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대 잔뜩 넣어 얼큰하게 끓인 닭개장 한 그릇이면
어머님에게 잘 발라진 닭고기 한점을 얻어 먹던 날
“어머님이 이상해. 기억력도 나빠지고, 아침 드셨는데 바로 배가 고프다는 거야.”
“노인들이 자꾸 잊어버리고, 기억을 못 하는 게 당연하지. 드시고 싶은 게 많으면 좋은 거지. 간식도 잘 챙겨드려.”
남편과의 대화였다. 남편이나 시동생의 말도 맞았다. 노인들이 생일이나 동네 이름을 잊어버릴 수 있고, 식욕이 좋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며느리가 나서서 ‘어머님이 치매 인 것 같다.’고 나설 수가 없었다.
20년의 결혼 생활 중 어머님이 절반은 우리와 같이, 나머지 반은 시동생과 같이 살았다. 우리와 같이 살다가 시동생이 이혼을 하고 어린 아이를 혼자 키우게 되어 어머님이 시동생네의 살림과 아이를 맡아 주셨다. 시동생의 집은 같은 아파트의 앞동에 살고 있으니 1분 거리였다. 그러니 같이 살고 있지 않지만 며느리로서의 임무가 줄어 든 것은 아니었다. 아이의 병원 진료, 유치원 생활 등을 챙겨주는 것 등 오랜시간 나의 불만을 알고 있는 남편은 내 말을 또 다른 불평쯤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닭개장 끓이게 닭 한 마리 사와라.”
결혼을 하고 어머님과 같이 살면서 ‘닭개장’은 반가움과 동시에 얼굴을 찌뿌리게 하는 음식이었다. 결혼전에는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는데 나중에 어머님이 준비하고 닭개장을 끓이는 모습을 보고 ‘아, 육개장에 소고기가 아닌 닭을 넣는구나.’했다. 직장을 다니며 맞벌이를 하느라 어머님이 가족들의 식사를 챙겨 주셨다. 닭개장은 어머님의 주특기 중의 하나로 남편도, 같이 살고 있던 시동생도 무척 좋아했다. 물론 내 입맛에도 딱 맞았다.
큰 냄비에 닭 한 마리를 푹 삶는다. 그 사이 가스렌지의 한쪽에는 물을 끓여 잘 불린 토란대를 삶았다. 토란대는 삶는 시간이 맞지 않으면 아린 맛이 난다는 말을 했고, 가끔 뒤적이다가 토란줄기를 하나씩 건져 상태를 봤다. 잘 익은 토란대를 찬물에 헹구고, 숙주도 살짝 데치고, 양파와 대파를 썰었다. 특히 닭개장에는 대파가 많이 들어갔다. 어머님은 굵은 대파를 검지손가락 길이만큼 잘라, 반을 쭉 가르고 한 두번씩만 썰어 놓았다.
그 사이 잘 익은 닭은 건진다. 위생장갑을 끼고 닭을 발라낸다. 푹 삶아진 닭은 결대로 쭉쭉 잘 찢어진다. 이때쯤 어머님의 손에 의해 해체된 닭고기가 넓은 접시에 수북해질 사이도 없이 남편과 시동생이 모여든다. 젓가락도 없이 살짝 소금을 찍어 따뜻한 닭살을 연신 입으로 가져간다. 어머님은 “닭개장은 원래 닭 국물이 진하게 우러난 맛이야. 고기는 조금만 있어도 되니 얼른 따뜻할 때 먹어봐라.”한다.
남편은 “경상도 산골에서 살때는 일년내내 보릿고개고, 매일 쉬지 않고 일해도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이었지. 어쩌다 늙은 노계라도 잡는 날에는 가마솥에 오랫동안 닭을 삶아 닭개장을 끓였어.”라고 말한다. 고기가 귀해 자주 해먹지 못하던 시절이니 닭개장을 끓이는 날이 그나마 닭고기를 몇점 먹는 날이라고 했다.
어머님의 닭개장의 맛에 반했는데 닭한마리를 삶아 남자들에게 일단 결대로 잘 찢은 닭고기를 먹게 하니 정작 닭개장에는 고기가 얼마 없다. 그 이후 난 닭을 두 마리 사왔지만 어머님은 “무슨 닭개장을 끓이는데 닭을 두 마리씩이나 넣어. 며느리 손이 너무 커서 걱정이야.”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니 닭개장은 내게 좋아하면서도 서러운 음식이 되어 얼굴을 찌뿌리게 만들었다.
남자들이 한차례 먹고 난 닭고기와 미리 준비해둔 토란대를 비롯한 야채를 큰 양푼에 합쳐 담았다. 다진 마늘, 국간장 그리고 밀가루 두 세 숟가락을 넣어 버무렸다가 진하게 우러난 국물에 넣고 몇분간을 끓여야 완성하는 닭개장이다. 어머님표 닭개장은 얼큰하고 개운하다. 뜨거운 여름 땀을 흘리며 먹으면서도 ‘시원하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한다. 건더기를 젓가락으로 건져 먹고,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없던 기운도 솟는다.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큰 아들이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이나, 작은 아들이 취직시험에서 떨어진 날도 식탁에 올라와 보양과 위로의 음식이 되기도 했다.
