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 전 공주 이야기 세 번째, '메이블라썸 공주'(2)
1.
1편에서부터 이야지는 이야기입니다.
2.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끊임없이 들려주던 보모는 어느 순간 공주가 염려되어 더 이상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공주는 판파로나드 대사가 마을에 입성하면 펼쳐질 멋진 장면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내 신세가 얼마나 처량한지. 사람이라도 죽인 마냥 음침한 탑 안에 갇혀있어야 하다니! 난 태양, 별, 말, 원숭이, 사자 같은 걸 그림으로밖에 보지 못했지.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스무 살이 되면 자유로이 풀어 주겠노라 하시지만 과연 그게 사실일까? 그저 날 기쁘게 하려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잖아.’
공주가 울기 시작하자 그녀의 보모와 그의 딸, 요람 흔드는 자 그리고 유모까지 합세해 함께 울었다. 방 안은 삽시간에 흐느낌과 한숨 소리로 가득 차서 한바탕 장례라도 치르는 듯 했다. 공주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두가 자기를 가엾게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 그 길로 공주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시종들에게 판파로나드 대사가 입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할 바에는 스스로 곡기를 끊어 죽고 말겠다고 선언했다.
‘여러분이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쯤은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어머니 아버지만 모르시면 아무 상관없지 않겠어요?’
보모를 비롯한 시종 무리가 대성통곡을 하며 온갖 말로 공주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자 했다. 하지만 설득을 하려 하면 할수록 공주의 결심은 더욱 단단해졌다. 결국 시종들은 탑 안에 도시로 통하는 문 쪽을 향해 작은 비밀 구멍을 뚫기로 했다. 온 종일 긁고 파대길 얼마만일까, 아주 가느다란 바늘을 밀어 넣을만한 크기의 구멍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공주는 이 구멍을 통해 난생 처음 한 낮의 햇살을 보았다. 세상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공주는 작은 홈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대사의 행렬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까지 1분여간 넋을 놓고 있었다.
판파로나드 대사는 행렬의 앞 쪽에서 흰 말을 몰았는데, 트럼펫 소리에 맞춰 반 회전 하며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퍽 멋있었다. 게다가 의상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이 세상 그 어떤 옷도 그만큼 황홀하기란 힘들 게 분명했다. 코트에는 진주와 다이아몬드 자수가 수 놓여 있었고 아주 견고해 보이는 장화는 찬란한 금빛이었으며 헬멧은 진홍색 깃털로 장식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멋진 그의 모습에 공주는 그만 이성의 끈을 놓고 말았다. 첫 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절대 대사 외의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저 분 주인이 아무리 멋지다 한들 저보다 더 잘생기고 매력적일 리가 없어. 그건 불가능해. 난 큰 걸 바라지 않아. 아무리 나라에서 지어준 집이라곤 한들 이 지긋지긋한 탑에서 평생을 살았으니 뭐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 판파로나드님과 함께라면 빵 한쪽에 물만 나눠 마셔도 행복할 거야. 시종들 틈에서 구운 닭요리에 달콤한 설탕 절임 과일을 먹느니 차라리 그 쪽을 택하겠어.’
그녀는 몸종이 ‘공주님이 대체 어디서 저런 이야기를 들으셨을까.’하고 의아해할 정도로 하루 종일 자기 생각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종들이 그건 절대 실행 불가능한 일이라며 말리려 하면 할수록 공주는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령했다.
대사가 궁전에 도착하자마자 여왕은 딸을 불러 왔다. 거리마다 카펫이 깔렸고 집집마다 젊은 숙녀들이 공주를 보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바구니를 들고서 공주가 지나간 길목마다 꽃이며 사탕을 뿌려댔다. 시종들이 공주를 단장하기가 무섭게 코끼리 위에 올라탄 난장이가 도착했다. 그는 세례식에 참여했던 다섯 요정 쪽의 사람으로, 공주가 쓸 왕관과 손에 쥘 홀 그리고 나비 날개가 수놓인 질 좋은 패티코트와 금실로 짠 두터운 비단 예복을 가지고 왔다.
또한 보석함도 내밀었는데,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그 누구도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왕비조차도 열어 보고는 첫 눈에 사로잡히고 말 정도였다.
그러나 공주는 귀한 보물 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판파로나드만이 가득했다. 난장이는 상으로 리본이 수없이 장식 된 금덩이 하나를 받았는데,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것이었다. 공주는 요정들 각각에게 실패가 장착된, 참나무로 짠 새 물레를 선물로 보냈다. 왕비 역시 자기 보물 중에서 매력적인 물건을 찾아 답례 했다. 난장이가 가져 온 옷을 입고 왕관을 쓴 채 한 손에는 홀을 든 공주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아름다웠다. 공주가 길을 따라 걷자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모습에 탄성을 질렀다.
