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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른도로시 Nov 21. 2022

모든 일에 쉽게 질리는 사람이 꾸준히 일하기 위해서는

-내적 동기와 알아차림을 도구 삼아 


"일터에서나 어디에서든 사람들과 만날 때 상대방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당신은 개인으로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의 장으로서, 깨어 있는 ‘현존’으로서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애초의 이유, 즉 물건 사고팔기와 정보 교류 등은 이차적인 것이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알아차림의 장, 그것이 만남과 교류의 첫째 목적이 됩니다. 그 알아차림의 공간이 당신들이 나누는 대화보다 더 중요하고, 물질적인 대상이나 생각의 대상보다 더 중요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의 일들보다 더 중요해집니다. 그것은 실직적인 차원에서 당신이 할 필요가 있는 일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실 ‘순수한 있음’의 차원을 알고 그것이 주된 것이 되었을 때, 행동은 더 쉬워지고 더 강력해집니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연금술사, 2013, p.339 인용






 

현재의 직장을 다닌 지도 벌써 2개월이 지났다. 누군가에게는 2개월이 짧은 시간이겠지만 뭐든 빨리 질리는 나에게 2개월은 꽤 긴 시간이다. 처음에는 설레었던 출근길이 이제는 생각만 해도 익숙함이 주는 지루함에 엉덩이가 들썩이는 일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는 반문한다. 일이 손에 익으면 그때부터 재미있어지지 않느냐고. 

나는 반대다. 오히려 일을 잘 모를 때 더 신이 난다. 시간이 빨리 가서 좋고 모르는 걸 익히면서 스릴을 느낀다. 일의 성격을 대강 파악할 무렵인 삼 개월쯤이면 단맛 빠진 껌을 억지로 씹어야 하는 것처럼 흥이 나지 않는다. 일상이 반복될 거면 적어도 일의 내용이라도 매번 흥미로워야 하는데, 대부분의 직장에서 일이란 그저 일일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흥미롭지도 않은 일이 손에 익기까지 하면 큰 일이다. 출근길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월요일이 두려워진다. 세상에, 그 재미없는 일을 내일 또 해야 하다니. 



누군들 재미있자고 일을 할까. 나도 그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문제는 흥미롭지 않은 일을 지속하는 행위에 대한 인내의 역치가 매우 낮다는 데 있다. ADHD라는 걸 몰랐을 때는 단순히 내가 막 돼먹어서 그런 줄 알았다. 남들 말대로 철, 현실 감각, 의지력 삼박자가 부족한 데다 그걸 보완할 능력조차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남들은 한 없이 지루해 보이는 일도 잘만 견디는데 나만 대체 왜 이런가 싶었다. 남들 다 하는 일 왜 너만 못 하냐, 의지력 부족이다 하는 이들에게 항변할 이렇다 할 대꾸 거리가 없었다. 속으로 끙끙 앓았다. 어쩌면 나는 잘못 태어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는 부모 속 썩이려고 태어났다.'는 아버지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제아. 내 이름은 그 말과 등호였다. 


ADHD에 대해 알고 난 후 나=문제아 공식은 바뀌었다. 나=ADHD가 아니듯이, 나와 내 증상은 등호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ADHD에서 주의력결핍이란 단순히 주의력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집중을 조절하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보통 사람들은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하려고 움직이지만 ADHD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일이 배로 더 힘들다고 했다. 신경전달물질 이야기는 차치하고, 이제껏 태어나길 불량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한 인생이 정말 '불량'으로 판명 나면서 더는 망한 인생이 아닌 게 되었다. 뇌가 어떻게 생겨먹을지는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애초부터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생겨먹은 꼴을 두고 스스로를 욕하는 일은 쓸모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한 거였다. 그렇게, 타고난 기질의 '이름'을 알자 비로소 마음이 해방되었다.







원인을 알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갓 둥지에서 벗어나 헤엄치기 시작한 아기오리처럼 힘차게 발길질할 일만 남았다. 내가 오리라는 건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잘 헤엄쳐서 먹이도 얻고 집도 지어 독립할지를 고민해야 할 차례가 왔다. 과연 어떻게 해야 다루기 까다로운 이 '기질'을 등에 업고 매일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에게는 6개월의 저주라는 게 있었다. 단 한 번도(유치원~중학교 제외) 어딘가에 6개월 이상 머물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요가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랬다. 스물일곱 살 때 요가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6개월 넘기면서 그 기록을 깼다. 누가 그랬던가.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거라고. 요가 선생님이 그러셨다. "자기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마. 이제껏 6개월 이상 어딘가에 있어본 적이 없다 했지? 그런데 봐봐, 지금 여기 온 지 이미 6개월이 넘었어."


그 후에도 나는 끊임없이 감당 못할 일들을 벌려놓고 채 수습하지 못한 채 그만두거나 기약 없이 쉬는 일을 반복했다.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반복되는 일을 견디기 힘들었기에 짧은 단위로 끊어지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런 일은 익숙해질 만하면 끝났기 때문에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받기 전에 훌훌 털고 떠날 수 있어서 내게 딱 맞았다. 


경기가 점점 안 좋아지면서 단기 일자리도 함께 줄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고부터는 특히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게다가 나이를 먹어가니,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단기 일자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벌어먹고 살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던 거다.


그런 자각이 들었다고 해서 타고난 기질이 눌러지진 않았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 것보다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 일을 지속하느라 괴로운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언젠가 그만뒀어야 할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곳을 찾았다. 상사도, 동료들도, 업무 환경도 이전보다 훨씬 나은 곳이었다. 그 전 일자리에서 바라던 걸 다 얻은 셈이다. 그럼에도 오래전에 깨부순 6개월의 저주가 벌써부터 내면 저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기만을 기다리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오래된 저주를 깨부술 답은, 바로 '알아차림'에 있었다. 일이 너무 지루해서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일을 하는 바로 그 현장의 그 '순간'을 살아갈 것. 순간순간 일어나는 사람 간의 관계와 소통에 '깨어있을 것'. 그리하여 매 순간 새로울 것. 이것이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에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는 기질을 지닌 나라는 사람이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탑재해야 할 삶의 태도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책을 읽고 이 사실을 새삼 깨닫기 전에도 나는 종종 마음 챙김의 태도로 일을 하곤 했던 것 같다. 마트에서 판매 일을 할 때 유난히도 일이 하기 싫은 날에는 일종의 '봉사 놀이'를 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제쳐두고 손님들에게 친절을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일했던 것이다. 물건을 찾는 손님께 성심성의껏 물건을 찾아드리고 길을 묻는 분께 모르는 길은 물어서라도 함께 가드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환해짐을 느끼곤 했다. 아마도 그 일을 하는 순간만큼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더욱이 타인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일에 일조했으니 내적 동기도 자극되었을 것이다. 




이런 알아차림의 순간도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권태감이 고개를 내밀 테지. 그럴 때마다 깨달음이 찾아왔던 특정 순간을 돌이켜보기 위해 기록으로 남긴다. 때로는 과거의 나에게서 영감을 얻을 수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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