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밤이면 밤마다 두 손 한 가득 맛있는 걸 사들고 오셨다. 오빠 나 남동생 삼 남매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무교동 무과수 제과점의 바게트 빵이라든가 동그란 크림빵이라든가 얇은 나무 도시락에 들어있는 일식집의 누룽지나 생선뼈 튀긴 것 등이었다. 한밤중에 쓸데없는 걸 사 온다고 엄마는 뭐라 하셨지만 우린 그런 아버지가 좋았다. 쓸데없는 거! 문득 그 쓸데없는 거가 그립다.
아, 너무 재미없다.
문득 규칙적이며 이성적인 나의 삶이 지겹게 느껴진다. 짜릿한 그 무엇. 정신 나간 거 아냐? 하는 행동. 쓸데없는 먹거리. 그런 삶의 삐끗거림이 그리워서였을까. 밭에 가봐야지 하는 그의 재촉에 화가 난다. 그냥 기분이 안 좋다. 그는 너무 반듯하다. 일생에 단 한 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우리 아버지는 밤이면 밤마다 정신이 뿅~ 흐트러지셨는데 말이다.
남편은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한다.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우리 아버지는 술을 잘 드셨다. 내가 가는 날엔 소주를 냉장고에 넣고 기다리시다 우리 딸~ 하며 함께 술 마시며 인생 이야기하기를 즐기셨다. 엄마의 아우성에도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빨간딱지 진로소주 한 박스씩을 안겨드렸다.
건강을 위해 술을 끊으셔야 해.
그렇게 사느니 내 일찍 가고 말지
술 사 오지 말라는 엄마의 논리와 술을 계속 드셔야 하는 아빠의 논리가 팽팽하게 맞선다. 엄마처럼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남편은 엄마 편이다. 아버지는 건강을 위해 술을 끊으셔야 한다고 절대 아버지에게 술을 사드리지 않았다. 술 선물이 아니면 선물로도 안 쳤던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섭섭하셨을 게다. 술 모르는 사위가.
그는 절대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를 게다. 하긴 나도 모르는데 그가 어떻게 알까. 그냥 왠지 기분이 그런 날인걸. 거기에 밭에 가자하니 더더욱 합리적이기만 한 생활에 화가 난 것이다. 그런데 싸운 것도 아니요 화낼 일도 없었는데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마냥 허전한 걸 어쩌겠는가. 그가 말하는 대로 밭에는 따라간다. 그런데 영 기분이 아니다.
나 머리 아파. 감기가 오려나 봐.
그래? 그럼 여기 차 안에 있어.
밭에 도착했는데 영 기분이 아니다. 나가기 싫어 일단 아프다고 운을 떼니 차 안에 있으라며 그는 홀로 나간다. 일단 시간은 벌었다. 자동차 의자를 길게 뒤로 빼고 눈을 감는다.
아, 참 재미없다.
툭하면 벌게진 얼굴로 우리 한잔 했시요~ 마주치던 윗집 노부부가 생각난다. 오늘은 집에서 파전해서 어제는 밖에서 동태탕 해서 하하 메뉴도 다양하고 그걸 꼭 내게 말씀해주시던 분들. 주차장에서 마주치면 두 분 다 얼굴이 벌건 채 손을 꼭 잡고 헤롱헤롱 그렇게 즐겁던 분들. 지금은 이사 가셔서 안 보이지만 종종 마주치던 그분들이 문득 생각난다. 함께 헤롱헤롱 술에 빠지면 꽤 재밌을 거야 하는 생각 하하 푸하하하
정신 차리자. 나만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창 밖을 보니 밭에서 갈고리를 들었다 놨다 그 홀로 바쁘다. 그래. 같이 해야지. 아, 그런데 오늘은 그냥 교과서적인 삶이 싫다. 그래도 그 혼자 일하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착한 마음이 이긴다.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커다란 까만 장화를 꺼내 신고 그가 일하고 있는 밭으로 간다. 잡초는 그야말로 극성을 부리고 있다. 덩굴로 된 잡초는 나무들 사이에서 우리가 나무를 심고 깔아놓은 검은 부직포 위까지 올라와 완전 풀 숲을 이루고 있다. 그가 낫을 주며 덩굴로 된 무성한 잡초 한가운데를 끊으라 한다. 그러면 그가 쇠갈고리로 부직포 양 옆으로 그 덩굴 같은 잡초를 끌어내겠단다. 알았어. 나는 열심히 낫질을 한다. 그는 열심히 갈고리질을 한다. 우리 밭의 작은 감나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덩굴 잡초들 사이에서.
후드득 비가 스친다. 흙이 잔뜩 묻은 궁둥이 의자며 낫이며 호미며 장갑 등을 빨러 계곡 아래로 내려간다. 물이 콸콸 콸콸 힘차게 흐르고 있는 곳에서 하나하나 깨끗이 빤다. 그는 자꾸 왜 아침에 화가 났냐고 물어본다. 아, 그러나 그걸 어떻게 설명할까. 그냥 막 방탕하고 싶은데 나의 삶은 너무 모범적이다. 막 흐트러지고 싶다. 그냥 그럴 뿐이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도 없다. 집콕에 질린 결과일 수도 있다.
맥주 마실래?
친정아버지를 닮아 나에게 술 마시는 DNA가 있다는 걸 아는 남편은 종종 나 혼자라도 취할 수 있게 배려를 해준다. 그러나 천만에 만만에 말씀이다. 아니 전엔 멋모르고 판을 벌여주는 대로 마셨던 적이 있다. 맥주로야 취하기까지 하겠는가. 소주가 들어가며 그렇게 거나하게 취했던 적이 있다. 그가 벌여준 판에서. 아, 그러나 그때 느꼈던 당혹감, 좌절감, 억울함. 나는 헤롱 헤롱 술에 취해 엉망인데 앗, 상대방은 정신이 말짱하다는 것. 아, 이건 아니다. 그 이후 절대 난 그 앞에서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는다. 자연스레 술도 거리가 멀어진다. 그렇게 세월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