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a를 지우지 않는 사랑
흔히 말하는 연인관계를 시작했음에도, 한 번씩 아니 오히려 더 빈번하고 높은 강도로 전남편 생각이 난다. 크리스마스인 오늘도 솔직히 이야기하면, 애인보다는 전남편이 궁금하다. 여전히.. 한 번씩 '잘 사니?' 하며 소식을 묻고 싶다. 이게 우리가 보낸 15년이란 세월의 밀도와 강도같다.
전남편은 나에게 있어 20-30대를 함께한 나의 일부다. 나와 함께 성장한 가장 친한 친구이며, 동반자, 남동생, 보호자이다. 라캉에 의하면 그는 나에게 있어 대상이다. 엄마에게서 내가 대상 a가 되는 것처럼, 전남편은 나를 떠났기 때문에 결핍의 상징이 된다. 즉, 부재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정신적 세계에서(물론 물질의 세계 안에서도) 그는 가질 수 없는 타자, 상실의 대상이기에 더 큰 집착의 대상이 된다. 이런 구도에서 나는 전남편인 L군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려고 했던 주체성의 흔적이자 결핍을 상징하는 자리로 해석한다.
나는 지금의 아저씨를 좋아하게 되고, 조금은 진지하게 만남을 시작하면서 이 전남편의 자리를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저씨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남편과의 에피소드, 자연스레 일어나는 비교가 올라올 때마다 이를 꼭꼭 눌러 담고 애써 무시했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혼자 있을때면 터져서 울곤 했다. 그런 날엔 ...
"왜 나는 아직도 당신을 그리워하는거야? 여전히 너때문에 우는거지?" 하면서 이런 마음이 남아있는 나를 탓했다. 나는 정말 오지게도 이씨_ 당신을 청소하고 싶었다.
이렇게 아저씨를 향한 좋아하는 마음과 전남편을 향한 상실의 감정이 동시에 올라와 폭풍을 겪었다.(여전히 진행중이다) 이런 나를 보고 아저씨는 L씨의 자리를 애써 지우려하지 말고 두라고 했다.
나는 아저씨와 전남편이라는 두 남자가 내 안에서 수도 없이 전쟁을 벌인 끝에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이것이 나보다 12살 많은 남자를 만나는, 인생 경험이 많은 아저씨를 만나는 베네핏인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진 않지만, 조용히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다.
라캉적 관점에서 아저씨는 새로운 상징의 자리이다. 이 새로운 사랑은 기존 대상 a의 자리를 덮거나 대체하지 않아야 한다. 기존 a의 자리는 견고하고 고유하며, 여전히 내 중심에 있다. 그래서 이걸 새로운 대상으로 덮으려 하면, 대상 a와 이에 딸린 무의식이 어마어마하게 저항한다. 조금이라도 자기의 영역을 건들이는 것 같으면, 이빨을 들어내며 '여긴 내 자리야!!!'하며 난리를 친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의 자리를 a의 것과 분리된 곳에 새롭게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L군과 함께 했던 세월과 이에 엮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겠다며 의도적으로 노력한 것을 멈췄다. 그렇다. 나는 L군을 만났던 22살부터 헤어진 작년까지의 모든 세월을 스스로 '잃어버린 시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나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이 시간을 건들이면, 우리가 끝났다는 쓰라림과 허무함이 동시에 오기 때문이다. L군을 상기시키는 작은 것만으로도 너무나 아파서 어쩔 줄을 몰라, 모르는 척 덮어버리는 것이 내가 내린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의 과거를 없애거나 잃어버렸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려한다. 내 안에 살고 있는 L군을 죽이거나, 없었던 일인마냥 쓱싹쓱싹 청소하려하지 않으려 한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인정한다. 그래서 그가 보고싶어 한 번씩 몰려오는 그리움에는 항복하며 '어 왔니?' 하며 인정하고 그 마음을 품어준다. 그렇게 넘실거리는 감정의 파도를 타며 지켜보고있다. 언젠가 내 안에서 이런 시간마저 통합되기를 바라면서....
한편, 아저씨에게 새로운 자리를 주려고 했어도 L군의 것만큼 확실하진 않다. 여전히 경계를 세우며 지켜보고 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요구하는 타자인가?"
아니면 "나를 주체로 두는 타자인가?" 하며 날을 세우고 관찰 중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욕망을 나에게 펼치는 것 같으면, '잠깐! 나 지금 뭐가 불편한데?' 하면서 멈추고 묻는다. 이것은 대상 a의 무의식이 활개를 치는 것인가? 아니면 부모 투사가 일어나는 것인가? 혹은 이 사람이 나에게 뭘 요구한다고 느껴지는 것인가? 하면서 멈추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이런 나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좀 더 깊은 관계로 진전이 될 것이고, 그게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나를 고치려고 한다면 이것도 끝이 날 것이다. 환상이지만.. 내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존재는 L군이었다. 내가 가졌던 가장 소중한 것을 한 번 잃어본 나는, 그 뒤로 상실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다.
나는 밀착형 연인관계, 기념일을 챙기고 선물을 주고 받는 관계보다는... 각자 자기 세계가 단단히 있고, 필요할 때 공동구역에서 접속하며, 주도권을 자기가 갖고 있는 관계를 추구한다. 위의 것은 한 번 해본 걸로 족하다. 나는 두 번 다시 나를 잃어가면서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이 감각을 꾸준히 유지할 정도로 예민하며, 타인의 욕망을 파악할 정도로 똑똑하다.
크리스마스이지만, 하루종일 혼자있었다. 그렇게 어제 아저씨에게서 선물로 받은 반지와 케이크에 대해 부담스러워하는 나를 관찰했다. 묻고 또 물어가면서....
변한 내가 보인다. 중심엔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