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세계를 읽다 3
서동은 전북 최초의 시인이자 노래꾼이다!
한강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문학계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기쁨의 도가니에 빠졌다. 매일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수많은 이야기가 생성되는 세상에서 작가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사건과 사고 그리고 이야기를 새롭게 창조한다. 작가가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야기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 누군가는 작가가 꾸면 낸 거짓 이야기에 뭘 그렇게 헛심을 쓰냐고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짓 이야기가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우리에게 와닿는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진실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사랑과 증오, 고통과 좌절, 성공과 실패, 배신과 의리 등등 그 어느 하나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없다. 책을 읽으면 감동받고 무지와 잘못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니 작가라는 직업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김승희 시인은 아홉 번째 시집을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 폐허에서 쓰러지기 직전에 가끔은 말의 에피파니(epiphany)를 꿈꾸기도 했다. 신은 시인에게 언어와 언어의 꿈을 주었기에. 결국은 말의 에피파니가 부서진 세계와 영혼의 병을 구원하는 것일까? 거기에 그리움이 있었고, 희망의 빈혈로 너무 아플 때면 우리말을 부여잡고 우리말에 기대어 울어보기도 했다.
간신히, 희망!
정말 희망은 우리에게 마지막 여권, 뿌리칠 수 없는 종신형인가 보다."
김승희 시인의 말처럼 문학창작자는 언어로 부서진 세계와 영혼을 구원하고자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내야 하며 희망이 흐릿해지면 질수록 우리말에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희망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매력적인 길을 걸었던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작가는 누굴까. 아마도 유리왕이 아닌가 싶다. 유리왕이 치희부인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고 슬픔에 젖어 있을 때, 암수 정답게 노니는 꾀꼬리를 보면 얼마나 부러웠을까. 또한 자신의 신세가 얼마나 한탄스러웠을까. 점점 자신에게 짙어오는 고독과 이별의 상처는 시로 피어난다. < 펄펄나는 저 꾀꼬리 / 암수 서로 정다운데 / 이내 몸은 외로워라! / 뉘와 함께 돌아올꼬>. 시를 읊조리다 보니 최초의 서정시답게 유리왕의 감정이 오롯이 묻어난다.
슬픈 이별 정한을 노래한 황조가가 있다면, 달달한 연애시인 서동요가 있다. 최초의 연애 시인을 뽑는다면 단연코 서동이다. 훗날 백제 무왕이 된다. 그는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서라벌에 잠입하여 선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한 일을 감행하는데, 마침내 그 둘의 사랑은 알다시피 성공한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 노래, 생각만 해도 뭔가 딱 하고 느낌이 오지 않는가. 서라벌에 겁 없이 노래했을 서동을 생각하면 서동요를 불러보자.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두고/ 맛둥 도련님을/밤에 몰래 안고 간다>. 아니 이럴 수가, 자꾸만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사랑의 세레나데와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 든다. 서동은 자신이 꾸민 짓을 선화공주 탓으로 돌리고 있지 않은가. 서동의 주도면밀한 계획 속에 불려진 서동요는 선화공주를 남자에게 빠져 사리분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표현돼 있다. 어찌 사랑하는 여인을 불명예스럽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서동의 꼼수에 그만 입이 딱 벌어져서 다물어지질 않는다. 남자의 치졸함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하지만 역사상엔 무왕을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하고 선화공주와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설화를 보면 꼭 서동을 그렇게 부정적인 인물은 아니었나 보다. 어쨌든 서동요는 국경을 초월한 사랑 노래로 목숨을 걸고 마침내 사랑을 완성시킨 노래인 만큼, 시공간을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여전히 드라마, 영화, 뮤지컬에도 자주 작품화되는 것만 보아도 서동요가 흡인력 있는 작품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다.
서동은 전북이 낳은 최초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가 익산 금마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마를 팔아 생계를 꾸려갔을까. 그에 대한 출생배경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의문은 미궁 속으로 빠지고 호기심은 더욱 깊어진다. 다만 왕의 혈육이지만 평민으로 신분을 위장해야 했던 사실만으로 그들의 존재가 누군가에 상당히 거슬렸던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을 제거하려는 정적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의 눈을 피해 익산 금마로 이주하여 새로운 백제의 미래를 꿈꾸었던 것일까.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동의 어머니는 못 가에 사는 과부로 어느 날 못에 나타난 검은 용과 통정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의례적으로 용은 왕을 상징하는 바, 그렇다면 서동의 어머니는 왕과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 서동의 어머니를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은 큰 실수일지 모른다. 나름대로 궁중생활과 귀족 상류층의 삶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녀가 평범한 아낙네로 어떻게 살았을까.
