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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동 Sep 02. 2019

소나기가 몰고 온 상념

3년 전 글을 추적추적하며

1.

 어릴 적부터 나도 모르게 하나 둘 씩 모아지는 물건이 있다. 적으로부터 온몸으로 나를 보호하던 그들은 우리 집 신발장 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하나면 충분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 탓에 늘 새로운 녀석이 비좁은 신발장에 신고식을 하기 일쑤다. 그렇게 그들은 쌓이게 된다. 일 년 중 이들이 필요할 때가 과연 몇 번이나 될까. 그들은 적이 나타나야만 비로소 존재 이유가 성립된다. 어떤 녀석은 키가 큰 반면, 어떤 녀석은 몸이 세 번으로 접히기도 한다. 색상도 가지각색이다. 검은 놈이 있는가 하면 빨강, 주황, 보라, 하얀색을 띠는 놈들도 있다. 어떤 녀석은 일곱 가지 색깔을 죄다 갖고 있더라. 저마다 언제 불려 나갈지 모르는 대기 상태 속 그들은 긴장감을 놓지 않으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신발장 속에서 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눌까.


2.

 눈 비비고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서울 날씨’를 검색하는 것이다. 오늘 오후 소나기가 온다는 소식에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동안 어떤 놈을 챙길지 고민한다. 잠깐 스쳐 가는 소나기에 굳이 큰 녀석은 필요 없겠지. 결국 특기가 삼단 접기인 녀석을 가방 속에 쑤셔 넣는다. 삼단으로 접으면 몸집이 작아져 휴대하기에 제격이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하늘이 촉촉해지기 시작하면 너도 나도 준비해온 ‘녀석’들을 꺼낸다. 간혹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해 건물 입구에서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흘낏 쳐다보며 기다렸다는 듯 자랑스럽게 녀석을 꺼낸다. 예상보다 많은 비가 내린다. 큰 놈을 가져올 걸 그랬나. 그래도 딱히 젖는 부위가 없기에, 오늘도 적으로부터 나를 감싸주는 녀석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3.

 현관문 구석에 흠뻑 젖은 녀석을 던져두고 냉큼 집 안으로 들어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엄마에게 소나기가 와서 그런지 오늘 좀 쌀쌀했다고 말한다. 잘 마르도록 녀석을 밖에 펼쳐놨냐는 엄마의 말에 두부를 건지며 고개를 끄덕인다. 밥을 다 먹고 과제를 하거나 TV를 보는 와중에도 녀석에 대한 생각은 없다. 하늘에서 비가 오든 우박이 떨어지든 이제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난 이미 지붕 밑에 들어와 있는 걸.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아마 신발장 속은 사라진 막내 소식에 난리가 났을 것이다. 지난달의 보라색 녀석처럼 홀로 지하철 막차에 남겨졌을 것이라는 둥, 지난 주 하얀 녀석처럼 텅 빈 강의실에서 홀로 아침을 맞이할 것이라는 둥 갖가지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게 중에는 어서 빨리 우리 막내를 내놓으라며 나를 욕하는 녀석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개의치 않다. 아직 신발장 속엔 녀석들이 많이 남아 있고, 앞으로도 새로 생길 녀석들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스물넷이라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어중간한 나이로, 그것도 쌔고 쌘 대한민국 대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게 매일이 혼돈의 연속이다. 사회가 암묵적으로 규범 지은 ‘정상’이라는 궤도를 그동안 단 한 번의 이탈 없이 잘 따라왔다. 이제 몇 년 후면 학교라는 기나긴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 초년생으로서의 새로운 틀 안에 들어가겠지만, 아직까진 걱정이 기대를 앞선다. 과거 초등학교 시절부터 생활기록부, 자기소개서 등에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묻는 칸이 있으면, 난 주저 없이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할 때를 만나기 위해’라고 적곤 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취업의 전선에서 그 소신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과연 세상이 날 필요로 할까. 필요할 땐 찾더라도 그 이후엔 쉽게 내팽겨 치진 않을까. 먼 훗날, 세상 뿐 아니라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지는 않을까. 비가 그친 후의 우산처럼.


5.

 어쩌면 인생이란, 끊임없이 구매되어 신발장 속에 들어오는 우산처럼, 계속해서 정상 궤도에 진입하기 위한 과정의 총합일 수도 있겠다. 이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많을까. 만약 그들이 명확한 해결책을 원한다기 보다 그저 생각을 들어주고 공유하는 것을 바란다면,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비 오는 날의 하늘이 너에게 말해주고픈 건, 너만 그런 게 아니란 것을 말이다. 앞으로는 비가 갠 후에 우산을 잘 펴서 꼭 말린 뒤에 보관해야겠다. 맙소사, 오늘 하루 내린 소나기의 파문이 이토록 커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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