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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른도로시 Jun 17. 2023

100년전 공주 이야기 첫번째, '꽃의 공주'(1)

-꽃의 나라의 아름다운 플뢰렛 공주






 옛날 옛적, 높은 언덕 꼭대기의 하얀 대리석 궁전에 아름다운 플뢰렛 공주가 살고 있었다.

공주는 꽃을 너무나 사랑해서, 궁전 안은 대문에서부터 정원, 높은 대리석 벽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인 가파른 언덕 기슭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온갖 식물들로 가득했다. 

언덕은 대지 한가운데 우뚝 솟은 커다란 꽃다발처럼 수 마일에 걸쳐 향긋하고 달콤한 내음을 퍼뜨렸으며, 햇빛 아래 다채롭게 빛나는 가운데 새들의 지저귐과 수백만 마리 벌들이 윙윙대는 소리가 어우러져 합창곡을 이루었다. 


 정원의 한 구역에는 작은 덩굴로 뒤덮인 아치형 나무 그늘이 즐비한 산책길과 거리가 조성되어 공주가 앉아 책을 읽거나 자리에 누워 꿈나라로 빠져들 수 있었다. 나무 사이사이 곳곳에는 분수대와 조각상이 있었고, 온 사방이 큼직큼직하고 당당하여 정원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정원의 다른 구역은 야생의 모습 그대로 숲처럼 우거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수줍음에 겨운 꽃들이 제 본모습 그대로 피어났고, 개울의 작은 물줄기가 조약돌 위로 졸졸 소리를 내며 언덕 기슭까지 흘러갔다. 그 어떤 이도 플뢰렛 공주의 것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운 정원은 보지 못했으리라.


 공주의 아름다움은 정원의 향기처럼 멀리 멀리 퍼졌다. 많은 이가 그녀를 직접 보기 위해 찾아왔다. 

먼 곳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왕자들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들은 언덕 기슭에서부터 궁전의 출입문에 이르기까지 언덕을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는 긴 여정을 거쳤다. 왕자들은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눈이 부시게 화려한 마구를 등에 얹은 준마 위에 앉아 호기심에 가득 차서 꽃으로 에워싸인 땅 위를 올라갔다. 꽃들은 희망과 행복의 향기를 뿜어댔고, 아름다운 이 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마음은 내딛는 발길마다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궁전의 문 앞에 도달해 말에서 내려 대연회실 안에 들어선 순간 그 어느 꽃보다도 아름다운 공주가 황금빛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즉각 무릎을 꿇고 부디 자신과 결혼해 주십사 간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주는 늘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나는 내 심장을 찾은 이와 기꺼이 마음을 나누려 합니다. 그건 꽃들 사이에 숨어 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찾으세요, 왕자여, 그러면 나는 그대의 것입니다.”


차례가 된 모든 왕자에게 이와 같은 대답이 돌아갔다. 사실, 공주는 그다지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꽃들과 함께 하는 삶 자체로 충분히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자들은 달랐다. 그 누구든 공주의 아리송한 대답을 듣고 나면 정원으로 들어가 부지런히 꽃들 사이를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맸다. 그녀가 틀림없이 가장 소중히 여길만한 최고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꽃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기 마음에 든 꽃을 골랐다. 어쩌면 떳떳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크고 멋진 장미를 골랐을지도 모른다. 적절한 때가 되면 왕자는 무릎을 꿇고 꽃을 내밀며 자신감에 차 말하리라.    

       

“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공주여. 그대의 심장을 찾았습니다. 어서 이 아름다운 장미를 보십시오! 당신이 마음을 주시면 저는 그대만의 왕자로서 언제까지나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공주는 장미를 슬쩍 훑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 저도 장미를 사랑해요. 하지만 내 심장은 장미에 있지 않아요. 

왕자님. 당신은 나의 반려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럴 분이라면 보다 나은 선택을 했겠지요.”

그녀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곧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얼마후 왕자는 길을 나섰다. 아름다운 말 위에 올라 비탄에 잠겨서는, 활짝 웃는 꽃으로 가득한 언덕 아래로 터덜터덜 내려갔다. 그러면 공주는 정원으로 가 다음 왕자가 찾아오기 전까지의 평화를 즐기곤 했다.












 어떤 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양귀비가 공주가 말한 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진전은 없었다. 다음 사람은 아마도 화사한 튤립을 골랐으리라. 또 다른 이는 얌전한 백합을 골랐고, 어느 착실한 이는 고귀하며 신비로운 패션 플라워를 골랐다. 그러나 그 어떤 꽃을 내밀어도 공주는 어김없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왕자들 중 공주의 마음이 담긴 꽃을 찾은 이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공주는 꽃들과 함께하며 아주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지냈으며 두 뺨에 꽃을 피우고 숨결에서는 향기를 풍기며 점점 더 예쁘고 사랑스러워졌다. 그 누구도 플뢰렛보다 더 아름다운 공주를 보지 못했다.    