그 날의 행진에는 왕비와 공주, 예순 명에 달하는 친척 공주들 그리고 이웃 왕국에서 온 열두 명의 공주까지 참석해 당당한 걸음걸이를 뽐냈다. 행사가 문제없이 잘 진행되던 찰나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더니 천둥 번개와 함께 비와 우박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왕비와 공주들 모두 두르고 있던 화려한 망토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메이블라썸이 똑같이 하려고 막 손을 뻗는 순간 까마귀 군단부터 시작해 떼 까마귀, 가면 올빼미를 비롯해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올빼미 하나가 공주의 머리 위에 거미줄과 박쥐 날개가 수놓인 스카프를 떨어뜨렸다.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공기 중을 쩌렁쩌렁 울리자 사람들은 곧 눈치를 챘다. 카라보스가 행진을 방해하고 있었다. 잔뜩 겁을 먹은 왕비가 공주의 어깨를 감싼 검은색 스카프를 잡아당기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찌나 착 달라붙었는지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카라보스를 달랠 수 있단 말인가! 설탕에 절인 과일 50 파운드에 최고급 설탕에다 웨스트팔리아산 햄 두 덩이까지 바쳤는데도 여전히 화가 나 있다니.’
왕비가 이처럼 한탄하는 동안, 사람들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었다. 그 와중에도 공주의 머릿속에는 판파로나드 대사만이 가득했다. 때 마침 트럼펫 소리와 함께 왕과 대사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함성을 질렀다.
판파로나드는 본래 달변가였다. 하지만 공주가 상상 이상으로 품위 있고 아름다웠던 나머지 겨우 몇 단어만 더듬거리며 내뱉었을 뿐이었다. 거기다 몇 달간 잠결에 읊조릴 정도로 달달 외웠던 장광설마저 죄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중 일부라도 기억하기 위해 그는 몇 번이고 절을 하며 시간을 벌려고 애썼다. 대사는 멈추지도 않고 연달아 여섯 번이나 절을 했으며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 보였다. 공주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판파로나드 경, 그대가 하려고 했던 말들 모두가 참으로 매력적이군요. 그대의 입에서 나올 뻔 했던 말이니 그럴 수밖에요. 우선은 폭우가 쏟아지니 서둘러 궁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우리가 여기서 빗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는 걸 보면 카라보스가 아주 즐거워 할 거예요. 일단 궁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도 카라보스를 실컷 비웃자고요.”
공주의 말에 대사는 집 나간 혀를 되찾았다. 그는 카라보스가 공주의 밝은 두 눈에서 타오르려 하는 아름다운 불꽃을 끄기 위해 폭우를 내렸을 거라고 정중히 대답하며 그녀를 모시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공주가 말했다.
“제가 얼마나 그대를 좋아하는지 아마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판파로나드 경. 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당신을 사모했답니다. 아름다운 말 위에 올라 마을로 들어오던 그때부터요. 그러니 이 얘길 지금 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당신이 자기 얘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말을 전하러 왔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랍니다. 그러니 만약 저와 같은 생각이시라면 전 왕자님 대신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물론 그대가 왕자님이 아니란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전 당신이 절 보고 반해서 어쩔 줄 몰랐던 것처럼 꼭 같이 당신에게 푹 빠질 거예요. 우리 같이 작고 아늑한 어느 변두리 시골 마을로 가서 매일 행복하게 살자고요.”
판파로나드는 사랑스러운 공주가 내뱉는 믿기 힘든 말을 들으며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감히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공주의 손을 꼭 쥐기만 했다. 공주는 손가락이 아팠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궁전에 도착하자 왕이 딸의 두 뺨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나의 어린 양이여, 그대는 위대한 멀린 왕의 아들과 결혼할 의사가 있는가? 대사는 그대를 데리러 가고자 이 땅에 왔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공주가 예를 갖춰 절을 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연회를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왕비가 말했다.
순식간에 상다리가 휘어지게 많은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배불리 먹는 가운데 오직 메이블라썸과 판파로나드만이 서로를 쳐다보느라 배고픔조차 잊었다. 연회가 끝난 후 무도회가 열렸고, 곧이어 발레 공연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선 자리에서 잠이 들 정도였다. 오직 연인들만이 생쥐처럼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두려운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주가 판파로나드에게 말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기회는 없어요. 얼른 도망쳐요.’
이 이야기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