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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Feb 05. 2022

당신한테 투자하는 거예요

가능성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지독하게 힘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필요한 것이 되어있거나

괴로웠던 악연들과의 만남 사이에

빛나는 은인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작가 4년 차 정도 되었을 때였나,

아는 피디가 외주제작사에서 만드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와서 일을 좀 해달라며 연락이 왔다.


처음 간 날, 두 명의 작가를 소개받았다.

비슷한 연차 하나와 메인작가를 할 언니 하나.

작가는 그렇게 셋이라고 했다.

프로그램은 사연있는 녀들을 오디션으로 뽑아

여러 회차에 거쳐 예쁘게 메이크오버 해 주고

최종 한 명의 주인공을 뽑는 뷰티 서바이벌었는데

메인 언니는 총 일곱 개의 회차 중에

절반은 내가, 절반은 다른 친구가

마지막 회는 같이 하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너희 마음대로 해도 돼."


고맙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언니는 촬영도 회의도 거의 나오질 않았으니까

지금 이름 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언니는

대본을 보내도 이렇다할 반응이 없고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면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당시 10년 차에게나 맡길법한

60분 프로그램의 전체 구성, 섭외, 촬영을

4-5년차 된 아이가 혼자 하는 상황이었다.

불평불만 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하기로 했으니 는 수 밖에.


나는 일을 해치워 나갔다. 

막내의 자잘한 일부터 메인작가 롤까지 하려니

 았지만 못 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 와 생각해보니 일 하나도 안 하고 돈 받아간 그 언니와

그렇게까지 일을 시키고 은 돈을 준 피디 양심은 별로인 것 같지만

덕분에 일을 일찍 배웠으니 고맙기도 하다.


...

그 프로그램에는 여러 협찬사가 있었는데

중 하나는 청담동에 있는 큰 미용실이었다.

헤어, 메이크업과 스파까지 갖춘 고급 샵.

실력도 좋고 멋진 선생님들은 촬영마다 참 많이 도움을 주

그 배경에는 L원장님이 계셨다.

센 이미지의 원장님은 음에 작가가 어리네? 하 까칠했지만

일하는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며 나중에는 전적으로 맞춰주다.

그 분께 프로그램을 마치며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좋은 기회에 다시 뵙자고, 꼭 연락드리겠다고.


그 프로그램이 끝난 지 일주일이나 됐을까.

H언니 연락이 왔다. 내가 뷰티 프로그램을 하는 사이

SBS에서 2회 파일럿을 뜬 토크쇼가 있

갑자기 정규편성이 되었으니 네가 와 줬으면 좋겠다며.

첫 공중파 레귤러 프로그램의 입문이었다.


며칠이 지나 회의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평범한 주부가 나와서 이야기 할 때도

청담동 최고급 샵에서 받은 것처럼

외모가 곱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언니는 말했다. 예산이 적긴 한데 한 번만 알아봐 줄래..?


사실 나는 자리매김 할 승부수가 필요했다.

청담동 고급 샵 듣는 순간 L원장님이 생각났지만, 치가 없었다.

기회가 되는 게 아니라 실례되는 조건으로 도움을 부해야하니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거절이라도 당하자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원장님, 생각나는 분이 원장님 뿐이라 연락드려봤어요.

 방송국에서 메이크업 협조를 부탁할 샵을 찾는데

 책정된 예산이 많지는 않아요.

 말씀만 드려보는 것이니 편히 거절하셔도 됩니다."

원장님의 답변은 짧았다.

"할게요. 작가님 하시는 거면 도와야죠."


망설인 게 무색할 정도의 승낙이었다.


원장님. 진짜 안 하셔도 돼요.

솔직히 감사하지만 조건이 형편없고 죄송해서 그래요.


그러자 나를 도와주고 싶다는 말이 돌아왔다.

괜히 울컥. 했다.


원장님 왜 저를 도와주세요...?

우리는 만난 지 두 달 밖에 안 됐고

그것도 제가 신세만 졌고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 순간 들었던 원장님의 말을 기억한다.

아마 그 말은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데 작가님은 잘 될 사람이거든.

 나 지금 작가님한테 투자하는 거예요.

 나중에 큰 사람 되면 꼭 저를 기억해 주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받은 사람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겨우 4년차, 5년차 사이의 작가였다.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나. 이런 도움 받을 가치가 있나.

과연 이 분께 나는 이 마음을 돌려드릴 수 있을까.


L 원장님은 첫 녹화에 직접 와서

최고급 메이크업으로 출연자들을 변신시주시고

CP님과 피디님, H언니에게 내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었다

도움 필요하시면 말씀하시라며 깍듯이 인사를 하셨다.


피디가 물었다. 너무 감사한 분이네.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나는 말했다. 내가 너무나 존경하는 분이라고.


시간이 지나갔다.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수직 상승했다.

장수 프로그램이 되었고

원장님 샵에서는 매주 헤어. 메이크업선생님들이

녹화장으로 지원을 와주셨다.  그렇게 3개월. 6개월. 1년...


프로그램은 계속됐다.

반대로 원장님의 샵은 사정이 나빠졌다.

건물 절반을 다른 곳에 양도하셨다고 했다.

다시 6개월, 1년... 원장님은 손을 놓지 않으셨다.

약속한 건 지키셔야겠다며.


총 3년 가까이 한 프로그램에 원장님은 2년 가까이 도움을 주셨다.

마지막으로 도움을 받던 날, 원장님은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감사해서 몸둘바를 모르겠는데 무슨 말씀이시냐니.

마음만은 내가 그만할 때까지 해주고 싶었다고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어떻게 이런 은인을 만나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까.


협찬은 끝났지만 나는 가끔 원장님의 샵에 갔다.

안무 전화를 드리기도 했고,

김밥을 사서 원장실에서 함께 먹기도 했다.

프로그램이 종영을 하고.내가 프로그램을 옮기고

일이 바빠지면서 연락이 뜸해졌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

원장님의 샵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길 들었다.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번호는 바뀌어 있었다.


이후로 하는 프로그램이 잘되고

큰 프로그램에 가고 메인작가가 되

원장님이 생각나면 마음이 따끔거렸다.

가시를 삼킨 것처럼. 끝내지 못한 숙제가 있는 것처럼.

뵈어야 하는데, 아직 대단하진 못해도

덕분에 아직도 잘 버티고 있노라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7-8년이 흐른 것 같다.

선배의 SNS에서 익숙한 이름을 봤다.

신사동에 작은 메이크업 샵 다녀왔다고

눈을 의심했다. L원장님이었다.

선배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연락을 했다.


원장님. 저예요.

바로 뵈러 갈게요. 샵 주소 좀 알려주세요.

그 길로 찾아갔다. 기회가 날아가버릴까 봐서.


신사동에 차린 샵은 예전만큼의 크기는 아니었다.

원장님도 그 사이 많은 일을 겪으셨다고 했다.

그날, 나는 원장님께 약속했다.

저에게 투자하신 것 잊지 않고 있다고.

나중에 꼭 불려서 되갚을 테니 기다려 달라고.

아직 못 갚았으니 여기에 약속을 새겨둔다.


그분의 안목이 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게

지금보다 더 꼭 잘 돼서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투자하셨던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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