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을 만나다

스피노자 '에티카'

by Tess

신고서점에서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사온 책이 있다. 그건 바로 강신주의 '감정수업' 이 책은 스피노자의 에티카 3장 "정서에 관하여"를 강신주의 언어로 풀이해놓은 것이다. 책을 읽으며 강신주와 스피노자의 사고를 찬찬히 따라가는데 "당황"이란 정서에서 꽂혔다. 요즘 내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황스러움'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강신주는 스피노자가 정의내린 '당황'이란 정서를 이렇게 정의내린다.

당황은 마음이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마비되고, 무엇을 해야 할 지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다르게 말하면 예상치 못한 사건이 순간적으로 나를 압도하고, 감정과 생각이 혼란 속에서 얼어붙고, 평소하던 판단 기준이 먹통이 되어버리는 상태이다.


즉, 보호막 없이 세계와 맞닥뜨릴 때 생기는 급작스러운 감정적 마비가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당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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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나의 경우로 바꿔보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와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어떤 사건을 통해 완전히 깨지는 경우를 만날 때 겉잡을 수 없는 당혹감을 느꼈다. 어쩔 줄을 몰라 멈출 수 밖에 없는 상태_ 그것이 최근의 나였다.



최근에 마음을 연 남자와 섹스를 했다. 전남편과 헤어진 뒤... '어짜피 헤어질텐데 뭐하러 관계를 만들어? 그런 건 없어. 사랑도 호르몬 반응일 뿐이고, 뭐든지 다 지난해지고 권태로워져. 그게 얼마나 사람을 피말리는지 나는 알지. 나는 앞으로 이런 것들을 하지 않을거야'라며 버석거릴 정도로 드라이했던 나다.


그런데 한 남자가 내 말을 주의깊게 들어주는 모습에, 또 나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보려고 하는 모습에 마음이 끌리는 거다. 이렇게 마음이 열리는 나도 신기한데, 잠까지 자버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여기서 나를 정말 당황스럽게 했던 모습은 섹스 후의 나다_


여름의 나는 기나긴 결혼생활에서 있었던 욕구불만을 해소해야한다며 원나잇도 하고 섹파도 만들어 살았다. 그런데 이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한없이 부끄러운 여자가 되어서 어쩔 줄을 몰라 숨어들어가는 것이다!!!

히연아!!! 이게 무슨일이니 ㅋㅋㅋㅋㅋㅋㅋ

얼마전까지의 나는 욕구를 풀기 위해서라면 어플로 남자를 만나 섹스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감정없는 섹스가 더 좋구나라면서 스스로를 신여성, 개방적인 여성 이라며 칭했다. 이게 내가 본 나, 되고 싶은 나였다. "욕망 앞에서 자유로운 여자.기꺼이 뭐든 해보는 여자"


하지만 정작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하는지, 섹스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두 다 까먹은 순진한 소녀/처녀가 되어있더라.

와... 이 모습에 나 스스로 어찌나 놀랐던지!!!

"나 왜이래?"하면서 그 당황감에 며칠을 숨어있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코나투스)이 방향을 잃고 제자리에서 잠시 멈춘 상태로.... 나와 잔 상대방도 정말 당황했을 것이다. 이 얘기를 들은 동네 친구는 '언니, 그 남자 먹버당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해요...'라며 상대방을 걱정할 정도였으니ㅜ


다행히, 며칠 후 정신줄을 붙잡은 나는 저 당황이란 감정 아래 깔려있던 '전남편을 떠나는 무의식, 붙잡고 있는 나' 등을 발견해 나아졌다. 당혹스러움 아래 깔려있던 정체를 찾아내니 차분함이 오더라. 그리고 이걸 설명했다. 이 지점을 알아들은 그 후엔 충분히 설명을 해서 지금은 괜찮은 상태다!


강신주는 위의 글에서 "당황이란 감정 밑에 깔려있는 맨얼굴의 욕망"이 이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인정한다. 나에게 있어 맨얼굴의 욕망은 15년을 함께 한 남자의 커다란 존재를 보는, 그렇게 안보려고 회피했던 당신을 보는 그리고 놓으려고 하지만 놓아지지 않는 큰 저항을 보는 거였다.

이게 다른 남자와의 섹스라는 사건으로 촉발된 거고, 그 덕분에 내가 싸앉고 살고 있던 여러 존재의 맨얼굴도 보게되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소녀스러운 모습까지도 ㅎㅎㅎ


당황이란 감정 덕분에, 나도 모르게 쓰고있던 가면을 한 겹 벗었다. 그런데 모르겠다. 내가 이 속에 쓴 가면까지도 좋아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의 나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살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내가 잃어버렸다고 상정하는 모든 시간을 품는 길로 가고싶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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