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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앤 Oct 28. 2024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쓰는 게 시인이야!

책을 읽는다 해도 모든 걸 기억하기란 어렵다. 기억력이 짧아서이기도 하고 책을 읽을 당시 큰 의미를 받지 못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긴  탓이다.


시간의 열차에 탑승해 한참을 가다 다음 종착역을 알리는 승무원의 안내 방송에 따라  짐을 챙기는 승객들, 혹시 빠진 짐은 없는지 주변을 한번 쓱 훑어보는 그들처럼, 예전에 읽었던 책들 중에서 무슨 책을 다시 읽을지 책장에 꽂힌 책들과 눈 맞춤을 한.

한번 쓰윽 넘겨보며 때로는 키득키득 웃는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했을까 싶기도 하고, 지나칠 만큼  순수하다 못해 어리석기까지 했던 지난날이지 않는가.  유치해서 웃음이 멈춰지지가 않는다.


책장이 넘겨지면서  익숙한 문장이 반짝거린다. 시원한 폭풍이 지나가는  같더니, 밑줄과 깨알 같은 글씨가 안개처럼 밀어 오면서 생각에 빠져든다. 


아! 그랬지. 이 구절이 그때  꽤나 힘이 됐지. 이 말을 운명처럼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좌충우돌 끝에 난파하는 배가 떠올려지자 고개가 도리질을 한다.

인생이  삐끗 나는 불상사를 맞이했을지도....., 쓴맛을 제대로 맛보았겠지. 그런 순간을 간신히 피한 듯 했지만 젊은날은 녹록하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젊음을 되돌려 준다 해도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던 내가 아닌가.

다만 그 시절에 읽었던 책들과 떠나는 여행만큼은 언제나 하고 싶다.


 책과 재회하는 일은  기쁘다.  특히나  처음 본듯한 낯선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심장이 쿵쿵거린다.  찌릿찌릿 한 전율이 느껴진다.


 오래 전에 <시학>  읽은 적이 다.   대략적인 내용은 기억하지만 세세한 내용은 기억에서 이미 날아간  오래다.  그렇다 치더라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내용이

기억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전혀  본 듯한 기억이 없을 정도로 낯설고 생소한 내용이 있다니....., 그저 어안이 벙벙하다.


'시인의 작업이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쓰는 것 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다'라는 문장어 섬광처럼 밝아온다.


몇 번을 읽고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문장.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고 놓쳐버린 문장을 다시 찾게 되어 다행스럽기까지 한다.  


 은 커피 향에 넋을 놓듯, 문장에 빠져든. 다시 세월을 타고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사라질지 모르지만, 이 순간만큼 놓치고 않았다.


 이 문장이 특별하게 느껴지게 된 데에는 시 읽기 수업의 영향 덕분이다.  정우영 선생님과 이대성 교수님께서  "마음의 힘을 기르는 시 읽기" 주제로 낭독과 감상담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수업이다.


 도서관 파트타임 일자리까지 포기하면서까지 신청한 수업이다. 빈주머니를 채우는 일도 절실하지만, 문학공부도 뒤로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차라리 베고픈 베짱이가 낫겠다 싶어서 주저 없이 신청했다.  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수업은 대만족였으니 말이.


많은 시를 읽고 낭독했지만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라는 시집에서 '봄에 죽은 아이'라는 시는 시간이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물과 많은 관련성을 많은 시들로 애도시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유독 '봄에 죽은 아이'라는 시를 낭송하자 납작해졌던 마음이 슬픈 숨결로 빵빵해진 풍선이 되었다. 시어가 실어 나르는 이미지들은 봄철 수학여행을 위해 세월호에 탔던 학생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시가 애상적이기도 했지만 세월호 사고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못해  박박 긁어내는 쓰라린 고통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모두들 한결같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것 역시 특이한 일이지 않는가.



 

봄에 죽은 아이

 

                                        진은영


막을 수 없는 일들과 막을 수 있는 일들

두 손에 나누어 쥔 유리구슬

어느 쪽이 조금 더 많은지

슬픔의 시험문제는 하느님만 맞히실까?


