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3. 포기, 하시겠습니까?
큰일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가슴이 벅차다는 말, 활자로 기록하는 것도 입 밖으로 내뱉는 것도 참 많이 해왔지만 그날 아침만큼 실로 와닿은 때도 없었다. 아나운서 공채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 걸었던 여의도 KBS 주차장 옆 길을, 그날은 라디오 프로그램 고정 게스트로서 내딛고 있었다.
은행에 취업을 하고 대기업 마케팅을 기웃거리다가, 공기업에 취업을 하고 나서는 나 스스로도 더 이상 방송국 근처에도 올 일이 없겠다고 체념했다. 뉴스에 아나운서, 기자가 된 지인이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눌렀던 걸 보면, 미련은 남았던 것 같지만. 미련이 남으면 뭐, 어쩌라고! 언론사 취업 카페를 들낙날락하다가 애꿎은 스마트폰만 내동댕이쳐졌다.
중학생이 되면 영어에서 ‘능동태’와 ‘수동태’를 배운다. ‘철수가 영희에게 사과를 줬다.’라는 능동태 문장을 수동태로 바꾸면 ‘사과가 영희에게 주어졌다. 철수에 의해서.’라는 문장 구조가 된다. 처음에는 사과를 주는 행위를 한 ‘철수’에게 힘이 실리는 느낌이었다면, 후자에서는 ‘사과’에 힘이 실리면서 이동 경로를 주목하게 된다.
2013년도의 나는 KBS 아나운서로서 공채 시험에 응시했다. 그리고 2020년 9월, 정확하게 7년 뒤 라디오 프로그램 고정 게스트 섭외가 나에게 들어왔다. 능동의 형태로 내가 손을 내밀었던 방송사에서, 거꾸로 나에게 수동의 형태로 기회의 손을 내민 것이다. 매주 목요일 아침, 그 길을 걷는 행위는 지난 시간들이 결코 땅에 헛되이 떨어지지 않았음을 상기시켜줬다.
사실 그 길을 걷기 전까지, 머릿속으로는 이미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유튜버가 되기 위해서 퇴사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새 유튜브 채널은 나의 훌륭한 포트폴리오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금융’ 키워드는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은행에 다녔던 경력을 바탕으로 ‘전직 은행원의 팁’이라는 시리즈로 여러 콘텐츠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KBS 조우종의 FM대행진’ 제작진 역시 그 영상들을 보고 나를 섭외한 것 같았다.
문제는 나의 롤이었다. 나와 동명이인인(성은 빼고) 김희애 배우가 주연이었던 ‘부부의 세계’에서 착안하여 코너 이름은 ‘부자의 세계’로 정해졌고, 나의 롤은 ‘금융전문가’였는데 과연 내가 스스로 금융전문가라 칭할 만한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 거다. 프로그램 MC로서 카메라 앞에 선 경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해진 대본을 그럴듯하게 읊는 수준이었으니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욕심을 내려놓고 출연을 포기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점점 부풀었다.
결국 피디님께 미팅을 요청했다. “출연료는 이 정도는 받아야겠습니다!” 따위의 호기로운 요구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만일 내가 생방송 중에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걱정을 덜고 싶어서 담당 PD님에게 사전 미팅을 청한 거였다. 당시 FM대행진 담당이었던 G피디님께는 아직도 감사하다. 대본 작성 과정에서 충분히 내용에 대한 논의를 할 것이고 애드리브는 크게 없을 것이라며 혹시 모르는 내용이 나오더라도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나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셨고 덕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대국민 사과까지는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첫 정’, ‘첫사랑’, ‘첫 경험’ 등 처음에 대한 애착은 실로 대단하다. 나의 첫 고정 프로그램이었던 FM대행진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고향 같은 프로그램으로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출근길 9호선에서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역을 하나 지나치는 바람에 생방송에 늦을까 싶어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기억마저 봄날의 햇살 같다.
이번 주말에는, 라디오 부스로 들어가는 KBS 1박 2일 계단 앞을 가봐야겠다.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