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이상스를 건너, 나로 생성되는 세계로

라캉에서 들뢰즈로: 나의 구조를 다시 읽다

by Tess


라캉은 "욕망은 결핍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그의 이론에 따라 나를 구조적으로 보는 작업을 해봤다. 나는 엄마에게 대상 a(object petit a)이다. 대상 a는 "욕망을 가지게 만드는 작은 잔여물로, 그 사람을 향하게 하는 결핍의 구조"이다. 이 도식을 나에게 대입해보면 엄마는 자신의 불안, 분노, 상처를 나에게 흘려보냈고 나는 그녀의 결핍을 매꾸는 대상으로 존재했다.



그 결과 나는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고, 원함을 채워주고, 그녀의 신경증을 안정시켜야 "사랑받는다"라는 도식에 지배받으며 살았다. 이 집에는 이 욕망을 받아줄 다른 존재가 부재했기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쭉 엄마의 욕망을 홀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할머니의 아들'로만 존재한 결과는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라캉에 따르면 아버지는 "엄마-아이의 밀착"을 끊어주는 상징적인 제 3자이다. 엄마와 나 사이를 분리해줄 '법, 경계, 제 3자'가 아버지가 해야할 기능이자 역할이다. 하지만 안재원씨는 지금도 아버지, 남편의 자리보다는 할머니의 아들의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버지의 개입이 실패한 곳에서 나는 엄마의 무의식적 파트너가 되었다.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뒤집어 쓰며, 깊고 깊은 상처를 갖고 자란 내가 있다.


요약하자면, 내가 자란 곳은 '어른이 없는 집'이다. 이 곳의 엄마는 '감정적 아기'이고 아버지는 '유아화 된 아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어리고 약한 위치에 있는 내가 '유일한 어른'이었다.



이런 구조에서 나의 욕망은 자동으로 금지된다. 돌봄을 받고 싶은 욕망 ,아이가 되고 싶은 마음, 보호나 따뜻함을 채우고 싶은 욕망은 금기시 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누군가를 돌봐주고, 요구를 들어주는 관계에서는 익숙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그것이 나의 '무의식적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타인을 통해 따뜻한 터치를 느끼자 바로 동시에 초자아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남자에게 안겨있는 품에서, 그 따뜻함에서 "아, 나도 좀 보호받고 싶어. 돌봄을 받고 싶어" 라는 마음이 올라오자, 나는 그것을 바로 죄책감으로 억눌렀다.


"정신 똑바로 차려! 너는 어른이어야해. 아직도 애처럼 굴래?"라면서 내가 나를 다그쳤다.



무의식은 "돌봄의 위치, 엄마의 파트너"를 내 자리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로 돌아가는 것이 나에겐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며, 라캉이 이야기하는 쥬이상스(jouissance)이다. 나는 돌봄을 받지 못한 어린 나, 그 결과 누군가 무얼 주려고 하면 의심부터 하는 나를 서러워하면서도 자꾸만 결핍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곳으로 가면, 익숙한 자리로 돌아왔다는 안정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쥬이상스이다. 이것이 내가 자꾸만 '아이의 자리-돌봄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자, 여기까지 나의 패턴을 잘 인지했다. 구조상으로도 파보았고, 내적으로 돌봄의 위치가 나에게 주는 쾌락/쥬이상스라는 것도 인정했다. 그럼 이렇게 본 뒤의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선택을 내려야할까?



들뢰즈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의 자아가 아니라 공명하는 여러 흐름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한다. 이것이 '각각 하나의 나 - multiplicity'이다. 그래서 관계는 내 안에서 여러 흐름이 서로 대화하고 갈등하고 화해하고 공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들뢰즈의 이 말에 적극동의한다.

내 안에는 여러 흐름이 있다.


돌봄을 갈망하는 아이,

'어른이어야해' 하고 윽박지르는 초자아,

몸의 감각,

과거의 희연,

사랑을 갈구하던 결혼 시절의 나,

현재 더 자립하고 싶은 나,

상처받은 나,

성장하는 나 등등 여러 갈래들이 수 많은 결합으로 생성되는 중이다.


고정된 것이 없다는 것- 이것이 나에겐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위로를 준다. 그래서 내가 들뢰즈에 그렇게 꽂히나보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라는 아이를 돌보는 자리에 있지 않아도 된다고...

엄마는 엄마의 자리로,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에 놓자고_

그리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도 된다고 말이다.


그 흐름 속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라고 그게 너의 길이라고, 그렇게 무쏘의 뿔처럼 가라고!

이게 내가 들뢰즈를 공부하는 이유다.

이번 주말에 부모님을 뵈러간다. 내가 있던 구조와 패턴을 제대로 파악한 나는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이혼 후, 부모님을 대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는데... 이번 주의 모임이 나에게 하나의 지표가 될 것 같다.

나는 얼마만큼 멀리왔는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말이다.


보자, 해보자!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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