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의 지속
최근 제법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 '누구도 내 인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거야. 혼자 살다 죽는게 목표야'하며 굉장히 드라이하게 살았는데...사람 마음이 그렇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
그는 내 경계를 존중하고, 함부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사람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그 마음을, 그 의도 자체를 이해하는 것 같다. 이것이 나에게 큰 안정감과 안전하다는 감각을 준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몰려오는 감정에 (주로 두려움) 도망갔다가, 자신의 자리에 있는 이 남자에게 돌아가길 반복하고 있다.
이 패턴이 이 사람을 지치게 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조금만 좀 봐줘요, 기다려줘요'라고 표현하면서...
그렇게 매우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고 있는데, 이 만남이 나에게 다른 층위, 과거의 나를 만나게 하는 계기를 준다. 그리고 이 과거에는 절대 나만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많이 떠오르는 존재는 전남편이다.
"희연씨 목소리 너무 귀여워요, 매력적이에요"하는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어?! 내 목소리가 그렇게 들린다고? 나는 이 하이톤의 아성이 남아 있는 목소리를 튄다며 싫어했는데... "라면서 칭찬에도 멈칫한다.
그리고 이 지점, 내 목소리를 싫어하게 된 계기를 들여다보다, 전남편의 언어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크지 않지만 쏙쏙 박히는 음역대에 있는 내 목소리를 자주 단속하곤 했다. 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전남편은 까페같은 공공장소에서 신나서 "여보, 이랬다 저랬다" 하며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히연아 조용히 해. 다 들리잖아" 하면서 제어했다. 그때의 민망함이란...!
그런데 지금 만나는 사람(aka.아저씨)은 안그런다." 더 얘기해요, 듣기 좋아요, 스토리에 나오는 목소리 매일 듣고 있어" 라며 내가 가진 고유성을, 특이성을 봐주고 인정해준다. 여기서 오는 어떤 서러움과 고마움 모두가 있다.
"아! 내가 그러고 살았구나. 그러면서도 당신(전남편)이 좋다며, 나는 당신밖에 없다며, 그런 당신에게 매달리며 살았구나" 하며 과거의 나에 대한 안쓰러움이 올라온다. 그런 구도 안에서 끊임없이 나의 부분들을 포기하고 죽이며 산 어린 히연이 그렇게 짠하다.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전남편은 "꼭 써야겠어?" 하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만나는 아저씨는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글쓰는 사람이라며 멋있게 봐준다. 이런 상반된 사람을 만나며 나는 "나는 참 나를 표현하지 못하는 구도 안에서 나를 탓하면서 살았구나!"하는 서러움이 올라온다.
이런 감정은 지난 주_ 이 남자가 나를 뒤에서 안고있고, 나는 책을 보는 순간에 극도로 폭발했다. 그 손길이 그렇게 따뜻하고 묵직한데, 이 감각이 나의 빈공간, 구멍, 결핍을 제대로 건들였다. 그리고 이 자극은 순식간에 나를 전남편과 있던 과거로 데려갔다.
결혼 초부터 우리는 한 방에서 자되, 따로 잤다. 온도차이, 수면패턴의 차이등을 이유로 들면서... 온기가 느끼고 싶던 나는 한 번씩 그의 자리로 가서 "여보, 나 좀 안아줘"라고 했다. 그러면 핸드폰을 하고 있던 그는 나의 어깨를 한 번 잡고는 "자, 됐지? 백허그!"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그 가벼운 터치조차도 그렇게 좋아서 깔깔 웃으며 '나 여보 좋아'라며 애써 그의 귀찮아함을 외면했다.
이렇게 백허그가 터치라면서 깔깔 웃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켜켜이 쌓여서 외면해야만 했던 외로움이 보여서 눈물이 터졌다. 원가족과 살 때 뿐만 아니라 결혼을 해서도 나는 얼마나 혼자였던 것일까?
'너 정도면 복받았지, 감사해하라'라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내 감정을, 채워진 적 없는 근원적인 결핍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저 꽁꽁 싸매고 숨기고 살아야만 했다. 어쩌다 저 구멍에서 감정이 터져나오면 '너는 왜 이리 유난이니'하는 분위기에서 나를 탓을 하며 끝났다. 나의 이 처절한 생존방식이 보이자, 오래토록 쌓인 외로움과 절망감이 통째로 몰려오는데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팡하고 터진 나는 책 핑계를 대며 아저씨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따뜻함을 몰랐던 아이가 그걸 처음 느꼈을 때의 감정이 이런걸까?' 그 뒤로도 이 설움은 잦아들지 않아서, 며칠을 울컥하며 울고 다녔다.
