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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15. 2020

권고사직을 통보받았다.

퇴사 D-14일. 

어떤 길에도 미래를 열어줄 문은 분명 있을 테니까. 


- 일곱 개의 회의 - 





- 잠깐 이리 와 봐, 할 이야기가 있어. 




친정부모님의 양육지원이 끝이 나고 두 분의 귀가 후 그이와 아이들과만 남겨진 금요일 저녁 8시.

선뜻 먼저 말을 꺼내는 그이의 표정을 보고 나는 예감이라는 걸 하고 말았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기에. 내가 여자는 여자이던가. 여성의 촉이라는 것이 금세 날카롭게 발동하는 것을 보면. 내 어리숙한 예감은 틀리기를 바랐지만, 결코 바라는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는 걸 다시금 믿게 되는 순간이었다. 




- 김 팀장님이 날 찾아오셨더라고. 나한테라도 먼저 말해야 전달이 빨리 될 것 같다 하면서. 지금 휴가잖아. 

-....

- 마흔몇 명 추려낸다고 하더라.

- 예상은... 했어. 

- 응... 오히려 홀가분하잖아. 잘 됐지 뭐. 거기 남아봤자 계속 침몰하는 배잖아. 능력 있으니까 어디든 이제 좋아하는 일 찾아가. 아니면 글에 매진만 해도 좋고. 

-..... 고맙네.. 그런 말 해 줘서. 

- 근데.. 시간이 좀 아쉬워. 2월 말까지 다 정리해야 된대. 

-... 그렇게 빨리? 

- 그렇다네. 회사가 참... 그렇지. 이 주 정도밖에 안 남았대. 면담 필요하니까... 아무튼 연락해봐 

- 앞으로 14일... 아니 워킹데이 10일. 근데 나 교육 때문에 회사 나갈 수 있는 날 그럼 5일인데.... 

- 그러게... 시간 배려 없지. 이게 참 회사에 충성해도 결국 막판에 취급이 좀 그렇지.... 기운 내. 괜찮아.  




시간이 흐르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가령 배우자의 '연민' 그로 인한 '사랑' 같은 것들. 

그이의 차분한 목소리 속에서도 같이 분노(?) 하고 슬퍼해주는 식의 문장들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주저앉아 울었을 것이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공식적 통보가 아니고서야 일만 하는 내가 알 턱이 없으니. 다만 누군가 나를 '위해' 얘기해주셨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걸까. 현 소속 팀장과 그이는 같은 회사 같은 사업부 소속 팀장직이라 서로 아는 사이였고 적잖은 업무적 교류 탓에 급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입장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사실은 '충분' 하진 않았다. 어떤 이해도, 어떤 단어들도 어떤 문장들도... 순간 국어 바보가 되어 버리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한국어 이해 못하는 바보...



그 바보는 자꾸만 숨으려 한다. 이불속으로... 내면엔 그렇게 숨으려 하는 자아가 존재한다. 



몇 주 전, 희망퇴직 프로그램이 사내에서 다시 돌고 있다 했었다. 

그 후보에 끼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나름 일 잘하고 계셨던 사업부의 대표는 급속도로 사내의 이상한 논리(?)에 의해 바로 교체되었고 (일터는 그러하다. 잘하고 못 하고의 인사 정책으로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기도 하다) 그를 보좌하고 있던 개발 팀장이었던 그이는 급으로 일어나는 회사의 모든 이러저러 그러그러한 인사정책과 흐름에 쌓여 있던 적잖은 분노와 애석함과 슬픔과 아쉬움을, 교묘한 타이밍의 러브콜로 인해 한 방에 봇물 터뜨리듯, 현실을 끌어 앉고 수용한 채 그대로 기회비용 마이너스를 감수하면서까지 이직을 했다. (직주지 포기, 초장거리 출퇴근, 평일 아기들 보지 못함, 등등 등등) 



나는 넌지시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곧 떠밀리듯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 이후 나는 어떤 '각오'와 현실 대처 및 대안 등등을 찾으려 했다. 나름의 급속도로. 아주 짧지만 '일'이라는 것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고 여전히 가지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을 해내고 있었고 여전히 해내는 중이다... 어제오늘의 커리어 워크숍도, 곧 차주에 도래할 브랜딩 마케팅 분야의 힘든 교육들도. 그렇게 시간을 '투자' 하듯 '소비'하면서 되도록 흔들리지 않는 나를 찾아야 한다는 걸 무의식에서 의식 밖으로 꺼내려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입사 13년 차 만에 처음으로 경력 타임라인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중이다.

소위 '이직'이라는 최선 혹은 최후의 보류, 아니 그 어떤 이유이건 간에 나의 경력을 '보이는 이력서'라는 서류를 정제된 텍스트로 매만지면서도 한편으로 내게 앞으로의 '일'에 대한 '터닝포인트'를 생각하자니 사실은 선명하게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감사하게도 '탁월한 인재'라고 평가해 주시기도 하지만 (출간 작가, 긴 경력, 문서 활용도, 외국어, 나름의 자산 보유, 보유 지식, 채무 없는 내 집 마련자.... 등등의 좋아 보이는 스펙들로 인해....) 사실 나는 자신감이... 계속 없어지려 하는 중이었고 (왜인지는 모르겠다만) 오늘은 드디어 그 없어지려는 자신감에 선명한 획이 하나 그려지듯이 '권고사직' 통보 덕분에 스크래치 한 줄이 북북 그어지는 느낌이었다. 