부드러운 작은 몸이 그렇게 굳어버렸다

어느 오후 미리 짜놓아 굳어버린

팔레트 위의 물감, 종이 울린 미술 시간

그릴 것은 정하지도 못했는데


초봄 작은 나뭇잎에 쌓이는

네 눈빛이 너무 무거울까 봐 눈을 감았다

좋아하던 소녀의

부드러운 윗입술이 아랫입술과 만나듯

너는 죽음과 만났다


다행이지, 어른에게 하루는 배고픈 개들

온종일의 나쁜 기억을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그러니 개장수 하느님께 내가 좀 졸라다오

오늘 이 봄날

슬픔의 커다란 뼈를 던져 줄 개들을

빨리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세월이 어서 가고 너의 아빠도

말랑한 보랏빛 가지를 씹어 그걸 쉽게 삼키듯

죽음을 삼킬 테지만


그전에, 봄의 잠시 벌어진 입속으로

프리지어 향기, 설탕에 파묻힌 이빨들은

사랑과 삶을 발음하고


오늘은 나도 그런 노래를 부르련다

비좁은 장소에 너무 오래 서 있던 한 사람을 위해

코끼리의 커다란 귀같이 제법 넓은 노래를

봄날에 죽은 착한 아이, 너를 위해


       진은영 시인이 쓴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시집에서





이 시를 감상해 보면 알겠지만, 세월호 희생된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시인 역시 세월호의 아픔이 사무쳤을 것이고  시로 썼으리라.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상상을 해볼 만하다. 왜냐하면 봄에 죽은 아이라는 제목에서부터 학생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어들에 이르기까지,  어린 학생들의 못다 한 삶의 안타까움을 가슴을 저미하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의 절절했던 아픔이 되살아나면서  감정이 이입이 자동적으로 된다. 세월호 사고는 우리 국민들에게 아주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사건이었던 만큼 비슷한 증후가 보이면 동일한 사건으로 연상하고 만다. 그러니 독자들이 오독을 범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하지만, '봄에 죽은 아이"는 세월호 사고가 있기 훨씬 전에 쓰였다. 마치 세월호 사고를 예견한 것처럼 이 시를 썼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그때 정우영 선생님께서는  미래를 예측하는 시 쓰기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말씀을 듣고 보니 시인이라는 직업이 참으로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 확실하다.  짧은 몇 줄의 시가  장편소설보다 더 진한 감동과 깨달음을 주고 어느 무인의 칼보다 강렬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으로 직조되는 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인이란 일어난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쓴다고 말한 바에 대해 무감동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어제는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구절이 내일 그다음 날 우리의 심장을 두근두근하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다니. 책을 재회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심장은 더욱 세차게 움직일 것이며 생각의 씨앗은 더욱 튼실해지리라.


돌이켜 생각해 보니 대학시절엔 시를 아주 가까이했던 것 같다. 가방 속에 언제나 시집을 넣어두고 버스를 타거나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꺼내보곤 했다.


 혹독한 생활 전선에 나서고 보니 시집을 펼쳐보기보다 지식 전달 위주의 책이 저절로 손에 잡히곤 한다.

50이 넘어서야 다시 문학에 대한 세우고  도서관을 집처럼 드나들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를 잘 몰라 많이 읽으면 흉내라도 낼 수 있겠지 싶어 독서에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 도서관을 빠지지 않고 가기 위해서 나만의 장치도 해뒀다. 도서관 봉사이다.


이용자들이 놓고 간 책을 책장에 꽂는 일 하다 보니 모르던 책들을 알게 됐는데, 꼭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꽂고 하는 일이 꼭 보물찾기 놀이 같다.

빈번하게 대출과 반납이 이루어지는 책들엔 어떤 흥미가 있는 것일까 싶어서 샅샅이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는데 덕분에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게 되어서 좋다.


책도 읽고 틈틈이 글도 쓰고 요즘은 꼭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일상이 특별하게 느끼게 해 준 지난날이 고맙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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