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어야든동 열심히..."
우리 할아버지는 헤어질 때나 통화 말미에 매번 이런 말을 붙이고는 했다. 여기서 '어야든동'은 경상도 사투리로 '뭐가 되었든 간에', '반드시'를 뜻한다. 할아버지의 짧고도 굵은 저 말을 해석하자면 거두절미하고 열심히 임하라는 것.
내가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는 내게 어야든동 열심히 엄마 말 잘 듣고 밥 잘 챙겨 먹으라고 했고, 조금 더 컸을 때는 어야든동 열심히 공부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어엿한 사회인이 된 손녀에게는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그저 '어야든동 열심히...' 이렇게만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이쯤 되면 내가 무엇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야 할지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까? 여하튼 나는 이 '어야든동 열심히'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남들은 잘 듣지도, 쓰지도 않는 레어템 같아서 좋았고, 인생의 채찍 같으면서도 위로 같아서 좋았다. 평생 듣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핑계 삼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할아버지는 팔십이 넘도록 큰 병치레 한번 한 적이 없었기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늘 세상에 있었던 사람이기에 그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자기 자식에게는 무뚝뚝하고 엄격해도 자기 자식의 자식에게는 늘 관대하고 다정했다. 오빠와 나는 할아버지가 시골로 귀향하기 전까지 주말마다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정도 떨어진 할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그는 배가 빵빵하게 오른 손주들이 배고프다고 입을 떼면 온 집을 뒤져서라도 뭐든 건네는 사람이었다. 본인은 구멍 난 양말을 펄럭이면서도 우리에게는 최신 유행하는 새 옷을 사 입혔다. 그렇게 우리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내가 고스톱을 연마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할아버지에게 도전장을 내민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수십 년간 다져 온 기술로 마을을 호령하는 타짜였지만 당시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지하면 용감하니까. 점당 100원 내기에서 승부는 불 보듯 뻔했다. 매 판마다 할아버지는 크게 이기고, 우리는 크게 잃었다. 눈앞에서 코 묻은 천 원짜리 몇 장이 삽시간에 날라갔다. 마침내 내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지기 직전, 할아버지는 본인이 딴 돈을 고스란히 내 손에 쥐어줬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고 하지만 그 냉정함도 조건 없는 사랑의 힘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일까. 이후 나는 할아버지와의 고스톱에서 승리는 잃어도 돈은 잃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고 자신감이 만땅이 됐다.
할아버지는 겨울을 깨고 봄이 움트던 3월의 어느 날, 돌아가셨다. 볕이 아주 따스하고 바람이 머리카락을 겨우 스칠 정도로 평온한 그런 날이었다.
1년 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암이 할아버지의 시간을 갉아 먹어나갔다. 할아버지는 노쇠한 몸으로도 병원의 안내에 따라 열심히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어떤 치료도, 건강을 기원하는 어떤 말도 소용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무렵, 그는 한사코 시골 본인 집에 있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큰아들인 우리 아빠가 있는 부산에 머물게 됐다. 나는 서울에서 일하면서도 2주에 한 번씩은 재택근무 일정을 길게 붙여 꼭 할아버지를 보러 부산에 왔다. 할아버지는 아팠지만 결코 아픈 사람이 아니었다. 혼자 화장실도 잘 가시고 수저로 밥도 잘 드시고 잠도 잘 주무셨다. 무엇보다 밤 7시부터 9시까지 연속극을 3개 연달아 시청하고 그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을 만큼 정신이 분명했다. 자동 이체로 빠져나갈 금액이 얼마인지, 국가에서 받을 연금이 얼마인지도 달달 외우고 있었다. 내게 가족들 걱정도 하고 욕도 했다. 이쯤 되니 대체 어떤 돌팔이가 할아버지에게 암 선고를 하고 시한부 판정을 한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점차 주무시는 시간이 깨어 있는 시간보다 더 많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서서히 실감이 났다. 그건 '아, 이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슬픈 상상이었다. 할아버지는 깨어 계실 때면 더 이상 TV를 보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가 투닥거리거나 웃고 떠들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겨 카메라 마냥 우리의 모습을 담았다. 할아버지가 주무실 때면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들숨과 날숨에 그의 복부가 잘 움직이는지도 함께 살폈다. 그 3초의 시간 동안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빨리 커 버린 까닭에 할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늙은 것일까? 신은 왜 야속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날한시에 두지 않는 걸까?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현실 앞, 나는 지금 어떤 것을 해 드릴 수 있다고 해서 이 깊은 회한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달력을 곁에 두고 다가올 중요한 날을 계속해서 인지했다. 그건 아빠의 생일과 할머니의 제삿날이었다. 아빠의 생일날, 난생처음 아들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 주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우리는 마트에서 사 온 음식과 직접 준비한 반찬들로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거한 생일상을 차렸다. 입맛을 완전히 잃은 할아버지는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흰죽에 새우장만 올려 드셨다. 아빠는 그런 할아버지의 서툰 부정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이 장면이 꼭 지나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2주가 흘렀다. 나는 다시 부산을 찾았고 그날은 할머니의 제사가 있는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기력도, 깨어있는 시간도, 눈동자의 초점도 눈에 띄게 잃어 갔다. 파르르 흔들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다. 밤 8시, 할머니의 제사가 시작되고 할아버지는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떠서 그 시간을 함께했다. 나는 절을 하며 할머니에게 제발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지만 않게 해 달라고 말했다. 아마 모든 가족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가 끝나고 할아버지는 한동안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응시했다. 이후 할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할 힘도 없어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주무시는 소리인지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건지 내 귀를 의심하기도 여러 번, 방문을 열고 할아버지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힘들다는 사실과 마주했다. 아빠는 그런 할아버지에게 정말 병원은 가기 싫은 거냐고 재차 물었다. 할아버지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이 잦아지자 나는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응급실 병상에서 마주한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아픈 사람이었다. 우리를 예뻐하던 손도, 우리를 업고 비탈길을 오르내리던 다리도, 늘 우리를 걱정하기 바빴던 입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떠날 준비라도 하는 듯 그 어느 때보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나는 몸을 구부려 누워 있는 할아버지와 눈높이를 맞춘 뒤 기어이 내 손으로 병원을 오게 만들어 정말 죄송하다고 울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내게 가느다랗게 '괜찮아'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본인 때문에 요즈음 많이 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또렷한 음성으로 '괜찮아'라며 그 모든 슬픔을 안아 주었다. 다음날 할아버지는 고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며 오래된 지갑 속 명함 하나를 발견했다. 내가 방송작가로 KBS에 처음 취직했을 당시 건넨 명함이었다. 벌써 10여 년도 더 흘러 나조차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그 명함을 할아버지는 늘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것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펑펑 울고 말았다.
지금도 할아버지라는 네 글자만 떠올리면 눈물부터 고일 정도로 많이 그립다. 그럴 때면 '어야든동 열심히'라는 할아버지의 명대사를 되새김질해 본다. 울고 있는 우리를 보면 할아버지는 분명 '어야든동 열심히 살라'는 말을 건넬 테니까. 할아버지가 내 명함을 오랫동안 간직했던 것처럼 나도 그를 가슴속에 고이 간직해 놓고 때로는 그리워하고, 또 때로는 잊어도 보면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