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을 받아 들고
글쓰기를 배우기로 했다. 비록 시작은 미미했지만 쓰다 보니 2년 반이란 시간이 흘렀다. 무턱대고 혼자 걸어오며 부침도 많았던 길. 더 나아진 것도 없이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처마 끝의 풍경처럼 위태위태하게 이 길을 걸어왔다. 이렇게 쓰는 것이 맞을까. 여기에 이 단어와 문장이 어울릴까. 수많았던 고뇌의 시간들. 이제라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한 줄 한 줄 쌓아가고 싶어졌다. 이 길일까 저 길일까 망설이지도 뒤를 보는 일도 없이 배움으로 가득 채워 당당하게 걸어가고 싶었다. 드디어 여름의 끝자락 9월에 '나를 깨우는 글쓰기'라는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나름 용기도 필요한 일이었다. 딸의 재취업을 부축인 대가로 손주 돌봄을 하고 있다. 또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달려가야 하는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 어느 것 하나 걸리지 않는 것이 없지만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은 나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 생각했다. 9월 4일 목요일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빈노트를 가방에 넣고 두 정거장을 걸어가려는데 굳지~~~ 이 태워다 주시겠단다. 고마운 마음은 뒤로 살짝 접어두고 걸어가도 되는데 뭔 큰 일을 한다고 이러실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무심한 듯 시전 했다.
덕분에 조금 일찍 도착하여 조심스럽게 강의실로 들어서니 이미 몇 분이나 와계셨다. 뒤이어 강사님이 들어오시는데 옴마야! 완전 로또를 맞았다. 젊음이 넘치는 긴 생머리에 청포도처럼 연둣빛이 감도는 선생님. 게다가 맨 앞 책상 위에 쌓여가는 먹거리에 글쓰기를 배우겠다는 그 다짐은 어디 가고 잿밥에 더 눈길이 갔다. 궂은 날씨에 딱 어울리는 부추전에 삶은 감자, 유산균까지 푸짐하다 했는데 그다음 주에는 손수 만든 빵까지 아무래도 소원하던 몸무게를 달성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다.
나름 근사한 소개라도 해야 하나 걱정했지만 혼자만의 기우였다. 다행스럽게 여기며 수업에 들어갔는데 문집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미 기존의 수강생들은 준비가 된듯한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여름에 써 둔 글 한 편을 메일로 보내고 두 번째 시간이 되었다. 문집에 들어갈 글을 함께 읽어보는 시간이었다. 궁금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떤 글을 쓰셨을까. 아니 그런데 선생님께서 내 글을 제일 먼저 클릭하셨다.
목소리가 얇아서 뒤에 앉으신 분들은 잘 들리지도 않을 텐데 내 목소리로 읽어달라 하시니 당황스러웠다. 첫날부터 거절할 수도 없고 생목을 짜내며 데시벨을 키우느라 혼쭐이 났다. 그날따라 내 글이 왜 그리 길게 느껴지던지 어찌어찌 읽고 나니 큰 박수 소리기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글을 써 보신 것 같다는 말씀. 분명 좋은 뜻일 터인데 다른 분들의 글이 소개될 때마다 내 마음은 수분 빠진 감자처럼 끝도 없이 쪼그라들었다. 이미 몇 년씩이나 글쓰기를 배우셨다는데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게 합류했음에도 문집에 실어주시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쓰고 있던 글을 완성하고 또 한 편의 글을 밤늦도록 써서 퇴고도 못하고 메일로 보냈다. 설마 퇴고할 수 있는 시간은 주시겠지. 그럴 리가. 긴박한 일정으로 간신히 몇 자 수정하고 얼떨결에 완성된 문집이 내손에 들어왔다.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하였던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첫날부터 2주 만에 뚝딱 책이 나왔다.
세 번째 목요일에는 선생님이 문집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사 오신 케이크와 회원분이 새벽부터 일어나 만드셨다는 잡채, 삶은 감자, 초콜릿, 음료, 쑥개떡, 내가 만들어간 과자꾸러미까지 푸짐한 잔칫날이었다. 열정이 가득한 선생님은 마지막 날까지 편집자를 초빙하여 투고에서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는데 강의를 들으니 투고 기획안이라도 써보면 어떨까 하는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을 해보았다.
강의가 끝난 뒤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고 따끈따끈한 문집을 들고 사진도 찍었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며칠간의 일들. 어쩌다 꿈을 꾼 것처럼 아직도 긴가민가 헷갈릴 때도 있다. 다만 퇴고가 덜 된 나의 글 앞에서는 얼굴이 새빨갛게 타들어가다 못해 땅굴을 파고 싶다. 첫날부터 다정스럽게 말 걸어주시고 먹거리로 나를 감동시킨 글쓰기반 선생님들, 설익은 글을 문집에 실어주신 이 00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앞으로 나의 글쓰기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혼자서 씩씩하게 가겠다던 그 결심은 무너졌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무작정 쓰는 것보다는 글쓰기에 대한 기본을 익히고 좀 더 확장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배움도 필요하다는 것을. 늦은 감이 있지만 시작이 중요하다. 다음에는 또 무엇을 배우겠다고 나설지 기대가 되는 나의 삶이다.
이 글은 9월 말에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