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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17. 2020

아무튼 청소

퇴사 D-12일, 일요일의 대청소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 곤도 마리에 - 




주말 아침 집안일을 하고 보니 오전 10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회사에 있는 '짐' 들이 생각났다. 정확히 다시 말하자면 '책' 들이 생각이 났다. 회사 사무실의 내 책상은 '작은 헤븐 도서관'을 차려도 괜찮은 수준(?)으로 노트북 자리를 둘러싼 사방이 모두 책이었기에. '책상을 빼야 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책을 회사에서 집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문장으로 바뀌었다. 그이와 함께 개인 차로 이동하지 않으면 혼자서는 여간 가지고 올 수 없는 짐들... 책이 아닌 사무용품이었다면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단출한 짐이었겠지만, 아무튼 책을 가지고 와야 했다. 그이에게 말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잠깐 회사로 가자고. 책을 가지고 와야겠다고. 



그이가 물었다. 왜 하필 오늘이냐고. 나는 말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고. 

사실은 생각이 났을 때 바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퇴사 이후에도 계속적인 '어떤 실행력'을 유지하기 위한 훈련을 지금 이렇게 다시 '시작' 하는 것이라고. 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그이에게 말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회사로 가자고.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그 많은 책들을 가지고 움직이기엔 내겐 당신이 필요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미안하지만 '김기사'가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당장 열흘도 채 되지 않은 날 안에 우선 '짐'부터 정리해야 함이 필요했기에. 



- 가자, 애들 데리고. 회사 가서 짐을 다 가지고 와야겠어. 

- 책 많아?

- 응... 좀 많아. 언젠가 가지고 와야 했었는데, 잘 됐지 뭐. 퇴사가 좋을 때도 있네. 

- 그래. 가자. 



꽤 많이 읽으면서 일했구나.... 싶었다. 

큰 짐들을 대략 정리하고 보니 약 4박스가량이 나왔으니까. 챙겨갔던 박스와 가방에 책을 담기 시작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열심히 일을 하려 했다고. 각종 문서 작업 툴을 혼자 책으로 익히면서. 또한 마케팅이나 브랜딩, 광고학, 커뮤니케이션, 공간 인테리어, 창업, 영어, 일본어, 심지어는 기본 중국어까지. 회사의 일과 관련된 책들과 관심 분야의 것들을 일로 연결시키려 했던 스스로의 노력, 그 모든 흔적들은 모두 사무실 한편에 계속 쌓아지기 시작한 책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책 제목들을 한 번씩 훑어가면서 짐을 정리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마웠다... 그리고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새 자리를 찾아주며, 그 자리가 편안하기를 바랐다. 




알 수 없는 북받침이 또 차오르려고 했으나 아이들의 목소리 덕분에 구원받았다. 

옆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쌍둥이들을 보면서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회사라는 공간이 다섯 살 아이들에게는 여간 신기했던 모양이었을까. 다소 삭막한 사무실 복도와 내 자리가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사무실 공간에 겹치는 순간을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짐을 가지고 집에 도착하니 점심시간

미리 만들어 놓은 점심을 후딱 먹여 놓고 (역시 미리 만들어 놓기를 잘헀다며...) 아이들을 신랑에게 전담마크시켜두고 (다시 말하자면, 그이와 신비 아파트와 핑크퐁, 호비에게 맡겨 두고) 홀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을 비롯해서 그동안 소소하게 모아 두었던 지극한 개인 취향의 '별책부록 같은 굿즈들' 이 한 가득이었다. 컵부터 시작해서 각종 다양한 문구류들, 아울러 회사에서 신던 구두 정리까지. 그동안  '소소' 하게 모아두었다고 생각했으나 그 '소소'가 시간이 흘러 쌓이고 보니 '거대' 한 한 박스 가량의 것들로 변해있을 줄이야. 



아무튼 청소, 집 정리만 4시간째. 

