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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14. 2020

나는 '일'을 왜 하는가

과거의 내가 열심히 해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내가 두려워하지 않아야 미래의 내가 더 좋은 기회를 얻으리라. 

현재의 내가 누군가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나다. 

미래의 나요, 현재의 나에게 고마워하길.


- 출근길의 주문 - 






- 집에서 쉬면서 살림만 잘해도 남는 일인데 넌 왜 자꾸 그렇게 힘들게 일 하려고 해?




화살촉 같은 친정엄마의 문장에

나는 그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을 뿐. 그것이 유일한 진심이었고, 그 마음밖에 생각나지 않았기에. '육아 지지자'인 친정엄마의 존재 덕분에 비로소 새벽 댓바람부터 출근을 할 수 있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의 현실 덕분에. 누군가 내게 '일을 왜 해요'라고 묻는다면, 심연으로부터 떠오르는 가슴과 뇌 깊숙이 박히는 '문장'을 스스로에게 답처럼 말하곤 한다.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엄마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딸은 당신이라는 여성 앞에 여전히 당당한 딸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 아울러 당신을 포함한 나의 소중한 이번 생에 연결된 직계 가족 관계를 거친 세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당신이 낳은 '나'라는 육신과 심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 몸과 머리를 '노동' 시키는 것이라고. 하물며 내 배 갈라서 나은 나의 새끼 두 명을 삭막하기 쉬운 이 세계로부터 조금 더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그러니 계속해서 읽고 보고 쓰고 말하고, 조직에 소속되어 노동(일)을 하며 돈을 벌어 물리적 경제력을 유지하고 계속적인 '공부'를 통해 '사유' 할 줄 아는 '어른' 이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칫 보기에 거창한 이유들의 나열 일지 모르나 결국 핵심은 이것. 



어느 한 곳에 함몰되거나 안주하지 않으려는 분투력이 나로 하여금 '일'을 하게 만든다는 것. 

20대엔 사실 '일'의 가치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이 1도 없다. 부끄럽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20살 때 계약직 아르바이트로 4년 내내 각종 다양한 알바를 달고 살았던 내가 25세에 첫 사회 초년생이 되어 '정규직' 딱지 달고 월급쟁이를 시작하던 그 순간까지도. 나는 단순히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이라는 것을 받는 어느 정도의 '타인들이 정해놓은 기준의 상위 계층'에 높이기 위해 '연봉 높은 월급쟁이'가 되고자 했었다. 그게 다였고 그 목표는 꽤 선명했다. 



젊었고 치기 어렸고 '나'만 알았던 이기적인 나를, 요즘 많이 반성하곤 한다.. 반성이 되기에 다행인 '요즘' 이기도. 




단편적이고 지극히 단순한 '노동을 하는 이유'에 '돈'을 끌어다 놓으니 그것은 나를 그럴싸하게 만들었다. 

1억이라는 나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동소득'을 쟁취하고 유지하려 했고 소득을 부풀리기 위해 공부하고 투자하고 자산을 스스로 관리하려 노력했다. 소위 말하는 '몸값 높이기'를 위한 자기 계발도 가열하게 해냈음을. 그 치열했던 과거 10년을 나는 인정한다. '일'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달렸던 그 원시적인 열정을.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내 환경설정은 변했다. 꽤 철저하고 선명하게. 

기혼 제도에 들어가 나의 직계가족이 아닌 남의 직계가족들을 챙기는 과정 속에서. 아울러 다둥이를 양육하며 일을 하는 '워킹맘'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달기까지. 30대 후반에 접어든 요즘, 나는 '노동'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 만다. 고민에 빠지고 좌절감이나 어떤 열패감마저 느끼곤 한다. 십수 년을 근무한 현재의 일터는 '직주지'라는 최고의 곳이기에 적잖은 만족과 감사함을 느끼며 출퇴근을 병행하는 중이다만, 그럼에도 나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마는 걸 스스로 감추지 못한다. 요 근래 일터의 분위기 상 곧 도래할지 모르는 '고용불안'으로 구조조정 1순위에 드는 '환경'을 다 갖추고 있는, 객관적인 나의 모습 또한 냉정하게도 인정하기에. 



한 시간이라도 육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 '실행'에 박차를 가하는 요즘이다. '아웃풋' 을 위해. 

그리하여 어제부터 요 며칠 동안, 짧지만 굵게 커리어 워크숍 및 디지털 마케팅 교육을 받기로 결정. 다행히 선발되는 대상자에 한하는 단기 교육 과정에 합격, '커리어'에 대한 생각을 각자 또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사연들을 가지고 계셨던 여성들과 '일' 관련된 워크숍을 나누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알 수 없는 어떤 공감 및 위안, 한편으로는 좋은 자극과 동기부여를 느꼈다. 



한편으로의 '위기' 마저도 느끼며 계속해서 '아웃풋' 을 내야 한다는 '절실함' 이 앞선다. 