백제는 수혈창고, 목곽창고, 석곽창고를 만들어 잉여 생산물을 보관했다. 그럴 정도면 먹거리도 꽤나 풍부했을 것이고 음식문화 또한 상당히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분을 감추고 평민처럼 살았을지언정, 왕을 가까이 모셨을 그녀가 보고 맛본 음식은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특별함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만이 절대 미각을 가진고 하지 않는가. 그가 기억하는 맛을 평민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재현했을지 무척 궁금하다.
당시 익산 금마는 산과 들이 있어서 임산물을 비롯하여 채소를 용이하게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춘포, 성당포구, 웅포 곰개나루가 금마와 인접하고 있어서 먹거리를 비롯한 물자를 구하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곰개나루는 백제 시대에 금강을 따라 내륙수로로도 이용되었으며 산성이 널리 분포되었고, 서해의 수산물의 집결지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웅포 곰개나루는 5대 포구 중의 하나였을 정도 그 역할이 대단했다. 따라서 금마는 닭을 비롯한 조류, 곡식류, 채소류, 해산물을 고루 확보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금전적인 여유가 서동에게 허락되었다면 왕실에 버금가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백제 시대에 주요 생산물로는 쌀, 보리, 밀, 기장, 조, 피, 메밀, 콩, 팥, 깨, 녹두 등의 곡식류와 아욱, 고사리, 미나리, 참나물, 기름나물, 근대, 쑥. 냉이, 무, 박, 가지, 토란, 칡, 오이, 마늘, 부추, 파, 상추, 연근 등의 채소류가 있었다. 과일류로는 감, 개암, 밤, 도토리, 호도, 대추, 복숭아, 살구, 배, 사과, 머루, 잣이 있었다.
백제 유적지에서 곡식류, 동물과 어류의 유체가 발견되었는데, 돼지, 소, 말, 개 등의 유체는 많고 출토된 반면에 닭이나 오리 등의 유체는 상대적으로 덜 출토됐다. 가축으로 사육했던 동물은 쉽게 먹을 수 있었지만 사냥을 해서 얻어야 했던 동물은 상대적으로 덜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외에도 야생동물인 사슴, 여우, 살쾡이, 오소리, 쥐, 꿩, 오리, 산비둘기, 솔개 등도 백제인들에겐 훌륭한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천마총에서 달걀 껍데기가 출토된 걸 보면 닭을 가축으로 기르면서 댤걀까지 식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물추, 낚싯바늘, 어류 유체를 발견된 것을 볼 때, 백제인들은 수산물을 즐겨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어, 농어, 방어, 넙치, 가오리, 상어류, 민어, 준치, 멸치, 굴, 우럭, 백합, 홍합, 전복, 꼬막, 키조개 등등을 서동은 시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시대에 사용한 조리 도구를 살펴보면 어떤 음식을 만들었을지 추정해 볼 수 있다. 절구, 디딜방아, 맷돌, 도마, 칼, 이동식 부뚜막, 조리용 토기로는 깊은바리, 계란모양토기, 시루등으로 보아 밥과 죽, 반찬, 국과 찌개, 술, 등을 다양하게 조리한 것으로 보인다.
공동취사 방식에서 각각의 주거지마다 개별 취사로 전환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부뚜막을 중심으로 마실 물과 취사와 세척에 필요한 식수가 대형 항아리를 많이 놓았다. 부뚜막에 물을 담아둔 대형 항아리를 비롯하여 작은 항아리들도 발견되었는데, 조리할 때 넣어야 하는 조미료 같은 역할을 하는 젓갈, 간장, 된장을 넣어두기 위한 것이었다.
서동의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산과 들에서 임산물 채취하고 농산물을 수확하느라 허리를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했을 정도로 열심히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서동은 장에 나가지 않는 날엔 마를 캐느라고 힘을 소진하거나 집을 가져갈 동물을 사냥하느라고 온 산을 누비고 다녔을 게다. 서동이 마를 팔아서 생계를 꾸렸다는 사실에서 당시 백제인들이 마를 많이 먹었다는 걸 추정해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마를 이용한 음식은 많지 않았을까 싶다. 닭도 집에서 길렀을 테니 댤걀도 어렵지 않게 구했으리라 본다. 그럼 어떤 음식이 만들어졌을지 그려보자. 음식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 상상력을 발휘하여 서동이 먹었던 음식을 그려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먼저, 마를 채 썰기를 하고, 참나물, 부추를 5cm 길이를 썰어 준 다음, 살짝 간장을 넣고 볶은 들깨를 넣어 살살 무치면 아주 훌륭한 마샐러드가 된다. 당시엔 소금을 구하기가 쉽지가 않았을 테니 간장과 젓갈 넣어 간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달걀찜이나 호박볶음 등에 새우젓을 넣어 간을 하는 경우를 종종 있다. 특히 제주도가 그러하다. 특히 소금을 구하기 어려운 지리적 환경을 가진 제주에선 젓갈을 이용하여 간을 하는 풍속은 지금도 남어지고 있는 걸 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다.