다 정리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4시가 지나가 있었다. 회사 짐 정리를 하기 위해 시작한 행위는, 결국 책장을 비롯해서 신발장, 거실장, 각종 수납장과 싱크대 정리까지. 정리하다 보니 옷장과 냉장고 청소까지 '싹' 뒤집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시간의 부족함을 느껴서 전략적으로 일단락을 지으려 했다. 청소한다고 제대로 놀아주지 못한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품고, 대신 그 마음을 야채 볶음밥에 한 가득 담아내며 어느새 저녁 준비를 하는 내가 보였다. 



언젠가 바깥 창문을 열면 잔디라든지 초록이 가득한 풍경이면 좋겠다 싶었다... 문득 눈 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정리 파티'를 끝내고 보니 다시금 어떤 생각들이 밀려왔다. 

혼자 남겨지면 이렇게 생각이 감정이라는 벗과 만나 자주 다가오곤 한다. 더군다나 '퇴사'라는 '변화'를 앞두고는 더더욱. 작게 시작한 것들이 시간을 만나서 쌓이고 모아지다 보면 결국 어느새 불어난다는 것을. 파이는 커지고 채워진다는 것을. 그 오래된 것들 중에서는 계속해서 갖고 있으면 도움이 되는 것들과 그렇지 않고 그저 먼지만 쌓이는 것들이 생긴다는 것을. 먼지는 많이 먹으면 여러모로 헤로 울 테니...



정리하면서 버렸던 것들을 모아둔 박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편으로는 그 버린 것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것이 마치 '나' 같다고 느껴져서 그랬던 걸까. 약 한 박스 정도의 다 써서 너덜 해진 볼펜이나 거의 다 쓴 수첩들, 공책들, 너무 낡아서 지저분해진 책들, 구멍 난 스타킹, 굽이 다 된 구두와 회사에서 신던 슬리퍼........ 업무 하면서 공부했던 노트들......... 그것들을 보니 눈물이 차올랐다. 집 바깥 계단에 둔 그 박스를 보면서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물건들에게 말을 건넸다. 



쓸모가 없어져서 버린 게 아니야.. 

지금은 다 써서 그래. 제 몫을 다 해내 줘서 그래. 

처음의 설렘이 제 기능을 다 했을 뿐이라고. 

회사에서 함께 해 줘서, 곁에 있어 줘서 좋았다고, 너무 고마웠다고....

버려서 미안하다고.... 도. 



오래된 것들 중 버린 것과 버리지 못한 것들....두 가지 모두 소중한 건 마찬가지....그러나 설렘이 더 남은 건 결국 남겨졌다...



알 수 없는 무력함과 동시에 정 반대의 어떤 자신감도 조금씩 생기려 했다.

짐 정리가 가능할까 싶은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꽤 잘, 깨끗하게 정리를 마친 나 자신을 새삼 발견하고, 남은 '정리' 도 잘 해낼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꽉 찬 12년을 근무한 그곳에서의 남은 '정리'를... 






덧) 곤도 마리에상 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어쩌면 정리에 재능이 좀 있는 걸지도.....라고 

대청소 후 사진을 남기며 잠시 동안만 생각을. 


TV는 신비아파트로 인해 아직.... 없앨 수가 없어요. (나의 육아 메이트, 고마운 벗.... 그리고 나를 지켜주는 주변의 책들) 



책장 욕심이 더 생겨버리고 마는...이러니 슈퍼미니멀리즘이라고도 할 수 없는 삶



장난감이 올려져있던 너저분함이 어느새 책으로...(라는 변명, 결국 책 둘 곳이 없어서 공간에 책을 맞춰 버린 격) 


하다보니 어느새 쓸고 닦고 뒤짚고 버리고 치우고


이참에 안 신던 신발마저 싹 정리를.......... 헤진 굽과 다 떨어진 슬리퍼를 너무 모른체 했구나 싶어서 많이 미안했다...고마웠고..



#퇴사_D-13일   

#하루 지나_쓰는_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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