결국 세상은 냉정하고 '나' 라는 사람을 '증명' 해 내려면 그에 부합하는 가시적인 '성과'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기에...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말' 만 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기에. 반대로 내가 그 '말' 만하지 않는 사람임을 증명하려면 '성과' 가 필요한거다. 



사랑하는 '일'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지만 조금 더 '도전' 해 보려 한다. 그 사랑을 아웃풋으로 만들 '분투'를 지니며.




여성의 '커리어'는 불확실성과 복잡성이 교차한다. 

워크숍 내내 '일'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각자의 일은 소중하다.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행하는 모든 '노동' 은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직의 단편만을 떼어 놓고 보았을 때 그러나 그 '각자'의 '일' 중에서 일을 잘하는 '방법'만 따지면 여성이나 남성 등 젠더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만 결국 사회적 문제는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채용, 승진, 급여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시스템과 문제들... 또한 문제는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문제라는 것 또한 누군가에게 고질적인 '문제'라는 것. 



고용주가 '남성'을 '더'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환경' 들이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좌절하듯 나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마는 현실을. 아이가 있는 여성은 배우자 (남편)처럼 풀타임 근무를 해도 결국 육아와 가사에 할애하는 시간이 상대방보다 약 주당 9시간이나 더 많다고 했던 어느 미국의 통계치가 문득 떠오른다. 결국 1년이면 대략 풀타임 직장 3개월 더 다니는 것과 같고 이것이야말로 남녀 간 임금격차의 핵심이라고. 결국 같은 조건(?) 하에서 성장해 비슷한 교육과정을 거쳤어도 출산 적령기에 아이를 낳으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집에 머물러야 하는 현실. 



신은 우리에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을 '여성에게만' 부여했으니. 이것은 결국 신의 계시이던가. 

나는 가끔 신을 원망하곤 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을 양성에게 부여했다면 이런 아이러니함은 없어졌을까. 이러저러 상상 끝에 도래하는 현실을 나는 피하지 않기로 한다. 결국 주양육자가 필요한 환경 상, 나는 그이보다 적은 연봉을 버는 오늘의 현상을. 이건 하물며 감사한 현실이라는 것 또한. 배우자와 비교되는 연봉 조차 '없어질지' 모르는 위기감 또한 마찬가지로 인정. 




바깥일이 되는 것은 안의 일이 평온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그래서 물리적 심적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나는 다만 누군가 나에게 '일을 왜 해'라고 물었을 때 내 속에서 튀어나오는 이 선명한 문장을.

그 안에 담긴 의지와 분투력을 상기해볼 뿐이었다. 서울숲역 근처에 위피 한 어느 멋진 코워킹 스페이스에 위치한 건물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지만 사뭇 진지하고 남다른 '각오'를 스스로 해내며. 새벽녘, 일부러 한 시간 일찍 도착하기 위해 현관문을 나가 지하철을 타며 서서 가는 내내, 나는 이 생각만을 움켜쥐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험한 세상에 나의 비빌 구석이 되어 준 '엄마'처럼, 나도 누군가의 (아이들의 혹은 나의 가족 구성원들에) 비빌 구석으로서의 지지자가 되고 싶다고, 또한 되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적 심적 물리적 독립성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여성인 '나'의 자아에 감사한다. 친정 엄마의 말대로 '집에서 가사노동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그것에'만' 몰두하고 싶지 않은 이런 나를... 



어떤 노동의 형태든 그 '일' 은 결국 '나'를 보다 성장시키고 말미에 '아름다운 시간'을 남겨줄 것이라고.

돈이 되지 않는 가사 노동과 같은 그림자 노동이든, 조직 내에서의 노동 소득이든 언젠가의 사업 소득이든, 혹은 불로 소득이든,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의 의미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나는 알고 있기에. 그것들이 '나'를 지켜주고 결국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반대로 지켜줄 수 있는 '무기'와 '힘' 이 되어줄 수 있다고 믿으며. 




그래서 더더욱 포기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 은 나에게 지금 이것뿐인 것 같아서.  




출근길에 나도 누군가처럼 주문을 외웠다. 

손에는 '출근길의 주문'을 가지고 노트북을 바닥에 내려놓고 책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위기는 누군가에게 기회고, 나는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힘을 지금 만들고 있다'라고... 너희 둘을 위해. 여전히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쌍둥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울러 이런 '딸'의 분투력에 갖은 잔소리를 하시면서도 '걱정'을 아낌없이 하며 '지원사격'을 해 주고 있는 또 다른 가사노동의 현장에 있는 또 한 명의 사랑하는 여성, 나의 친정 엄마를 떠올리며. 



나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해 본다. '일'을 하는 '나'를. 

돈이 되는 일이든, 돈이 되지 않는 좋아하는 일이든, 어떤 상황이 닥친다 해도. 절대. 절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재능과 능력이 나라는 사람의 내면에 여전히 잠들어서 이제 막 눈을 뜨려 할 뿐이라고...



이 사진, 부적처럼 가지고 다녀보기로 했다. Open Heaven.... '언락'의 자세로. 




#고마워요_엄마...고마워_쌍둥이들_고마워_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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