마요리를 할 때면 시루를 많이 이용했을 것이다. 시루에 연잎을 깔고 불린 쌀을 넣어준 후 깍둑썰기한 마, 콩, 밤, 대추를 넣고 쪄주면 맛있는 마영양밥을 된다. 산에 마를 캐려 가는 아들에게 만영양밥을 싸서 보냈을 서동의 어머니, 산에서 배가 고파 열매를 따서 요기를 할 아들이 측은해서 넉넉하게 마영양밥을 망태기에 쏙 넣어주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산과 들을 헤집고 나니라고 점심에 먹었던 밥은 이미 소화가 다 되어 허기진 배를 계곡물로 채웠을 서동, 아직도 집에 돌아가려면 한참인데 어찌할까.
결국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서동도 산을 내려와 터벅터벅 사립문을 열고 들어선다. 서동의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닭장으로 달려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달걀 한 알을 가져와 '탁'하고 깨더니 나무그릇에 담고 마를 가늘게 채를 썰어 노른자 위에 올려 서동에게 먹으라 한다. 서동은 단숨에 폭풍 흡입하여 흔적도 없이 먹어치운다.
때론 지치고 힘들어 밥 한술 뜨기도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폭신하고 부드러운 음식이 생각난다. 입에 넣고 꿀꺽하면 삼킬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한 법이다. 바로 그럴 때 서동의 어머니는 마달걀쯤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마를 깍둑썰기해서 절구에 넣고 콩콩 찧어서 달걀물을 풀어 섞어 준 후 시루에 넣고 쪄주면 맛난 마달걀찜이 뚝딱 만들어진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마달걀찜. 어머니가 드시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서동도 한 수저 푹 떠서 입에 넣고 뜨거워 어쩔 줄 몰라한다니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단출한 식구이지만 밥상에서 느끼는 행복은 더없이 컸다. 궁궐에서 결코 누릴 수 없는 행복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과 달리 백제시대엔 고기 단백질을 섭취하기가 어려웠다. 가축을 기르긴 해지만 대량생산을 하지 못했던 만큼 고기가 충분하지 않았을 거다. 사냥을 나갈 때마다 매번 많은 동물을 잡았을 리도 없고 오히려 허탕 치는 날이 더 많았으리라. 달걀을 얻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닭이라도 잡아야 할 판이다. 늘 산과 들에 나가 마를 캐는 일로 오죽 힘을 썼겠는가. 비가 오듯 땀을 주룩주룩 흘렸을 테니 건장한 청년이라 해도 어찌 버텨낼 재간이 있었겠는가. 눈 딱 감고 닭 한 마리를 잡아 놓고 봤을 것이다.
서동과 그의 어머니는 닭요리를 어떻게 하였을까. 백숙 또는 삼계탕을 했을까. 『삼국지(三國志)』와 『수서(隋書)』에 보면 백제에 닭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에 '백제삼'을 예물로 보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일본 나라시대인 756년에 시약원에 인삼 50근을 수출했다는 사실이 정창원 문서에 기록된 사실을 토대로 본다면, 백제 시대에 삼계탕을 먹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아진다.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 『산림경제(山林經濟)』, 『규합총서(閨閤叢書)』, 『주방문(酒方文)』와 같은 고조리서에서도 삼계탕이라는 음식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연계탕, 연계찜이라는 음식이 소개될 뿐이다. 처음엔 삼계탕도 계삼탕으로 불렸다. 인삼이 널리 보급되고 외국인들까지 인삼의 가치를 알게 되어서 삼자를 앞에 위치하게 하여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고 『서울잡학사전』에서 그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오늘날에 우리가 맛있게 먹고 있는 보양식을 백제인들도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쿵쿵거린다. '
튼실한 닭 한 마리를 잡아서 밤, 대추, 녹두, 호두, 마까지 듬뿍 넣어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을 서동 어머니, 따뜻하게 먹이고 싶은 마음에 아들이 사립문에 들어서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을 것이다. 마침내 인기척 소리에 화들짝 반가워서 뛰어나가는 그녀. 기품 따위보다 자식의 허기진 배가 더 신경 쓰이는 어머니일 뿐이다. 밥상에 아들이 딱 앉자마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닭다리 하나를 쭉 찢어서 주며 어서 먹으라고 눈짓하는 어머니, 그녀에게서 더 이상 체통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적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하고 이렇게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며 아들과 밥을 먹는 일이 제일 행복한 일이라 생각하는 그저 평범한 어머니가 그녀였다.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 제일 쉽게 조리한 방법은 구워 먹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동과 어머니 역시 닭을 구워 먹을 게다. 산에서 뜯어 온 쑥, 미나리, 부추 등을 돌로 짓이겨 즙을 내서 잡은 닭에 골고루 펴 바른 후 나무와 나뭇잎을 이용하여 바베큐처럼 먹었을 것 같다. 