 어린 '시간' 때문이겠다. 




아웃사이더, 예술가, 비 여과형 리더에 속하는 이들은 반대다. 남들처럼 성공하기 위해 엄격한 제도권에 순응하려 할수록 그들의 인생은 험난해진다. 본인이 가진 증폭제를 무작정 억누르다 보면 어색한 모습만 계속 보이고 스스로 그 독특한 장점마저도 부인하게 된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 다시 말해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이룬다는 것은 자신의 강점을 잘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할 일을 자신 있게 선택하고 그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차분하게 전진하면서 실제로도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그들의 비밀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잘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강점을 확실하게 알고 그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다.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것..



요즘 내가 푹 빠져 있는 '잘하고 또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편지 쓰기' 다. 

이미 상반기에 사 둔 100여 장의 편지와 편지 봉투는 여름이 돼갈 무렵 없어진 지 오래, 최근에 새로 장만한 편지지도 무려 1/3을 썼다.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뿐이다. 누구에게 얼마나 어떤 이야기를 이렇게 '주었단' 말인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는 그 시간을 스스로 그리워했던 건지, 아니면 정말 주고 싶었던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던 건지, 아니면 스스로 연초에 세워둔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건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요즘 '편지와 책 선물 기버'로 살아가 보는 중이다. (우편도 선불로. 착불이라면 진정한 '기버'가 아니지-!) 



물론 고백하자면 가끔은 나도 속물이라 돌아오지 않는 편지 답신으로 인한  공허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나 이제는 '주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진리를 생각해 보며, (물론 줄 때도 똑똑하게...) 애초에 단단한 기버로 성장하려 약속했으니 금세 그 감정을 놓아 버린다. 그렇게 다시 편지를 쓰고 쓰고 또 써 보는 시간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결국 이 시간들 모두가 나로선 생을 사는 기억과 추억의 일부분이고 그로 인해 내가 만족하고 상대방 모두 기분이 좋았다면, 적어도 '멍청한 기버'는 아니리라고 믿는.. 다. (흠.. 근데 누가 볼 때 나, 자꾸 주기만 해서 멍청해 보이나.. 모르겠구나) 




와튼 경영 대학원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성공 평가 점수에서 가장 꼴찌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봤다. 놀랍게도 퍼주기를 좋아하는 착한 사람인 '기버 giver' 들이 아주 많았다. (중략)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도 기버들이었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돕는 사람들은 성공 평가 점수의 바닥권에도 많았지만 정상권에도 굉장히 많았다.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려고 하는 '매처 matcher ' 와 언제나 많이 받으려 하고 주는 데는 인색한 '테이커 taker' 들은 중간이었다. 제일 꼭대기와 제일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기버였다. 


기버들은 잠깐은 큰 손해를 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기버들을 만나고 매처들의 보호를 받는다. 기버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하는 일이 잘 된다. 성공 점수의 바닥에서 꼭대기로 치고 올라간다. 



자기 잇속만 차리는 '테이커'는 정말이지 피하고 싶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잠시의 이득을 볼지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남을 등쳐먹을 궁리만 하는 것 같아서. 참고로 회사라는 업의 현장에서는 '테이커'가 많고, 발에 치이는 게 매처, 이 두 부류는 일상다반사다. 진정으로 '기버'를 만나는 귀인 같은 존재를 업의 현장에서 만난다는 것은 흔치 않다... 또한 반대로 기버 인지 테이커인지 매처인지를 '구분하는 혜안' 이 없으면 그마저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할 수 있다. 여기서 냉정하게 반문하기도 한다. '나'는 '너'의 시선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비치는지조차도... ('나'는 기버였으니 '너'는 테이커라 생각했을 수도 있을 테니. 그래서 사람 속 모르는 거다. '의도'는 '선의'와 어긋나기도 하니까) 



그러니 내게 필요한 건  '혜안'. 나에게도 너그러운 '기버' 로서의 혜안을 길러야 한다. 

결국 인생을 길게 보자면 사악한 테이커도, 어정쩡한 매처도 아닌, 진정으로 나에게도 너그럽고 너에게도 아름다운, 훌륭한 기버가 되어야 돌아오는 성공도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으니. 물론 조심할 것은 자칫하다가 남을 돕기'만' 해선 안 된다는 것. 자기 일을 잘 챙길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좋은 기버가 될 수 있고 또 존경도 받는 것일 테다. 



