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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15. 2020

어른도 아기가 되지

퇴사 D-13일 

우리는 모두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


- 코스모스, 칼 세이건 - 





토요일 새벽 5시 

그나마 긴 잠을 취할 수 있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눈이 떠졌다. 아마 어제의 여파 이리라. 새벽 3시까지 잠들지 못한 내가 주요한 원인일 테고 그렇게 일찍 일어나 늘 엇비슷한 주말 일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쌓인 옷가지를 기능 별로 분류 후, 흰 빨래부터 세탁기 안에 넣는다. 제대로 동작하기 시작하는 세탁물들을 확인한 후 부엌으로 간다. 쌀 바가지를 꺼내어 쌀을 씻는다. 어제저녁에 불려둔 검은콩과 함께 쿠쿠밥솥에 집어넣는다. 1시간 후의 취사를 예약하고 나면 그다음엔 아침을 비롯한 그 날의 식단을 떠올린다. 반복되는 일상, 헌데 오늘따라 새삼 그 '반복' 이 누군가의 그리운 한 때라는 걸 잠시 떠올려보니 갑자기 가슴이 탁 막히려 하는 걸 겨우 참아냈다. 왜 그랬을까.. 



냉장고를 확인하고 있는 재료들을 꺼내보았다. 

오늘은 두부참치김치찌개와 연근 조림, 잔멸치 볶음과 게맛살이 들어간 양파달갈먈이를 하기로 했다. 쌍둥이들의 국 식단인 연한 배추 된장국까지도. 뚝딱. 시계를 보니 의외로 빨리 끝내버린 오전의 일과들. 제법 살림이 노련해졌다는 게 느껴지는 건 그런 순간이다. 반찬을 다 만들어 두고도 아침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손수완이 빨라진 건지, 아니면 초집중을 한 건지, 알 턱은 없다. 그냥 빠르게 움직이는 내가 있었을 뿐. 아무 생각 없이 다만 쉼 없이 움직이고 싶었을 뿐... 사념이 들어오지 않도록. 감정도 느끼지 못할 만큼. 



오전 9시. 쌍둥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가족 구성원 3인의 기상과 동시에 아침 집안일을 (흔한 간단한 기지개 아침놀이, 먹기, 다시 놀기 등) 마치고 나면 청소를 한다. 그 사이 다 된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연달아 돌리고 나서야 나는 샤워를 할 준비를 한다. 마치고 나니 11시가 다 돼가는 시간. 어느덧 점심시간이나 바로 점심준비를 하기엔 나는 에너자이저가 아니기에. 늘 그러하듯 도서관과 마트행을 병행하는 일정을 택한다. 남자 3인을 부추겨 그렇게 바깥으로 나간다.



세 사람의 뒷모습이 새삼 고마워서...난 고마워도 우는 사람이 되어버린걸까 싶었다....



봄이 왔나 싶을 만큼의 온기가 느껴졌다. 잠시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지려 했다. 

빌리고 싶었던 아이들과 나의 책들을 모두 빌리고 나니 이상한 상쾌함이 번지려 했다. 그대로 미소를 조금 지은 채 마트로 돌진. 카트 2개에 각각 1인씩 전담마크로 쌍둥이들을 태우고, 나는 가방에서 그 날의 장거리를 미리 적어 놓은 노란색 포스티잇을 꺼냈다. 살 것들을 다 산 이후 계산대에 줄을 선다. 아이와 잠시 동안 장난을 치며 다시 한번 더 웃어보았다. 언제나 내 전담마크인, 나를 닮아서 늘 걱정이 앞서는 둘째의 눈을 바라본다. 그랬더니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아이의 문장에 나는 잠시 주춤거렸다. 



- 엄마

- 왜?

- 어른도 아기가 될 수 있지?

- 아.. 응. 그럼. 될 수 있지. 될 수 있지... 



나는 순간 그 다음은 문장을 잇지 못했다. 

딴 때 같으면 우리 둘은 서로의 이상한 대화들을 주고받았겠지만 나는 이상하게 손쉬운 문장들마저도 잠시 머뭇거렸다. 다만 마음속으로 어떤 문장들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걸 꾹 움켜쥐려 했다. 튀어나오지 않도록. 



장을 다 보고 집에 돌아와 늦은 점심을 해 먹였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오후 3시. 아이들과 잠시 놀아주고 그이와 바통터치를 한 이후에나 잠시 동안 읽다만 책을 꺼내 몇 장 들춰 읽다 시계를 쳐다보니 어느새 4시. 오늘은 배우고 싶었던 취미 미술 원데이 클래스가 하는 날이었지만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나갈까 말까, 이제는 일상인 고민들... 아이들을 두고 나가는 것이 여전히 못내 이상한 죄스러움에 잠깐의 발목을 스스로 잡아버리는 나. 



그러나 나는 주섬주섬 코트를 찾기 시작했다. 

