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
2025년 11월 13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일. 수험생뿐 아니라 대학가가 분주하다. 아무도 모르게 40대 후반의 나이에 입학원서를 내고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며 마음 졸이던 때가 있었다. 내게 배움이란 무엇일까. 돌아보니 그 길은 끝없이 고단하고,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나는 산골 농부의 여식으로 태어났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으로 산 넘고 물 건너 들판을 가로지르며 왕복 2시간이나 걸리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봄이면 삐비 뽑고 싱아 꺾으며 진달래의 분홍빛이 질펀한 언덕길을 내달리고, 여름이면 개울물이 넘쳐 더 멀리 돌고 돌아 학교를 갔다. 가을빛이 물드는 언덕길을 헐떡이며 오르다 새하얀 억새밭에 누워 숨을 고르고, 손이 곱아지는 겨울날이면 눈밭에 뒹굴면서도 추운 줄 모르고 다녔던 그 길. 졸업식 날이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받은 졸업 앨범과 6년 개근상, 무거운 상품까지 들고 돌아오면서도 전혀 슬프지 않았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아버지. 이 어린이는 꼭 중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담임선생님이 구구절절이 써 주신 편지를 아버지 앞에서 훌쩍이며 읽어드렸다. 그러했음에도 요지부동이던 아버지를 중학교에 못 간 언니가 동생만은 꼭 보내달라며 눈물로 매달렸다.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 중학교에 가게 되었으니 그 어떤 일로도 섭섭하거나 슬프기는커녕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3년 동안 꿈에 그리던 교복을 입고 버스 탈 형편이 안 되니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미끄러지면서도 아프지 않았다. 여전히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였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수업료만큼은 오빠나 남동생들보다 먼저 주셨다. 여자아이가 밀린 수업료로 손바닥이나 종아리가 붉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던 아버지. 훗날 동생들은 그때는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고 웃으며 말하곤 한다.
중학교 졸업이 다가왔으나 고등학교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기적같이 배울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우연히 알게 된 방적 회사 부설 고등학교였다. 방적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도 모른 채 배울 수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짐이랄 것도 없는 보따리 하나를 들고 기숙사에 들어갔다. 키도 작고 볼품없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여린 아이였지만 갈래머리에 교복을 입는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큰소리 한 번 없이 키워주신 부모님. 그 곁을 떠난 적이 없던 나였지만 배움을 위해서 라면 견뎌내야 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뿌연 솜먼지가 떠도는 공장에서 불량이 나고, 실적이 저조할 때마다 온갖 폭언에 시달리면서도 삼교대로 일하며 학교에 다녔다.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다. 공장이 아닌 쾌적한 사무실에서 펜대를 잡고, 정당한 대접을 받으며 일하고 싶은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선 오직 공부만이 살길이었다. 그와 달리 학교에서는 현장 사고로 이어질까 두려워 학생에게 시험공부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 말을 들을 내가 아니다. 몰래몰래 타이밍(잠 억제제)을 먹으며 틈만 나면 공부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서울 본사 사무실을 선택할 수 있는 단 한 장의 티켓이 내게 주어졌다. 그러나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나의 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취업에 실패한 나는 세상을 다 잃은 듯 또다시 작은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왜 나는 세상에 태어나 이리 힘든 삶을 살아갈까. 방적 회사 대표이자 학교 이사장이 하필 그해에 선거에 출마했다. 청탁이 난무했던 그 시절. 힘없고 배경 없는 나에게 그 자리가 돌아올 리 만무였다. 눈물을 훔치며 끝도 없이 좌절했지만 어쩌면 그러길 바랐을지도 모를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5년 동안 휴일도 없이 일을 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뭐라도 배워야 해. 자신을 다그치며 노량진에 있는 영어학원에 등록했지만 하루 종일 타자기 앞에서 노동한 나는 감겨 오는 눈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지켜내기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 후 7남매의 맏며느리로 두 아이를 낳고 집안의 대소사를 치러내며 시어머니께 음식을 배웠다. 또 다른 배움이지만 그때만큼은 먹고사는 일에 치중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세월이 흘러 두 아이 모두 대학에 보내고서야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꾹꾹 눌러 담았던 꿈들을 펼쳐 들고 상담 봉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방송대에 입학했다. 누구와의 의논도 없이 혼자서 결정한 일이니, 장학금을 받기 위해 밤잠을 설쳤다. 덕분에 4년 성적 우수자로 졸업하며 바로 청소년 상담사 자격증도 취득하여 인근 초등학교에서 상담교사를 했다.
거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대학원이라는 더 넓은 세계를 꿈꿔봤지만, 닫힌 문은 내게 쉬이 열리지 않았다. 치매가 찾아온 시어머니와 태어날 손주들을 위해서라면 잠시 멈춰야 했다. 그 와중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많은 고비고비를 지나오며 살아온 세월. 내 안에 숨어있던 이야기를 글로 풀어놓으며 또다시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다가오는 수능일, 7남매 중에 막내 시동생의 작은딸, 열다섯 번째 조카에게 마지막으로 수능 대박 기원 선물을 보내며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배울만한 곳은 없을까? 오늘도 대학가를 기웃대며 배움의 환승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