나 답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편으론 내 안엔 여러 모습들이 존재하니 그 모습들도 그저 사랑.....으로 품어주리라고.. 다짐을.. 한다




사실은 열패감 때문이었으리라. 

패배한 듯한 실패자라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은 그게 아니지만 잠깐 그런 것 같이 느껴졌기에. 제 발로 나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통보에 의해 떠밀려가는, 휘둘리는 느낌 때문에. 그것도 14일이라는, 단 이주도 채 남지 않은 짧은 기간 내에 '정리'를 해야 하기에. 그야말로 급속도로 떠내려가는 느낌.... 그런 느낌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면 어떤 식으로든 이용당한다는 것을. 

악의가 없이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일터'에서 오래 일을 하면서 경험했던 사례로 추정컨대, 나의 이 흔들리고 나약하며 물렁물렁하게 짓눌리는 이 감정을, 그이와 친정식구 이외의 그 어떤 조직 인간들에게 섣불리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한편으로 참 물러 터진 여린 캐릭터의 나는 떠오른 몇몇 좋은 동료 (라고 믿고 있는 회사 동료) 들이 생각이 났다. 그들에게 알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강소주 반 병의 힘을 빌려 나는 잠시간의 고백을 단톡 방에 알렸다. 회사에서 만났지만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우리 독서 모임 멤버 동료들에게만큼은...



울면서 타자를 치는 비루한 나를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내심 지질한 내가 상상이 되었던 걸까. 짧고 굵게 권고사직으로 인해 곧 급히 퇴사를 하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내니 따로 개인 톡을 날려 주었다. 회사가 예의가 없고 자신이 화가 난다는, 나름의 사려 깊은 위로를 보내려 하는 후배 동료의 메시지를 읽으며.... 나는 남은 소주 한 잔을 한 번에 입으로 털어 버리며 고맙다고 말을 남기는 게 다였다. 그것밖에 할 말이 없었고 딱히 더 보탤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소주가 쓰지 않은 건 왜일까 싶었고. 



판도라의 상자를 기어코 봤을 때의 '쿵' 하는 떨림. 그것도 결국 시간 지나가면 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러하다...



퇴사까지 앞으로 이 주일. 

앞으로 약 10일 정도의 시간 동안 퇴사 준비생이 아닌, 권고사직을 통보받은 퇴사 예정자로 나는 매일 글을 쓰고자 한다. D-14 따위의 고루한 카운팅을 앞에 달고서. 이 엄청나게 생생한 글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 와중의 작가의 탈을 쓴 '똘끼'와 동시에, 사실은 막무가내로 밀려오고 마는 지질하고 후진 찐 감정들을 적당히 승화시켜 이성을 겨우 되찾으려는 최선이자 유일한 무기는, 현재의 이런 나에게는 다름 아닌 '글쓰기'라서.  



팀장과의 면담 때 부디 감정에 북받쳐 눈물만큼은 절대 흘리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나 진짜 막 찌질각이면 어쩌지 싶고) 퇴사 전후의 행정 처리들과 그 이후의 '퇴직금' 대한 활용은 어찌할까라는 섬광같이 짧고도 진한 현실적 고민들이 스쳐가면서도. 



주말에 책장을 사거나 집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작은 서점을 차린 것이나 다를 바 없이 쌓여 있는 책들을 가져올 고민을 하면서..,

왜 친정 엄마가 수시로 가끔 온 집안을 청소하려 뒤집고 엎고 난리를 치셨던 이유를, 나는 알 것만 같았다. 엄마도 그때 어떤 혼란스러움이 있었을까. '정리'라는 것을 '청소'를 통해 하면서 견뎌내려 했던 걸까. 지금의 나처럼... 



어쨌든 나는 현재 권고사직을 받은 상태다. 드디어. 올 것은 왔다. 

앞으로 남은 시간, 나는 어떻게 흘러갈까... 이렇게 워킹맘 표류기가 스펙터클 하게 흐르는 중이다. 이것은 실화이고, 이것은 드라마가 아니고, 이것은 재방송도, 편집도, 수정도 삭제도 되지 않은 채로 나는 지금 생방송을 찍고 있다.... 시나리오 감독 연출 배우 모두 '나'라는 인물에 대한. 14일간의 생방송을 실황 중계하려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나는, 끝내 쌍둥이들을 떠올리고 만다. 눈물이 흐른다. 미안해서, 일 한다고 갖은 핑계를 대었던 졸라 못돼 쳐 먹은 내가 너무 모지리 같아서.....



꽃은 다시 피어날까..... 피어났으면 좋겠다. 어두워도, 어둠이 다가와도. 놓치지 않고 싶기에. '꽃'을.... 나의 '꽃'을...




#신이시여_이것을_글감이라고_내리셨다면

#쓰겠습니다_이_삶의_흐름또한_가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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