나가야 조금 더 웃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아이들의 목욕 후 입힐 옷가지와 미리 만들어 둔 저녁 찬거리들 및 접시 세팅만 미리 마치고 그이에게 아이들을 부탁했다. 늦게 와도 괜찮다는 그이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서글퍼지려 했다. 늦게 오고 싶어도 막상 늦게 있을 곳도 딱히 없을뿐더러 그러지 못하고 회귀본능처럼 집으로 기어코 돌아오고 마는 나는 이제 이런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해가 졌을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던가... 나는 그러하니 축복받은 넘치는 삶이지 않은가. 



수채 드라이플라워 클래스였다. 

아담한 공간에서 강사님과 몇 마디의 사담을 잠시 주고받은 후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교습은 시작되었다. A4 사이즈의 흰 도화지를 피고 연습용 튤립 3개를 그려 보았다. 파스텔톤 연블루와 보라색 튤립을 그려보기로 한 내 그림을 보고 강사님은 예쁘다고 칭찬해 주셨다. 소녀의 볼터치 같은 느낌이라고.... 문득 볼터치를 한 게 언제였더라 싶어서 조금 부끄러웠다. 



완성품을 가지고 기념사진을 찍고 공방을 나오니 어느새 저녁 8시. 

귀가행 지하철 안에 서서 가다 핸드폰이 울렸다. 주말의 전화가 울리는 건 드문 일인데 감이 좋지 않았다. 지방에 있는 남동생이었다. 받지 않을까를 잠시 고민했었던 건, 아마 그때서부터 어떤 예감과 감정이 밀려오기 시작했기에.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감추려 애썼던 '그 감정' 이. 



- 누나, 들었어. 괜찮아? 

- 응. 그럼... 걱정 마. 

- 밖이야? 어딘데? 매형은?

 - 애들이랑 집에 있지. 밖에 잠깐 나왔어. 안 나오려다가 그냥 나왔어...

- 그래... 누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평생직장 없잖아. 누나 책도 쓰고 강의도 하잖아. 그렇게 살면 돼. 

- 응. 누나 괜찮아. 별 거 아냐. 

- 그래. 내가 다 속상하네. 근데 무슨 퇴사가 그렇게 빨라. 가능해 그게?

- 응.. 가능하게 해야지. 나가라는데 별 수 있나. 아무튼 괜찮아. 학교 개강은 했어? 다시 학부생들 수업 준비하려면 바쁘겠네. 

- 난 걱정 말고. 책 보고 싶은 거 있음 말해. 사 줄게. 이제 퇴사하니까 책이나 실컷 읽어버려. 

- 아....



결국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전화를 끊고 나는 지하철 안에서 부끄러움도 모른 채 마냥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책맞게 그대로 흘려내버리고 말았다. 동생의 목소리는 기어코 나를 건드려 버렸기에. 하루 종일 '아무렇지 않게 센 척'을 했던 나는 순식간에 연약해빠진 본연의 모습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책 사 준다는 그 사려 깊은 지지의 응원이 이상하게 고마우면서도 한없이 내가 못나보여서. 



드라이플라워도, 생화가 아니어도 그 본연의 매력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그것 나름의 가치의 의미를..



지금 당장 해답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하물며 정답은 나오지도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소속으로부터 부정당하는 것 같은 의도치 않은 황당한 패배감에 휩싸인 채 다만 지금의 '왜 하필 나'라는 식의 물음은 되도록 삼가자고. 그렇게 다만 다시 살아가려 애쓰다 보면 아마도 차츰 나도 모르는 사이의 먼 미래의 어느 날,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토요일의 일상은 다시 시작될 거라고. 곧 머지않아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오후의 마트에서 둘째 아이의 물음에 나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그제야 속으로 대답을 건네기 시작했다. 



- 응. 정음아. 어른도 아기가 되지. 아기보다 더 한 아기가 되기도 해.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한 거야. 정음이에게는 이렇게 강한 엄마가, 그리고 가끔 아기가 되어 버리는 정음이 엄마에게는, 

나 처럼 울보가 아닌, 언제나 강했던 엄마가... 그래서 내가 많이 미안했던, 여전히 미안한 

너의 할머니가....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는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공방에서 귀가하는 지하철 안에서 오늘 만든 수채 드라이플라워가 들어있는 가방을 나는 꼭 끌어 앉았다. 그녀에게 줄 '선물'을 그저 꼭 감싸 앉은 채로. 예뻤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오늘 그린 꽃들 만큼, 당신의 눈 앞의 이런 지질한 모습의 '나' 일지언정. 자신은 없지만. 자신을 더더욱 내야 하기에. 



나는 꽃과 별을 떠올렸다. 

어쩌면 우리는 꽃이나 별과 같은, 자신 조차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달란트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지금은 보이지만 않을 뿐, 살아내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그 존재 자체로 귀한 사람들이고 귀한 것들이라고. 나는...애써 예쁜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르려 했다. 



예쁜 꽃이고 



예쁘고 다시 당당할...당신의 딸이기를 나는 오는 내내 바랐습니다...엄마.......




#퇴사_D-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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