어머님이 손이 절실히 필요하던 시동생의 아이가 많이 자라서 혼자서 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시동생이 새로운 연인을 사귀게 되었다. 어머님을 모시는 일이 시동생도, 큰 형인 남편도 부담이 되었다. 남편이야 맏며느리인 내가 모시길 바랬지만 난 십년 넘게 어머님과 살다가 그제서야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느라 선뜻 ‘내가 모셔올 게.’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님은 형제들의 이런 곤란을 알고 계셨다. 형제들은 서로 돌아가며 모시기로 했다. 자식들의 결정을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였지만 어머님의 밝은 표정을 자주 볼 수 없었다. 안절부절 하는 것 같고, 가끔 노여워 하며 한숨을 쉬셨다.
어머님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다. 매일 보는 자식들은 아주 조금씩 진행되기에 알아채지 못했다. 치매였다. 자식들이 치매로 깨닫고 받아 들였을때는 진행이 많이 되었다. 나이들면 기억력이 나빠지는 거라고, 국에 간을 못 맞추고, 갑자기 화를 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아마 우리 어머님이 치매라는 사실을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한밤중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이 이불에 소변 실수를 하셨다. 이때가 시작이었다. 한번 시작한 이런 일들은 빈도가 잦아 졌다. 소변은 대변이 되고, 기저귀를 찼더니 아예 볼일을 거부하셨다. 가스렌지를 켜놓고 냄비를 태우는 일, 옷을 다 꺼내 보따리를 싸거나 간식으로 챙겨 둔 식탁의 바나나를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잊기도 했다. 골다공증이 심해 거동마저 불편해 요양등급을 받아 요양보호사가 하루에 4시간씩 집에 왔지만 나머지 시간은 역부족이었다.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했고, 잠깐 다른 볼일을 보고 들어오면 꼭 무슨 일이 생겼다.
냉장고를 열어 모든 음식을 쏟아 내고, 세제를 입으로 가져가 큰일이 날 뻔했다.
어머님이 집안일이나 음식에 손을 놓는 일이 많아지던 어느날 이었다. 난 처음으로 닭개장에 도전해 보았다. 결혼 20년동안 어머님의 닭개장 끓이는 모습을 많이 봤으니 자신있었다. 닭 한 마리를 사와 푹 삶았다. 국물을 내는 동안 토란대를 삶고, 숙주를 데치고, 대파와 양파를 썰었다. 온 집안에 닭고기 냄새가 진동을 할 즈음 닭을 꺼냈다. 그때였다. 어머님이 자연스레 위생장갑을 끼고 뜨거운 닭을 식혀가며 살을 발랐다. 남편도 나도 놀랐다. 치매라고 해서 24시간 인지능력이 없는 게 아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빨래도 잘 개고, 설거지도 해주고, 잡곡밥도 맛있게 해주셨지만 닭고기의 살을 발라 주실 줄은 몰랐다. 닭다리에서 크게 살을 발라 남편에게 내민다. “아범, 아~해라. 그다음 우리 장손한테 할미가 줘야지.” 그러더니 나에게 닭고기 한 점을 건넨다. “애미도 먹어라.” 그동안 그렇게 많은 닭개장을 끓여도 나를 챙긴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어머님이 내민 닭고기를 먹어 보게 되었다.
사실 그날 낮에 어머님이 잠깐 사이에 기저귀를 빼고 거실에서 볼일을 봐서 너무 답답한 마음에 화를 냈었다. “어머님, 한번만 더 이러면 요양원 알아볼 거에요.”라고 말이다. 어머님은 그 말을 기억하고 계신 걸까. 그래서 내게 닭고기를 건넨 걸까. 애쓴다고 주신 걸까. 죄송한 마음에 눈물도 삼켜야 했다. 넘어가지 않는 닭고기를 억지로 삼켰다. 그날 닭개장이 맛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평상시보다 약간 맵게 되었는지 어머님이 드시면서 유난히 매워하며 재채기를 몇 번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날 이후로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어머님은 드시지 못했다.
결국은 몇 달뒤 어머님을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내가 밀어 붙였다. 이대로는 지낼 수 없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남편도 시동생도 이제는 때가 왔다고 결정을 내렸다. 우리가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아 자주 찾아 뵐 수 있는 곳, 가격보다는 시설이나 환경이 좋은 곳을 고르며 죄스러움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요양병원 5인실에 어머님을 두고 나오는 길에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재촉했다. 어쩔수 없다며 어머님의 눈물 가득한 표정을 고개를 저으며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8월이면 어머님이 요양병원으로 가신지 2년이다. 자식들은 무섭도록 빨리 적응했다. 어머님의 치매의 속도도 무섭도록 빨리 진행됐다. 아들의 얼굴을 몰라 보고, 밥 먹는 순서를 잊고, 죽을 넣고 입안에서 씹는 법도 잊으셨다. 물도 잘 못 넘겨 이제는 콧줄을 달고 계신다. 그래도 자식들은 어머님이 잘 버텨주셔서 감사하다.
주말에는 닭개장을 끓여야겠다. 잊어버리기 전에 어머님의 레시피대로 자주 도전해 봐야지. 이번에는 닭을 두 마리를 사서 시동생 가족도 불러야 겠다. 그날은 실컷 닭고기를 먹으며 어머님 흉도 봐야지. 그럼 시동생과 남편은 “우리 엄마는 천사표였지.”라고 어머님편을 들겠지. 토란대 잔뜩 넣어 얼큰하게 끓인 닭개장 한 그릇씩 먹고, 사회라는 전쟁터로 뛰어 나갈 힘을 얻는 게 어머님이 무엇보다 바라는 일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