나무와 나뭇잎의 향이 배어 있는 고기를 한 입 베어 물면 훈제 향이 코 속까지 밀고 들어와 확 펴지면서 혀끝에서 느껴지는 육질의 맛, 생각만 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삼계탕이나 닭구이 같은 음식은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캄보디아에서도 닭에 물을 붓고 채소를 넣은 후 쌀을 넣어 끓여 먹는다. 우리나라의 삼계탕도 아주 비슷하다. 아랍에선 낙타바베큐라고 해서 축제 때나 먹은 음식이 있다. 음식명만 보아서는 닭요리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들겠지만 만드는 과정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다. 일단 낙타를 잡아서 내장을 제거한 후 그 안에 양을 넣는데, 이때 양의 속에 칠면조를 넣는다. 칠면조 안에는 닭을 넣는데, 이때 닭 속엔 건포도, 살구, 아몬드, 녹두, 수수, 향신료 등등을 채워서 넣게 된다. 겉으로 보기엔 낙타요리지만, 양고기 요리이면서 칠면조 요리이기도 하고 닭고기 요리이기도 하다. 마치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인형 속에 인형이 있는 것처럼 고기 속에 또 고기가 있다.
사실 닭요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대단히 즐겨 먹는 음식이다. 닭이 언제부터 인간과 살게 되었는지는 밝혀진 바는 없다. 진화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7500년 이후, 인류가 야생조류를 길들이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닭이라고 한다. 또 다른 학설은 인간이 벼농사를 짓게 되면서 잡초와 씨앗 그리고 곤충이 풍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새들이 몰려오게 되었고, 이때 인간에게 발견됐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백제시대에도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이라는 점이다. 전 국민이 사랑하는 프라이드치킨을 비롯하여 안동찜닭, 춘천닭갈비, 닭꼬치구이, 치킨너겟 등등으로 훌륭한 간식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익산에 닭육가공 회사인 하림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 닭고기 소비율이 많지만, 과거엔 소고기와 돼지고기 소비율이 훨씬 높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닭고기 가공사업이 유망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색고기를 뛰어넘어 백색고기의 우수성이 반드시 입증되는 날이 올 거라고 회사를 세운 기업인의 시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엔 성인병 하면 노인분들에게만 발병하는 병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젊은이들도 일찍부터 성인병을 앓게 되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사실 성인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닭가슴과 같은 지방이 없는 고단백 식품이 건강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마도 하림 경영자는 이와 같은 비전을 내다보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하림이라는 기업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2000년 초반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림이라는 브랜드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대표가 광고모델은 반드시 하희라 배우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하희라 배우는 하림식품의 광고모델이 되었고, '승리를 기원할 땐 하림 월드컵 그릴윙' 이라고 해맑은 웃음을 선사했다. 이 일화가 사실여부를 떠나서 한 기업인의 의지와 열정 미래 비전의 가치를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는 면에서 고개가 끄덕여지기 마련이다. 모든 기업의 대표가 최선을 다하는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아주 작은 것조차 놓치지 않고 챙겨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이뤄나가는 사실이 중요하다고나 할까.
역사적 배경으로 보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닭 육가공회사인 하림이 있는 것으로 보나 익산은 삼계탕을 비롯 닭구이와 같은 닭요리를 널리 알리는 허브 역할을 해야 한다. 안동찜닭처럼 익산 하면 서동이 먹었을 것 같은 삼계탕, 닭바베큐를 특화시켜 음식문화를 선도하는 도시가 되었으면 한다!.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라고 말한 E.H. 카가 생각난다. 과거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일 역시 역사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결국 현재의 우리의 삶 역시 미래의 역사적 토대가 되는 만큼, 잘 성찰하고 분석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 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주말엔 서동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한 행복한 밥상을 우리 집 식탁으로 옮겨볼까 한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한 주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