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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Dec 12. 2024

인사가 주는 행복

 시집 쪽으로 조카들이 열두 명 있다. 시어머니께서 집에 계실 때는 장성해 가는 조카들이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인사차 다녀가곤 했다. 대부분 결혼을 하거나 군대에 가는 경우다. 결혼 전에 태어난 조카들은 워낙 자주 놀러 와서 밥정이 들었고, 결혼 후에 태어난 조카들은 내손으로 산후조리를 해주며  고 조막만 한 갓난아기를 씻겨주었기에 특별하지 않을 수 다. 그럼에도 시어머니께서 조카들이 올 때마다 오롯이 그 기쁨을 누리시며 맞아주셨기에 딱히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다만 조카에게 줄 봉투만 시어머니께 건네드리곤 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를 대신해 그 인사를 받고 있다. 막내시누이 아들이 결혼을 한다며 신부 될 아가씨와 함께 인사를 왔다. 어찌나 어여쁘던지 우리 가족이 되어주어서 너무 고맙다며 마침 명절즈음이었기에 푸짐하게 한 상을 차려주었다. 돌아갈 때는 한사코 사양했지만 딱히 다른 것을 준비하기도 뭣하여 전에 하던 대로 봉투 주었다. 또 얼마 전에도 양손 무겁게 선물을 사들고 둘째 시누이 아들이 청첩장을 들고 결혼인사를 왔다. 그때도 역시 간단하게나마 차와 디저트를 준비하여 먹고는 따로 포장해 둔 마카롱에 여비를 넣어 보냈다.


 두 조카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 모두를 보아왔기에 눈물이 먼저 나왔다. 어느새 자라서 너희들이 이렇게 결혼을 하다니 시어머니 마음이 이랬을까 싶었다. 한 조카는 사네 안 사네 하는 통에 고아원에 보내네 마네 굉장 치도 않았다. 그 와중에 시집 쪽에서 도저히 못 키우겠다며 젖먹이 아이를 몰래 데려다 놓고 가버렸다. 때가 지나 배가 고파 우는 아이에게 뭐라도 먹여야 하는데 도통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했다. 결국은 딸에게 모유를 먹이던 내가 나서야 했다. 그런 세월을 건너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한다고 인사를 왔으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을까. 어찌나 기특하고 대견하던지 산만한 덩치를 많이도 토닥여 주었다.


 둘째로 아들을 임심하고 얼마뒤 40이 다 된 시누이가 임신이 되었다고 시끌벅적했다. 그때만 해도 그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것이 흔치 않았기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분명히 위로 딸이 있는데 뭐지 싶었는데 그제야 알았다. 하나 더 낳고 싶었는데 10여 년 이상 태기가 없다가 뒤늦게 하늘에서 아들을 점지해 주신 거였다. 그 딸은 지금 비혼을 선언하고 영화 쪽 일을 하며 남동생을 살뜰히 챙기고 있어 든든하기 짝이 없다. 물론 뒤늦게 그 아들을 키우느라 시누이가  마음고생 몸고생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런 조카가 40이 다 되어 결혼을 한다니 듬직하고 멋지고 자랑스러워 운동으로 다져진 우람한 체격의 조카를 꼬옥 안아주었다. 엄마에게 꼭 잘해 주어야 한다고. 둘이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비록 그 깊은 뜻을 알길 없는 조카였지만 모든 사연을 다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복잡했던 감정을 보내고 나서야 실컷 쏟아내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시누이께 축하전화를 하며 또 한바탕 눈시울을 적셨다.




 어느 날부터는 그렇게 어리기만 했던 그 아래 조카들이 훌쩍 자라 입대를 하게 되었다며 줄줄이 인사를 왔다. 둘째, 셋째네는 위로 누나 둘에 세 번째로 태어난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아들들다. 그 시절만 해도 아들선호사상이 팽배하던 때였다. 막상 낳아놓기는 했지만 삶이 그다지 녹록지는 못했다. 둘째네 같은 경우는 한 사람만의 힘으로 세 아이를 건사해 나가려 쉽지 않은 길이었다. 늘 쪼들리고 아끼며 살아도 쉽사리 나아지지 못하다 두 딸이 취직을 하고서 살림이 졌다. 셋째네 또한 뒤늦게 낳은 아들을 위해 무리하게 가게를 확장하려다 사기를 당하고 그 빚에 허덕이다 나아지고 있는 중이다. 다행히 아들을 첫 번째로 낳은 네째네는 괜찮은가 싶더니 주식을 하다 큰 손해를 입어 한동안 어려웠다.


 그런 사연들 속에서도 티 없이 잘 자라준 조카들이다. 하나같이 애처롭고 안쓰러우면서도 성실하고 착실한 시동생부부들의 사랑으로 자라왔기에 뿌듯하기 이를 데 없다. 긴 머리를 자르고 나타난 조카들이지만 알밤처럼 동글동글하니 어찌나 귀엽던지 아들을 군에 보낼 때 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까이 살고 있는 조카는 간단하게 과일과 디저트로 인사를 나누고는 용돈을 주었다. 좀 멀리 있는 조카는 좋아하던 음식들을 만들어 실컷 먹여서 보내면서 갈 때 모습 그대로 돌아오라용돈을 주어 보냈다.


 그런 절차는 휴가를 나오고 제대를 할 때까지 이어졌다. 어른 노릇 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올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주는 조카들이 너무 고마워 뭐라도 더 챙겨두고 싶어 안달을 하곤 했다. 그 어린것들이 자라서 나라의 부름을 받고 씩씩하게 임무를 해내는 모습이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녀간 막둥이 조카를 보내며 돌아보니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너희들이 있어 어제도 오늘도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겠니. 이 큰엄마가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잘 자라줘서 정말 정말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인사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늘 인사를 강조하는 할머니의 성화에 진료를 받고 나오며 너무 큰소리로 인사를 해대는 윤이로 인해 민망할 때도 있다. 반면에 부끄러워 기어드는 목소리로 간신히 뱉어내는 훈이의 인사에 의사 선생님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곤 하신다. 인사라는 것은 그렇게 순간순간 상대를 웃게 할 수도 기쁘게도 다. 하물며 결혼이라는 행복한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사가 되어 온다거나, 입대를 하거나 제대를 한 후에 인사를 오는 경우에는 또 다른 기쁨과 고마움과 의젓함에 감동을 하게 된다. 어떤 사이든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별의 인사까지도 말이다. 이제 또 어떤 조카가 결혼소식을 들고 인사를 올까. 나는 또 꽃봉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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