원하는 것을 말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던 사람과 살던 나는, 이걸 말하지 않아도 채워주는 따뜻한 사람을 만나며 여러 층위를 왔다갔다 하는 중이다. '이건 어쩔 수 없어'라며 스스로도 포기했던 부분이 건들여지고, 채워지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중이랄까? 하지만 이걸 겪어본 적이 없기에 '내가 이걸 받아도 될까? 이 사람이 나에게 또 뭘 요구하면 어쩌지?'라며 의심과 두려움이 섞인 채로 아저씨를 대하고 있다.
이 만남이 나에게 새로운 국면을 여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아저씨를 만나고, 전남편의 언어로부터 많이 분리되는 것이 보인다. '벌받는거야'라는 사고방식, '이겨내야지'라는 언어는 내 것이 아니더라. 그건 철저히 전남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은 아니란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면 버려야지, 저 언어를 따를 이유가 없다.
요즘에는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가, 그 두 층위가 함께 존재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자 베르그손이 이야기한 시간개념이 삶으로, 피부로 와닿는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냥 흘러만 가는 것이 아니구나. 과거가 지나갔다고 해서 단순히 과거로써 끝나는게 아니구나. 시간이라는 것이 선형적으로 일자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고 쌓이는 것이라는 것, 내 안에 모두 쌓여있다가 현재라는 시점에 개입하는 것이란 것을 깊이 깨닫는 중이다. 그리고 이 과거란 것에는 나 홀로 존재하지 않고 여러 층위의 사람들과 섞여있다는 것도!
베르그손은 이를 지속(dureè)이라는 개념으로 풀이하며 시간 자체를 원뿔형태로 시각화했다. 그리고 그 원뿔을 과거부터 현재까지 쌓인 시간, 즉 무의식과 기억이라고 본다면 이 속에는 나만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존재, 비존재들과 여러 층위로 섞여있다. 왜 그 원뿔이 회오리모양인지도 이해가 되는바다! 크으><
현재에서도 과거가, 특히 전남편이 불쑥 올라올 때면 나는 혼란에 빠졌다. 이혼이란 결과가 발생한 뒤, 나는 전남편과 함께 한 시간: 연애를 포함해 결혼을 한 15년을 통째로 '잃어버린 시간' 취급을 했다. 떠올리기도 싫고, 조금만 건들여져도 아파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런 시간으로 말이다.
그때의 희연, 그런 선택을 내리고 살았던 희연을 미워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온전히 포용하지도 못한 채로 주변만을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자꾸만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과거의 히연, 어린 히연이 올라와 나와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봐야할 것을 보여준다할까? 너무도 방치되었던 희연을, 따스함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는 희연을, 나의 그림자를 비춰주는 것 같다. 이것도 나라면서 ^ ^ 그렇게 이 블랙홀을 대하는 중이다.
이건 생각보다 많이 아프다. 나만 미운 것이 아니라, 저런 구도에 둔 부모, 전남편을 비롯해 인생에 중요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딸려오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미워하는 것보다 나를 탓하는 것이 더 쉬운 사람이다. 이게 내 오랜 패턴이자 습이다. 그래서 요즘 꿈들이 전쟁터인가보다. 그렇게 싸우고 찌르고 방어하고 난리도 아니다.
그렇게 이른 나는 도망가고, 회피하고, 안보려고 했던 어떤 걸 마주하고 있다. 내 나름의 전쟁을 치루는 중이랄까? 동시에 귀엽고 완벽한 부부인줄만 알았던 우리의 실체를 보면서... 그 속에서 쭈그리고 있는 어린 히연을 구원하려 한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38살의 내가 어린 나를 봐주고 채워주려 한다.
글을 쓰는 지금도, 물리적 나이는 38살일지라도 어린 희연, 청소년기의 희연, 어제의 희연 등이 다 개입한다. 그런 모든 내가 나를 구성하고 있다. 이 층위 저 층위를 넘나들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참아야해, 강해져야해, 돌봄을 바라면 안되, 의존하지마!'라는 초자아의 목소리를 느끼고 끊어내면서.... 이런 작업의 끝이 어디일지 모르겠다. 얼마나 더 울어야 하는지도...
분명한 것은 서러움을 제대로 느껴주고나니,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경험을 계기로 나는 감정을 다루는, 느끼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옆에 있는 아저씨의 따스함도 받으면서 ^ ^
나와 관계 맺는 방식이 질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나와 한 시절을 함께 했던 전남편의 목소리에서도 분리되면서, 또 그 목소리에 지배받던 어린 희연을 돌보면서 진심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새로운 세상은 또 어떠할지? 봐야할 것을 보겠다. 진실을 찾으며 가겠다는 마음은 굳건하다. 가보겠다.
이게 내가 생각하고 실천하는 자기배려이다. 나는 여전히 어리고 상처받은 히연에 대해 무조건적인 애정을 주지 못하겠다. 하지만, 완전히 사랑하지는 못해도 외면하지 않는 것. 볼 것을 보되 휘말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배려이다. 그렇게 모든 층위의 나를 감싸안으며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