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와 울프 그리고 레싱을 넘어서....
지난 가을 넷플연가에서 하는 번역모임에 등록했다. 이번주 토요일이 마지막 모임이라 가열차게 과제를 하는 중이다. 과제에 해당되는 책은 헤밍웨이의 'Cat in the rain'이다. 고양이를 원하는 와이프와 여기에 무관심한 남편(휴가에 와서도 내내 책만 보고 있다)의 대화를 헤밍웨이의 짧은 문체를 살리며 한국어로 옮겨야한다. 물론 나는 잘 못하는 중이다. 오히려 번역이란 걸 직접 해보니, 나란 사람은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기는 것보다 언어 자체에 관심이 있구나라는걸 깨달았다. 그래서 라틴어를 배우는 거다. 라틴어를 익히면 어원자체를 알게되니까, 언어를 볼 때 풍부하고 깊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헤밍웨이의 빗속의 고양이라는 단편을 읽고 또 읽으며, 문장을 고치는데 갑자기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라는 단편이 생각났다. 19호실의 수전은 결혼도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서 했고, 아이도 원해서 낳았으며, 생활도 안정적이다. 그런데 아무런 이유 없이 급작스럽게 무너진다. "왜 힘든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단계로 와, 19호실을 찾아간다.
이렇게 가부장적인 제도 안에서 내/외면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그린 것은 버지니아 울프와 맞닿아있다. 울프는 방을 사유와 창작의 조건으로 봤다. 그래서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울프는 그렇게 고독으로 들어가 자신의 사유를 언어화시키길 주장했다.
도리스 레싱은 '19호실을 가다'를 통해 울프의 주장에 대답한 것처럼 보인다.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있다면, 그 안에서 정말 자유로울까?"란 울프의 세계관에 그 다음 이야기를 보여준다. 결혼 이후의 여성 주체는 '혼자 있으려는 욕망이 실현되는 곳'으로써의 방이 필요하다. 레싱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실제 행동으로 방을 마련한 여성도...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호실에 혼자 있게 된 수전은 처음으로 자신의 실존을 마주한다. 그리고 거기서 무너진다. 울프가 기대했던 것처럼 방이 있다고해서 여성 주체가 모두 해방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전은 그 고요 속에서도 조용히 붕괴되었다. 고독에 주체가 잠식되었기 때문이다. 19호실에서 수전은 언어와 말을 잃어버린 상태에 갇힌다. 그리고 이 절망을 주권으로 옮겨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19호실은 창작과 실존의 공간이기를 바랬던 울프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한편으론 매우 현실적이고 다크한 공간이다.
19호실이 필요하다라는 증상을 겪은 나는 수전처럼 되지 않기 위해 발악을 한 것 같다. 나는 저런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한계에 부딪혀 무력감에 자포자기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수전의 선택은 자포자기보다 저항 쪽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죽음은 연약함이 아니라, 선택의 잔혹함으로 읽힌다.) 가부장제 안에서의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도 안맞고, 그렇다고 주체적으로 내 욕망을 따르며 살지도 못하겠는... 이 세계 저 세계 사이에서 끼인 채 사는 고통이 더 크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내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 것 같다. 19호실이라는 어떤 공간으로의 도피가 아닌, 나의 리듬, 중력이 존재하는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Cat in the rain에 나오는 우산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헤밍웨이의 빗속의 고양이에 나오는 여성(부인)은 요청만 한다. '고양이가 갖고 싶어. 은식기로 식사하고 싶어. 긴 머리를 갖고 싶어' 등등 뭘 하고싶다고만 이야기한다. 이런 요구를 들어도, 남편은 무심히 자신의 욕망- 책읽기에만 몰두한다. 요청가 들어지지 않자, 그녀는 다른 타자들을 향해 발화한다. 호텔 주인, 메이드 등등... 그리고 얻어낸다.(그런 위치에 있기도 하다) 비오는데 나간다고하니 우산을 씌워주고, 고양이가 갖고 싶다고 하니 구해다 안긴다. 그렇게 이 여자는 가만히 있는 채로 돌봄을 받는다.
이 소설의 우산은 보호일까? 차단일까? 우산은 비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지만, 동시에 비를 직접 맞을 기회도 차단한다. 이런 구도안에서 부인은 어떠한 경험도 할 수 없다. 19호실의 수전이 직접 방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고 들어간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오래도록 나는 저 우산 밑에서 살았다. 직접 겪어야 할 기회를 모두 잃은 채, "욕망을 말해. 다 들어줄게!"하는 세상에서.... 그런 흑백의 세상에서 쌓여가는 무력감과 절망 속에서 큰 고통을 겪었다. '내가 뭘 해도 안되는구나...'하는 큰 벽 앞에서 좌절하고 또 좌절했다. 결국 여러가지 신체적 증상으로19호실을 찾아야만 했을 때, 내가 있던 세상-구도가 무너졌다.
좋은 와이프, 딸, 며느리, 예비엄마, 개보호자만이 전부였던 구조에서 나온 나는, 말 그대로 온갖 비를 맞아야만 했다.(여전히 맞고 있다) 산성비, 유리비, 우박, 장마비, 부슬비를 맞으며 '이게 인생이구나. 이게 사는거구나. 나는 살아있어'라는 걸 모두 느끼고 경험했으며 배웠다.(여전히 진행중 ㅎㅎ) 나는 이게 너무 좋다. 이제서야 알게 된 세상이 너무도 무서우면서도 생생하고 선명해서 이 세계를 철저히 즐기고 있다.
이것이 요즘의 내 쾌락인 것 같다. 이렇게 접하게 된 비내리는 이 세상을 지키는 것, 이 곳에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렇게 내 세상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요즘 내가 가장 관심이 있는 분야다. 이것이 내 생존방식이라고 믿는다. 가부장제라는 메인 세계에서 벗어난 내가 그 틈을 비짓고 살아나려면, 19호실로의 도피가 아닌 어떤 것이든 '창조' 해야만 했다. 그것이 지금의 비내리고 비가 새는 세상이다. 이 곳에서 나는 고독이 무엇인지, 추위가 어떤 것인지, 척척함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하고 있다. 이건 라캉이 이야기하는 쥬이상스 그대로다! ㅎㅎㅎ
헤밍웨이는 Cat in the rain을 통해 구조 속에 갇힌 여자, 욕망하는 와이프, 무심한 남편을 그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들이 어떤 결단을 내리거나 행위하는 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Show, don't tell"이라는 그의 스타일 그대로다.
나는 이 소설 속의 여자가 고양이를 가졌어도 결핍이 충족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얻어낸 것이 아니므로.... 고양이는 가짜 충족물이며, 주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은 안된다. 이 곳에서의 부인은 진짜 세상으로 나갈 준비도 안되었을 뿐더러, 그럴 마음도 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의 공간이 필요함을 역설했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레싱이 한다. 여성의 내면적 균열을 끝까지 따라간 레싱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인물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끝은 주체적이지만 위험하게 보인다.
이 모든 여성을 보고 따라간 나는 또 다른, 제 3의 선택을 내리려고 한다. 이들과는 다른 시대에서 다른 배경, 지식을 갖고 자란 나는... 고독의 방에서 내 언어를 발화하고 있다. 그렇게 내 내면과 외부세계를 견고히, 피똥싸며 세우고 있다.
나는 더 이상 19호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비가 새는 이 세계에서, 젖은 채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 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