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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속의 꿈

by 희야 Apr 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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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속의 꿈 / 희야



살얼음 빗장 아래로 칼날 같은 물이 흘러내렸다 에일듯한 찬 바람 땅속을 얼리고 숨 쉬는 생명들은 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계절마저 수족 못쓰는 무생물처럼 게으를 없었다 칡넝쿨 바위틈 뚫고 올라가듯 언 땅에서 생명을 밀어 올리고 햇살 한 모금에 접힌 잎들을 펼쳐 들었다 봄이 미친 듯이 웃고 있다 갓 핀 풀잎처럼 휘청이는 소녀나풀거리며 거름 냄새나는 들판을 도려내고 있다

엄마,

나싱개(냉이의 방언)가 많아요!

먼 나라 공주가 입었을 냉이꽃 원피스가 봄날의 아지랑이 속으로 피어오른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흙투성이 되고 벌겋게 짓무르도록 가난한 땅 봄벌판에서 돌팔매질하였다 아이 덩치보다 많은 냉이들이 포대 가득 담겨 아버지 자전거에 실려 오일장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종일토록 가지 않는 해걸음을 재촉해 보았지만 엄마도 아버지도 자전거도 집 못 찾는 달팽이처럼 느리기만 했다 냉이향은 종달새 따라 날아오르고 봄벌판은 초록빛으로 물드는데 오지 않는 꿈을 베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화살처럼 달려온 세월이 그날의 공주 되어 옷장 속에 살고 있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하늘거리는 냉이꽃오늘도 새하얀 꿈을 꾼다 세월 입은 여인의 간택을 애절한 눈빛으로 구걸하는 봄이다 제발요!




 원피스의 계절이 돌아왔다. 산책길에 만난 새하얀 꽃들이 나 여기 있어요. 무심히 지나치는 눈빛을 애절하게 부른다. 전세역전이다. 봄이면 대로 엮은 낡은 바구니를 들고 어머니, 언니와 함께 냉이를 캐러 다니곤 했다. 봄밥상에 올리기엔 지천인 냉이를 팔기로 했다. 게으르고 어설픈 딸에게는 달콤한 사탕보다 탐나는 제안이었다.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원피스를 사주시겠다는 말씀에 이마에 땀이 송골 맺히도록 봄벌판을 쑤시고 다녔다.


 손이 아프고 온몸에서 거름 냄새가 나도록 냉이를 캤다. 한 포대 두 포대.... 엄청난 양의 냉이를 다듬고 씻어서 포대에 담았다. 물론 어머니, 언니가 캔 냉이가 훨씬 더 많았다. 걸어서 한나절이나 걸리는 오일장은 어린아이를 달고 가기엔 너무 멀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신 아버지는 어머니와 가난을 싣고 달리셨다. 장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자전거를 하루 종일 기다렸다. 못내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궁하던 시절 한 푼이라도 손에 어 보겠다고 너도 나도 캐어 들고 나오는 통에 헐값이었다.


 다음장에는 꼭 사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날의 서운함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두장 도막이 지나서야 초록빛 땡땡이가 있는 푸릴 달린 첫 원피스를 사주셨다. 마르고 닳도록 입었다. 그 한이 남았을까. 옷장 속에는 여러 벌의 원피스들이 계절별로 들어앉았다. 그렇게 많은데도 또 사느냐는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봄이 오면 또 사들인다. 그날의 꿈들을 입는 것이다. 

님들에겐 어떤 꿈들이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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