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의 말이 만든 마음의 구조에 대하여
어릴 적 우리 엄마는 자주 이렇게 물으셨다.
“선생님이 니 이름 아나?”
그 말의 배경에는 그 시대만의 풍경이 있었다.
한 반에 50명이 넘는 학생들, 일 년이 다 가도록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하는 담임 선생님, 중학교부터는 수많은 교과 담당 선생님들이 몇몇 반장과 눈에 띄는 학생들만 기억하는 교실.
엄마는 걱정하셨던 것 같다.
'내가 그 속에서 잊히지 않을까?'
'혹시 존재감 없이 지나가버리지는 않을까?'
하지만 아이였던 나는 그 말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나는 누가 알아봐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걸까?'
'내 이름은 누군가의 관심 속에서만 존재하는 걸까?'
'조용히 있는 나는 충분한 사람일까?'
그렇게 아주 어린 마음 깊은 곳에 ‘외부의 인정이 있어야 가치가 생긴다’는 작은 씨앗 하나가 심어졌던 것 같다.
남편의 말이 마음을 건드린 이유
어제, 감정어 예시집 저작권 등록증을 받았다.
내가 만든 사유의 세계가 종이 한 장 속에 또렷한 이름으로 찍혀 나오는 느낌.
큰 감정 없이, 조심스럽지만 기쁜 마음으로 그 사실을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그거 받아봤자, 다른 사람이 안 써주면 아무 소용없지.”
순간, 마음 한 켠이 발끈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은 남편 개인의 말이 아니라 어릴 적 엄마가 했던 말과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니 이름 아나?”
“남이 써줘야 의미 있지.”
둘 다 외부의 시선 안에서만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오래된 세대의 사고 방식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안의 감정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나는 더 이상 그 구조 안에 살지 않는다
나는 남편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에게 인정받으려고 이걸 한 게 아니니까.”
그 말은 단지 변명이 아니라 내 마음의 성장 방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문장이었다.
창작자는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세계의 중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누가 이름을 알아주든 말든, 누가 써주든 말든, 누가 박수를 치든 말든, 내가 만든 세계는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 사실을 ‘나 자신이’ 알고 있으면 외부의 인정은 바람처럼 스쳐 갈 뿐이다.
세대가 다르면 마음의 구조도 다르다
엄마 세대는 “눈에 띄어야 살아남는 시대”를 살았다.
그 시대의 생존 방식은 자신의 존재를 ‘바깥에서 인정받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말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나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의 눈에 들 필요가 없다.
내 이름은 누군가가 불러줄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이미 묵묵히 자라온 뿌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내 세계를 나 스스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이미 충분한 의미다.
이제 나는 ‘내 이름을 스스로 아는 사람’이 되었다
어릴 때 엄마가 했던 말은 그 시대의 사랑 표현이었다. 남편의 말도 같은 맥락의 현실적 조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말들이 만드는 구조 안에 더 이상 머물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선생님이 너 이름 아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제 이렇게 바뀐다.
“이제는 내가 나를 압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나는 계속 쓸 수 있다. 계속 만들 수 있다. 계속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다.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내 안의 중심으로부터.
그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흔들릴 만큼 가벼운 것도 아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만의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사실을 또렷하게 깨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