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

출발점에 선 사람의 선언문

by Tess

최근 어떤 선물을 받았는데, 거기에 약간은 뚱한 반응을 보이는 내가 보였다.

그렇다. 나는 막 갖고 싶은 물건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친구들은 새로운 휴대폰을 갖고 싶어서, 혹은 옷을 사고 싶어서, 어디로 여행을 가고 싶어서.. 라며 알바를 하고 돈을 아끼곤 했다.

이들과 달리 나는 '안가질래' 하며 갖고 싶은 마음을 접는 쪽을 선택했다. 이게 나에게 훨씬 쉬웠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흔히 30대가 재무목표로 삼는 집, 차, 투자 같은 것들에 한 번도 관심이 간 적이 없다.



오래도록 나는 나의 이런 성향을 탓하고 살았다.

"나는 왜 남들과 다르지?"

"왜 나는 투자에 관심이 없지? 억지로 하려고 해도 안되지?"

"부모가 다 해줘서 그런가?"

"돈은 쓰면서도.. 왜 자산을 늘리는 것에 이토록 무심한건가? 이래도 되나" 하면서, 내가 물욕이 없는 부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졌다.



그런데 최근에 이 죄책감의 원인이 부모+전남편의 언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는 가난을 몰라서 그래. 너가 안겪어봐서 몰라. 너는 세상물정을 몰라. 너 돈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안되" 라는 말이 얼마나 조종의 언어인지!!!

이 구도에서 멀어지니, 내가 저런 말들에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확실하게 보인다.



저렇게 "너는 돈이 없어 본 적이 없어서 몰라" 라는 말은 가르치려 드는 언어이며, 상대가 우위에 서는 방식이다. 이걸 평생 듣고 자란 나는, 심지어 결혼해서도 전남편에게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은 나는 "내가 경험적으로 모자라구나" 라는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

오히려 돈이나 가난에 대해 결핍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지니면서 나는 '메꾸고 들어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넉넉했으니 -> 너를 이해해줘야 한다.

나는 풍족했으니 -> 너를 배려해야 한다.

나는 편안했으니 -> 너의 어려움을 받아줘야 한다.

나는 previleged 하게 컸으니 -> 내가 양보해야 한다. 라는 구도에 들어갔다.



정서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형편이 좀 나았다고 그걸로 previleged 하게 된 낙인. 그 안에서 나는 죄책감으로 양보하고 퍼주며 살았다. 늘 내 자신을 의심하고 미안해하면서 말이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핵심은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구조다. 즉, 우리는 보통 타인이 기대하거나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나 자신을 인식하고 느끼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부모의 기대, 전남편의 '넌 어려움을 몰라서 그래'라는 말 속에서 이해하고 맞춰주는 여성의 이미지를 내 욕망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이렇게 타자의 욕망을 내 것이라 착각하고 그 이미지에 맞춰주며 산 결과 조기폐경과 같은 신체반응과 불면증같은 정서적 어려움이 나타났다.



이제 똑바로 알겠다.

"나는 이해해줘야 할 책임이 없다"

나는 과거의 타자들(부모나 전남편)이 남긴 잔향에서 떨어져 나와, 나의 욕망의 자리를 찾기 시작한 상태다. 더 이상 타자의 욕망을 내 윤리로 삼지 않으려는 요즘, 나는 고요함과 공격성을 동시에 탑재한 채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내 본성인 '물욕이 없음, 이미 있는 것들 속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려온다.

나는 더 가지기보다 유지하는 것이 좋다. 내 정신과 육체를 소모해가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노동을 해 추가적인 돈을 버는 것보다.. 이미 갖고 있는 것들 안에서 밀도 높게, 퀄리티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그렇게 속도보다는 방향과 리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나는 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원하는 사람이다. 이런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 구도 안에서 이야기하는 자산증식, 성취, 파이어족, 소비, 과시 등에 영향을 받지 않더라. 내 욕망은 다른 방향을 향해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소모하지 않으면서, 베르그손이 이야기하는 지속(dureé)의 삶을 실천하고 싶다. 이런 고민을 하며 연말을 혼자 보내고 있다. 멈춰있지만 충만한 채로 ^ ^


최근에 이런 생각을 하며 많이 가벼워졌다. 남들의 가난이나 어려움을 보면 '나는 저러지 못했어..' 하며 priviliaged에 대한 죄책감이 일어났는데 이것에서도 벗어났다. 드디어 이해하고 양보해야 할 의무에서 놓여난 것이다.



동시에, 노동이나 월급이 나의 가치를 인정한다라는 세계관에서도 벗어나... 내년엔 멈춤의 시간을 가져야지란 아이디어에도 확신이 생겼다.

미추골절로 4일간 출근을 하지 못했으니, 방학때 4일간 더 나와서 매꾸라는 이런 직장은 나가야겠다며 말을 해놓은 상태다.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해주지 않는 이런 곳에 나의 시간과 노력을 넣고 싶지 않다. 이것이 내가 내린 판단이다. 이렇게 나의 기준을 하나 둘씩 만들고, 실천해보며 삶을 채워보려고 한다.

무직의 상태가 될 내년은 더 많은 경험을 나에게 허용하면서, 보내고 싶다. 나를 옭아매던 저런 목소리에서 멀어지면서 말이다.



나는 정말로 더 많이 가지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런 삶을 잘 살고 싶다.

나는 이렇게 이미 있는 것들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사람이다.

이런 나를 인정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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