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요즘엔 뮤지컬이나 연극과 같은 문화생활을 잔뜩 하고 있다. 어젠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라는 1인극을 보고 왔다. 보고 난 다음의 감상은 첫 번째로 "대단하다"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 + 사회자란 역할까지 해가면서 100분을 끌고가는데 정말 대단하더라. 무대장치도 특별할 것이 없다. 테이블 하나, 뒤에 영상을 쏘는 스크린 하나, 조명정도... ? 그런데도 한 청년의 죽음부터, 그와 관련된 가족들... 또 그의 죽음을 다루는 응급의학과 의사까지 다 담아낸다. 정말 위대하다.
AI가 영상물을 찍어내는 시대인 요즘, 눈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이 목소리와 표정을 바꿔가며 진심을 담아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내 손과 눈에서 휴대폰을 쳐다보지 않는 120분을 선물하는 것도!!!
극의 큰 플롯은 한 청년의 죽음(뇌사상태)과 그의 장기기증을 설득시키려는 응급의학과 의사, 그리고 이를 결정하는 부모의 고뇌로 이루어져있다. 이 극이 정말 인간적이라고 느껴진 것은 청년의 삶을 보여줄 때도 그와 친구들의 우정, 연인과의 관계를 참 디테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응급의학과 의사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떤 고민 끝에 응급의학과를 선택해, 장기기증의 여부를 판단하고 설득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장기를 기증 받는 사람의 삶까지...
그렇다. 인간은 이렇게 복잡한 존재인 것이다. 한 사람의 삶 안에는 수도 없이 많은 타자, 그들과의 무수한 연결망들, 또 비생명체와의 연결들이 모두 들어있다. 한 번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는 데,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모두 넣는다면... 한 사람의 삶은 나이를 막론하고 얼마나 얼마나 많은 접속의 접속으로 이루어져있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삶이 참 위대하게 느껴진다.
다시 극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다 보고 난 뒤의 감상은 '삶과 죽음에 층위를 두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최근 직장동료의 죽음을 전해들으며... 안타까워하는 시기를 보내고나니, 많이 담백해진 나를 본다.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닐까? 과연 고귀한 죽음이란 것이 있을까? 누군가의 죽음은 더 하찮고, 어떤 것은 더 비극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일단 삶이 끝났다는 것 자체_ 그것으로 끝 아닐까?
종결된 일에 대해, '장기기증을 한 삶은 더 고귀하고, 직장동료처럼 병을 방치하다가 간 죽음은 더 비참하다'라면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의 연장으로... 죽음에 대해 붙는 언어들은 그 죽음을 설명하기보다, 남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어쨌든 죽음이란 가버린 사람의 몫이 아니라, 산 사람이 처리해야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처리되는 죽음'의 풍경은 다양하다. 직장동료처럼 여전히 영안실에 안치되어있는 것이 있는가하면, 극중의 시몽처럼 장기기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 장기기증에 '고귀한 선택'이란 걸 덜어내고 있는 그대로 보려고 했다. 그러자, 장기기증이란 것이 인간을 참 기계화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액, 항체여부 등을 비교하고 매칭이 되면 정교한 수술을 통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바꿔넣는다는 것! 그것이 신체를 메인엔진과 부품들... 이렇게 부분 부분으로 분석해 기능에 따라 기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극에서도 뇌사판정을 받은 청년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고 있다. 그는 어떠한 인지도 못하기때문에 사망판정을 받았지만, 그의 신체에 혈액과 산소를 전달하는 심장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 기계적으로 심장이 펌프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생명이란 어디에 달려있는 것일까? 두뇌? 심장? 혹은 정신? 무엇이 나를 살아있다고 정의내리게 하는 것일까?
그렇게 시선을 '삶'으로 갖고 오면, 이것이 수 많은 죽음들과 붙어있음을 볼 수 있다. 고기를 먹고, 우유를 마시며, 가죽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 등등.. 인간뿐만 아니라 수 많은 비인간종의 삶과 죽음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이 내 삶이다. 꼭 동물만이 아니다. 식물... 그보다 작게는 미생물까지... 내 몸에서는 많고 많은 삶과 죽음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장기기증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살리는 것과도 비슷하다. 누군가가 죽어야만, 그 장기를 산 사람(아픈이)에게 이식할 수 있다. 죽음이 일어나야만 내 생명의 연장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는 상실로 내 삶이 연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삶을 수선하고 싶을까? 극이 던지는 것은 이 질문같다. 살아있는 삶은 어떻게 수선할 수 있을지? 이 죽음으로 구성되어있는 삶을 어떻게하면 매일매일 수선하며 살 수 있을지? 묻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이 타인, 타자들의 죽음으로 이뤄져있으니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야한다. 혹은 비건을 실천해야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물론 공장식축산업이나 모피사업에는 대반대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싶을 뿐이다.
이 살아있는 삶을_ 조금이라도 수선해 살 수 있다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라고...
이 연극을 보며 가장 감동적이다/인간미넘친다라고 느낀 부분은 심장을 받기로 한 심근염환자가...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하는 장면이었다. 숨이 차 헉헉대면서도 "나는 당신에게 고맙다고 말하지도 못하는군요!"라고 독백을 내뱉는 부분_
여기서 삶과 죽음이 붙어있다는 것이, 그 연관성이 한 번에 파악되었다.
이 얼마나 인간적이란 말인가?! 나는 "살기 위해" 그 심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선 누군가가 "죽어야"한다는 것이....
그렇다고 그 심장을 거부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이 사실에 괴로워하면서도 이식을 받으러 수술대에 눕는 것은 참 모순적이면서도 인간의 복잡한 면을 보여주는 그 자체라고 느꼈다.
나는 이미 예전에 장기기증을 서약해놓은 상태다. 라식수술을 받은터라 각막을 빼곤, 쓸만한 장기는 다 써도 된다고 신청해놨다. 그러면 운전면허증에 '장기기증'이라고 프린트되어서 나온다.
나에겐 장기가 문제되지 않는다. 직장 동료의 죽음을 본 뒤에는 시신기증까지 하려는 마음까지 든다. 누군가 내 죽음을 처리하지 않기를... 그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삶과 그 후의 죽음까지도 내가 주체로 책임을 지고 싶다.
질문만 던졌지, 삶을 수선해 사는 방법은 모르겠다. 그 답은 한 번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닐거다. 요즘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그 애매모호한 상태를 버티고 있다. 그런 근력을 기르는 중이다.
삶과 죽음 그리고 수선에 대한 질문은 정말 거대하다.
어떻게 죽을까는 어떻게 살까와 맞닿아있고, 나는 이 질문의 끄트머리를 붙잡으면서 숨쉬고 쓰고있다.
퇴사날이다. 삶은 여전히 괴롭다. 그렇게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