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든파티에 초대받던 날
바로 아래 둘째 동서가 회갑을 맞이했다. 그림 같은 집 한 채 위로 곧게 뻗은 소나무와 굴뚝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옅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이 집이 맞아? 넷째 동서와 들어선 곳은 상상하지 못한 그런 곳이었다. 생각 없이 잘 가꾸어진 잔디 위에 차를 주차하고 문을 두드리니 둘째 동서가 나왔다. 자주 보는 우리 사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두 손을 맞잡고 요란스럽게 환영 의식을 치렀다.
오늘은 칠 남매 중 4형제만 모여 동서의 회갑을 축하해 주기로 한 날이다. 하필 이날 문중 시제가 있어 모두 참석하고 띠동갑인 넷째 동서와 나는 음식을 돕기 위해 미리 초대한 목적지로 출발했다. 면허를 취득한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나의 운전 실력은 지금 살고 있는 도시를 벗어나기에는 형편없다. 운전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나인데 다른 도시의 초행길도 모자라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기에 긴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동서와 수다를 떠느라 내비 언니의 목소리는 자주 공중에 흩어지곤 했다. 다행히 많이 헤매지 않고 10분 정도만 꿀꺽하고 도착했다.
잠시 후 긴장이 풀리는지 눈치도 없이 배를 채워달라고 아우성이다. 하루 전부터 불리고 삶아 아침에 볶아서 가져온 고사리나물과 동서가 미리 준비한 배춧국과 밑반찬으로 셋이서 오붓하게 점심을 먹었다. 동서가 이미 밑반찬을 해 놓았으니, 가을빛이 물들어가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골프장 카트를 타고 돌아도 한참이나 걸리는 RPC 내의 풍경들을 온갖 수다를 떨며 걷고 또 걷다 황홀 지경에 빠졌다. 동서가 머무는 모양의 집들이 여러 채가 더 있었고, 거대한 RPC 건물들과 그림 같은 조경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이 대형 RPC에는 퇴직한 둘째 시동생이 근무하고 있다. 농산물과 관련된 공무원 소장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시동생은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바로 군대에 다녀오고 계속 다녔으니 무려 40년 넘게 근무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건만 세 아이가 모두 출가를 안 하고 있으니, 연금만으로는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퇴직 후에도 쉬지 못하고 이곳 개인이 운영하는 드넓은 RPC(미곡종합처리장은 주로 농가에서 수확한 벼를 대량으로 매입하여 건조, 저장, 도정, 선별, 포장한 후 유통하는 대규모 시설)에서 총괄 업무를 맡고 있다.
그런 시동생이 대견하면서도 때론 안쓰럽다. 시아버지는 결혼한 동생에게 후손이 없자 다섯 살밖에 안 된 둘째 아들을 양자로 보냈다. 자식을 낳아 키워본 적 없는 시작은 어머니는 그 어린아이를 머슴처럼 부려 먹었다. 고등학교 때가 돼서야 전기가 들어온 산골에 살던 시동생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무를 하고 불을 때서 쇠죽을 쑤었다. 이미 부모를 아는 나이에 집을 떠난 시동생은 외롭고 고단한 세월을 살아야 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사랑도 못 받고 자란 시동생이지만 키워주신 두 분이 가시는 날까지 병간호와 그 비용을 홀로 감당하며 온갖 고생을 다 했다. 나 또한 결혼하고 4년 동안 두 분이 가시는 마지막길을 함께 하며 시집살이의 설움에 겨워 눈물을 참 많이도 쏟았다. 그때는 시동생의 양자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은연중에 함구된 내용을 먼저 꺼낼 수도 없고 최근에서야 알게 된 내용이 더 많다. 지금도 그때 어떠했느냐고 물으면 여전히 웃음으로 대신하는 시동생. 나이 들어서도 일하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오너가 지원해 준 이 집으로 초대해 준 시동생이 고마웠다.
점심때가 지나자, 가족들이 도착하고, 조카들이 꽃갑연 준비에 돌입했다. 가을빛이 충만한 잔디 위에 새하얀 탁자가 놓이고 한쪽에서는 숯불이 벌겋게 제 몸을 태우며 선홍빛이 영롱한 소고기를 구워냈다. 탁자 위에는 세 명의 조카가 준비한 샐러드와 음료, 회갑 당사자인 동서가 만든 밑반찬과 내가 서둘러서 만든 꽃빵을 곁들인 고추잡채로 가득 채워졌다. 살다 보니 우리가 이런 가든파티를 하고 꿈만 같았다.
11월의 마지막 주 휴일은 따스했지만, 오후가 되자 두꺼운 점퍼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은 추워져도 분위기에 젖어 4형제의 가족들은 연신 맛있다며 조카들이 구워주는 소고기를 편하게 먹는데 나는 안절부절 어색하다. 40년 동안 누구를 위해 일을 하면 했지 편히 앉아서 상을 받아본 적이 많지 않다. 자꾸 일어서려는 나를 주저앉히며 앞접시에 고기가 식지 않도록 몇 점씩 가져다주는 조카들의 배려에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밖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조카들은 둘째 시동생이 이틀 전부터 장작을 가득 넣어 달궈놓은 황토방에 우릴 모두 가두어 버렸다. 아늑한 황토방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 자연스레 휴가지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놀던 때를 추억했다. 우린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여름만 되면 온 가족이 바다로 휴가를 떠났다. 숙소는 언제나 남편이 준비하고, 그 음식 준비는 모두 내 차지였다. 부대찌개를 끓이고, 삼겹살을 굽고, 수제비를 끓이고, 해물전 등을 부쳐 먹었다. 겁나 맛있었다.
그때는 누구도 고생했다고 고마웠다고 말한 적 없어도 서운하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그저 맏며느리기에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그때는 형수가 고생 많았다고 말해주는 가족들로 인해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렇게 뜨끈한 황토방에서의 이야기들은 끝없이 이어지고 우리의 추억들이 소환되어 그 밤을 데웠다.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하고, 배를 잡고 웃는 사이에 디저트 준비가 된 거실로 안내되었다.
케이크의 촛불 앞에서 얼굴이 벌게지는 동서를 보며 많은 생각이 스쳤다. 이 집 남자들의 성격을 가장 잘 아는 나이기에 그동안 잘 견뎌왔다고 토닥여 주고 싶었다. 다행히 나이가 들면서 아내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다정다감한 남편으로 변모해 가는 양 씨 남자들. 요즘에서야 우리 모두 이대로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본마음이 나쁜 건 아니지만 어쩌면 그렇게 4형제가 버럭 꾼에 삐지면 말도 안 하고 아내들의 속을 뒤집는지(남편은 삐지지는 않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여 더 화나게 함). 그 성정을 모두 맞춰주고 그 넘에 아들 타령에 애를 셋이나 낳고 류머티즘과 관절염에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동서. 이제라도 내 몸 보살피며 둘이서 오손도손 아름다운 이곳에서 행복한 날들이 이어지기를.
동서, 꽃갑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