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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비 Jun 18. 2022

느림보가 되었어

엄마 성장기

하루 종일 가만히 있지 않는 8개월 아가,

요즘처럼 바람 솔솔 부는 날이면

유모차에 태워 공원 산책을 나가본다.

비가 오거나 무더운 날엔 아기와 집에 있으면 기어 다니는 아가를 잡으러 다니느라 20분도 두 시간처럼 느껴지기 일쑤다.


간혹 선선한 날엔 운이 좋으면 시원한 바람 덕분에 두 시간도 거뜬히 깊은 잠을 자주기에 외출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모차를 밀어 보기 전까진 단비와 거의 매일 산책을 했지만 동네의 길바닥이 이렇게 험하고 울퉁불퉁 한 줄은 전혀 몰랐다.

길과 길이 연결되는 곳도 턱이 있거나

심지어 경사가 진 곳도 있어서 유모차를 번쩍 들거나 대각선으로 밀고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걷지 못하는 아기와 한 몸으로 살아가는 요즘, 나는 느림보가 되어가고 있다.

눈앞에 파란 신호등이 깜박이 숫자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숫자 10은 그동안 나에게 길을 건너기에 넉넉한 타이밍이었는데 유모차를 밀고 가야 하는 지금은 눈앞의 10초를 마냥 흘려보내고 다음 신호를 멍 때리며 기다리게 된다.

 10초! 살면서 이렇게 시간을 잡지 않고 멍하니 흘려보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단비와 산책을 할 땐 차가 오거나 신호등이 깜빡이면 사정없이 달렸다.

어떤 때는 단비의 최고 속력을 시험하듯 질주하던 때도 종종 있더랬다.

하지만 아기와 한 몸이 된 지금은 굼벵이 모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빠르게 분주히 살아가다가 이렇게 느림보가 되어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니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무궁화호 기차에서 KTX로 바뀐 뒤 속도는 무척 빨라졌지만 창밖 구경은 놓치게 되고 기차 안에서는 눈을 붙이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라진 속도만큼 놓치는 것도 감수해야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어쩌면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살아가는 게 더욱 익숙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도 같다. 대신 언제든지 스마트폰이 보고 싶은 것들을 무한하게 보여주기에 사실 바쁘게 지나쳐도 잃은 것이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유모차를 밀면서 만나게 되는 길가의 꽃, 담장의 장미 넝쿨,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아기를 보고는 따뜻한 인사를 건네시는 어르신들과 이웃들, 빠르게 걸어 다닐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초여름 오후의 선선한 바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하나하나가 눈과 마음에 예쁘게도 차곡히 담아지고 나니 아기에게도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무엇보다 성격이 급하고 분주했던 내가 느림보가 되어 산책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흥미롭다.

신생아 아기를 기르면서 조급한 마음으로 무런가를 재빠르게 처리하다 보면 늘 탈이 나곤 했다.

어느 날엔 이유식을 만드는 게 너무 힘이 들어 여러 가지 채소들을 잘게 썰어 한번에 다 넣고 이유식을 만들어서 아기에게 먹였다.


아기는 세상에 나와 처음 맛보는 음식들을 한 번에 먹고는 결국 설사로 며칠을 고생하던 날도 있었다.

초기 이유식 채소는 쌀미음에 채소 하나를 3일 동안, 다음 달엔 채소 두 개를 섞어 3일씩 적응기간을 주어 아기가 음식에 익숙해져서 소화를 잘 시키도록 해야 하는 게 원칙이었다.

육아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엄마의 급한 성격과 무지함은 결국 아기가 고스란히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분히 꼼꼼하게 무언가를 해낼 때는 뒤탈 없이 아기가 잘 누린다는 것이다.


내 조급한 성격으로 내가 피해를 입을 때는 마땅한 결과다 싶으며 감수를 했었지만 막상 그 피해를 아기가 보게 되니 정신이 번쩍 들며 나의 조급함을 자책하게 되는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느림보 버전의 삶이지만 이 삶이 나에겐 너무도 소중한 듯싶다. 


오늘도 육아를 하며 내가 아기를 성장시키고 있는 건지 아기가 나를 성장시키고 있는 건지 다시 한번 생각에 잠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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