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취미 하나를 새로 시작했는데, 그게 말야 꽤나 근사해. 바로 걸으면서 책을 읽는 거야. 오디오 북을 듣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종이 책을 양 손으로 펼쳐서 눈으로 읽으면서 걷는다는거지.
걷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따로 떼어놓으면 꽤나 지루한 일들인데, 그 두 개를 같이하니 묘하게 즐거워.
마치 고독한 걷기 군과 외로운 책 읽기 양이 어깨 맞대고 걸으며 대화를 하는 느낌이랄까.
이런 셈이야.
혼자 걸어 지루한 걷기 군에게 책 읽기 양이 함께 걸어주며 재잘재잘 재밌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지.
반대로, 검은 글씨와 흰 종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책 읽기 양에게 걷기 군은 이렇게 말하는거야. "시야를 조금만 돌려봐요. 멋진 풍경이 우리 옆으로 지나치고 있어요"
그렇게 둘의 꽁냥꽁냥 대화를 아빠 미소로 지켜보며 걷다보면 영원히 걸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걷다가 들녘 해바라기라도 마주치면 그 둘에게 선물해주고 싶어서 한 없이 바라보기도 하지.
오늘은 동네 주변을 걷다가,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동네 서점 하나를 발견했어. (넓지도 않는 동네에서 나는 왜 여지껏 이 귀한 곳의 존재 자체도 몰랐을까)
그때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있었는데 때마침 이런 구절을 지나고 있었지.
"실례일지는 몰라도 한정된 관심을 가질 대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라도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성취가 아닌가요?"(67p)
순간 나는 전율 비슷한 것을 느꼈어. 요즘들어 내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게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것 뿐인데, 한정된 관심을 가질 대상을 발견했다는 게 대단한 성취라는 구절을 읽을 때쯤 동네 서점을 지나고 있다니! 그것은 계시처럼 느껴졌어. 그동안 인생 2모작으로 무엇을 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야하나 우려하던 부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어. 마침내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른거야.
그게 뭐냐고?
응?
여태 내가 말하고 있었잖아.
그 서점 사장님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나 또한 동네 서점을 하고 싶어진거야. 동네 서점이자 동네 사랑방. 낮에는 커피 한 잔, 밤에는 위스키 한 잔을 대접하고, 무슨 책 읽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사람에게 내가 읽어 좋았던 책을 추천하고, 때로 친한 배우를 초대해서 1인극 비슷한 것도 하고, 친구 중화를 초청해서 거문고 연주도 청해 듣고하는 그런 꿈같은 공간.
걷기 군과 책 읽기 양 모두 기쁘게 내 이야길 들어줬는데, 잠시 후에 걷기 군이 조심스럽게 묻더라고.
"가뜩이나 힘들다는 동네 서점을 해가지고 먹고 살 수나 있겠어?"
그러자 책 읽기 양이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거야
"번 만큼만 먹으면 되지"
그래. 그러면 되지, 나는 책 읽기 양의 편을 들어주며 모처럼 무언가를 찾은 나에게 찬 물을 끼얹으려는 걷기 군을 원망스레 지켜봤지. 내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는지 걷기 군이 더는 따지려 들지 않고, 혼잣말마냥 이렇게 중얼대더라고.
"언제는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캠핑카 겸 커피트럭을 만들어서 전국을 유랑하며 살겠다더니, 동네 서점에 자리잡고 앉아있으면 이제 나와는 작별하겠다는건가. 책 읽기 양이랑만 놀겠다는건가"
그러자 책 읽기 양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끼어들었어.
"알바쓰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우리 셋은 계속 어울릴 수 있어"
"가뜩이나 어려운 동네 서점에서 알바같은 소리한다"
걷기 군도 지지않자 책 읽기 양이 기분이 상했는지 한 동안 말이 없더라고.
나는 둘을 진정시키고, 눈에 보이는 동네 잔치국수 집으로 데려가서 일단 먹였어.
"어여들 먹어. 삶이 뭐 별 거 있겠어. 이렇게 걷다가 책 읽다가 뜨끈뜨끈 잔치국수 집을 만나면 들어와서 먹는거지"
말없이 후루룩 후루룩 면발을 넘기는데 걷기 군이 무뚝뚝하게 말하더라고
"근데 그 서점말야. 얼마를 버는 걸 떠나서 넌 잘 할 것 같아"
그러자 책 읽기 양이 피식 웃더니
"우리 걷기 군이 뭐 좀 먹이니까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야."
나는 잔잔하게 미소지으며 그들에게 말했어 국물 따뜻할 때 어여들 먹어. 이야기 할 시간은 앞으로도 모래알처럼 많을거야. 아무튼 뭔가를 찾은 날이니 잔칫날이잖아. 우린 잔치국수를 먹을 자격이 충분히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