  

 공주는 모두가 잠이 든 아주 이른 아침에 일어나기를 좋아했다. 그날도 일찍 일어나 재빨리 정원으로 통하는 비밀 계단을 내려갔다. 이슬이 내린 정원은 갓 깨어난 기쁨으로 밝아오고 있었다. 공주는 품이 넓고 거칠거칠한 초록색 가운을 즐겨 입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풀잎사귀 안에 쏙 들어간 앙증맞은 분홍색과 흰색 꽃처럼 보였다. 이처럼 작업복을 착용하고 나면 작은 모종삽으로 식물 뿌리의 향기로운 곰팡이를 파내거나 넝쿨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모양을 바로잡아 주곤 했다.       

 성 안 사람들은 그녀가 정원 일을 했다고 의심하지 않았으며, 공주로서는 그러는 쪽이 좋았다. 만약 성 사람들이 이 일을 알았다면 졸졸 따라다니며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았으리라. 예쁜 손이 다치지 않도록 장갑을, 혹여나 고운 살갗이 탈까 면사포며 양산을 대령하고, 화단에서 제초를 하는 동안 무릎을 꿇으면 깔고 앉을 담요를 놓으려 할 게 틀림없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을 기꺼이 허락할 리도 없었다. 정원사들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왜 공주가 나서서 궂은일까지 해야 할까? 그저 꺾어온 꽃들을 즐기기만 하면 그만일 텐데.      


 가엾게도, 그들은 몰랐다. 작고 우스꽝스러운 씨앗이 잎사귀가 되고, 키 큰 초록빛 줄기로 자라 잠들어 있던 꽃 봉우리를 깨운 다음, 첫 싹을 틔웠을 때 했던 약속을 지켜 마침내 꽃을 피워내는 과정을 세심히 살피고 돌보는 일이야 말로 한 송이 꽃을 기르는 가장 큰 기쁨이란 걸.  그들은 공주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식과도 같은 꽃들을 보살피는 동안 곁에서 따르는 신하들을 비롯해 심지어는 청혼 하러 오는 중인 호기심 많은 왕자들까지도 하루 중 가장 멋진 시간을 이불 속에서 허비하곤 했다.      


 정원사는 분명히 왕실 정원에 요정의 손길이 닿았으리라고 번번이 주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꽃들은 잡초나 벌레로부터 자유로웠고, 시들어가는 이파리 한 장 없이 놀랍도록 번창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때는 자신의 발길이 닿기 전 꽃잎 무리에 축복처럼 내려온 은은한 향수 냄새를 추적할 수 있을 성 싶었다. 정원사가 이 이야기를 꺼내자 공주는 그저 상냥한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본디 활기가 넘쳤기에 속으로는 깔깔대며 웃었지만.     












 어느 아름다운 아침, 공주는 여느 때처럼 해가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풀이파리 모양의 초록빛 가운을 두르고 비밀 계단을 통해 정원으로 향했다. 아침을 맞은 정원에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이슬방울이 온 곳에 맺혀 반짝였으며, 모두가 새로이 깨어나 놀랍도록 활기찼다. 공주는 길을 따라 이리저리 걸으며 꽃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럴 때면, 꽃들도 예쁜 얼굴을 반짝 들고서 마치 공주가 또 다른 꽃이라는 되는 양 웃음으로 답했다. 공주는 종종 귀한 무릎을 자갈밭에 꿇고 앉아 꽃잎에 입을 맞추고자 몸을 숙이곤 했다. 어떤 때는 꽃들의 귀한 뿌리 사이에서 우글대는 욕심 많은 벌레나 거만하기 그지없는 잡초들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멈춰 섰고, 또 가끔은 시든 잎이나 전날 이미 빛이 바랜 꽃을 작은 황금빛 가위로 싹둑 잘라냈다. 공주는 지나온 길을 재차 오르내리며 기쁨에 겨워 흥얼거렸다. 그러나 꽃을 꺾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공주는 꽃들이 제 초록색 줄기 위에서 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다. 


  어느새 여름이 다가왔다. 공주는 아침 일찍 파랑, 분홍, 하양으로 새뜻하게 피어나는 작은 나팔꽃을 보려고 정원에 들어섰다. 측근들조차도 이 꽃을 본 적이 없었다. 이 게으른 작자들은 하루 중 가장 멋진 시간을 꿈나라에서 흘려보내느라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작은 나팔꽃들은 행복한 아침나절을 보냈으므로 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졸음에 겨워 고개를 끄덕이다가 잔뜩 웅크린 채 긴 잠에 빠져들 때쯤엔 남은 하루에 대한 미련 따위야 아무래도 좋은 법이니까. 

 나팔꽃을 발견한 플뢰렛 공주는 가볍게 손뼉을 치더니 나무 그늘로 뛰어가 발끝을 사뿐히 들고 춤을 췄다. 그러더니 속삭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작은 벗들이여! 좋은 아침입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여. 참으로 생기 넘치고 달콤하며 아름답군요!” 플뢰렛은 꽃자루에 매달린 빛바랜 분홍 꽃을 뽑아 머리카락을 장식했다. 유일한 장신구였다. 그리고는 춤을 추며 넝쿨로 뒤덮인 아치형 정자로 향했다. 매일 아침 꼭 들르곤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통로에 다다랐을 때,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뒷걸음질 치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우거진 나팔꽃 넝쿨 사이로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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