속 없이 주기만 하지 않는, 현명한 '기버'로 사는 이들은 결국 '힘'을 끌어당기게 된다. 

먼저 잘 보이고 협력할 줄 아는 기버들은 열심히 일하고 스스로에게도 보상을 한다. 필요하다면 그 행위들을 시의적절하고 센스 있게 생색낼 줄도 아는 이들일 테다. 왜? 결국 멀리 보니까. 너그럽게 용서할 줄 아는 진정한 '기버' 들은 삶에서 쾌락만을 중요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서 또한 힘을 찾고, 때로 그것을 위안 삼아 자신 내면의 더 큰 힘을 쌓아 내려가기 때문에. 조금 과장 보태서 말해 보자면 진정한 기버들은 살면서 고통마저도 더 큰 무언가를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이면서 묵묵히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며 자신의 무기를 갈고닦으며 묵묵히 길을 걸어 나간다.  



난 이제 꽃다발을 '다' 주지 않기로 했다. 일단 내가 만든 꽃 한 송이를 건넬 줄 아는 기버....로.... 일단..



내가 진정 바라는 '기버의 삶' 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어제오늘 보낸 몇 통의 편지와 책이 담긴 소포, 내 옆 동료에게 건넸던 칭찬 한 마디, 부당한 사례에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걸 깨고 '아닌 건 아닌 겁니다'라고도 (또 기어코 지랄을) 쫑알 대 본... 쓰린 시간들, 아이들을 향한 무한 반복되는 일상 속 보듬고 키우고 살리는 일련의 과정들, 틈새 독서와 틈새 글쓰기, 이 모든 시간들이 어쩌면 내가 내게 '주는' 이야기 선물들이 아닐까..... 하는 자기 합리화로 '오늘' 만큼은 내가 나에게 위로를 건네 본다. 



무엇을 나의 스토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방향에 지금의 스토리는 도움이 되는가. (중략) 우리가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세상사에 관한 스토리, 그것이 우리 인간의 정신에 깃드는 의미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운명을 믿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삶의 의미, 즉 스토리는 우리가 고난을 이겨내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스토리에 따라 세상을 바라본다. 나의 하루가 어땠는지, 배우자와 어떻게 만났는지를 물어보면 무슨 말을 할까? 이것이 스토리다. 살다 보면 직장에서든 개인적인 일에서든 우리에게는 무수히 많은 일이 생기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스토리를 만들어 그 일을 설명한다. 




'나'라는 '사람책'을 만들어 가는 이 시간, 

나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려 하기에 무엇에 가장 시간을 쏟아내야 하는가. 무엇을 제일 해야 할까. 오늘의 작지만 무모한 여러 울적한 방황들은, 한때의 미친 짓이 만들어 낸 나만의 이야기들에 그치고 말 텐가. 아니. 아니었다고... 나는 이 모든 시간들을, 살아 숨 쉬어 행하는 모든 일련의 시간들 속의 '내가 바랐던 미친 짓' 들이 결국 오늘의 내 인생을 만들어 내고 나아가 내일의 삶을 보다 좋게 만들어 준 '증폭제'가 되어주었노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어제보다 조금 더 도약해 보려 한다. 조금은 더 나에게 너그럽게, 그리고 되도록 화해와 용서를 사심 없이 건넬 줄 아는 아름다운 '기버'로..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이 흔해 빠진 말이.

사실 얼마나 무서운 힘을 담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결국 오늘의 '생각'을 행동의 선행으로 볼 줄 알고 마음에 품은 생각을 보다 아름답게 가꾸려 할 것이다. 책도 말하지 않았던가. '남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야 한다'라고. 남들이 정한 경계선만 따라 움직인다면 결국 영원히 그 남들이 바라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 조금 덜 휘둘리고 더 나 다운 선택들과... 시간을 만들기 위해, '오늘'이라는 시간에 부여된 여러 개의 '이름' 들에 최선을 다해 볼.. 뿐이다.



 '엄마, 딸, 며느리, 누나, 아내, 동료, 작가, 친구...' 뿐 아니라 

그 모든 걸 다 벗어던진 민낯의 '나'에게도. 솔직하고 너그러운 시선을.. 건네려 하는 오늘이다. 



오늘 내 민낯은....'조금 더 사랑받고 싶어'라는 목소리를 가진 연약한 사람이라는 걸, 그는 알까.



#아직도_너무_솔직해서_탈이지_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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